역사를 선별해 살아갈 수는 없다

[안치용의 노벨문학상의 문장] 귄터 그라스 <양철북>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다만 나에게 약속된 저 양철북만이 당시 태아의 머리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나의 욕구가 강력하게 표출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이 상태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양철북>(귄터 그라스, 장희창 옮김, 민음사)

주인공이자 화자인 30살 오스카가 정신병원에 갇혀 과거를 돌아보는 형식의 소설이다. 이 회고는 독일 현대사의 회고이자 반성이다. 현대소설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양철북>은 1959년 초판이 발행되기 전부터 화제를 뿌렸다.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한 귄터 그라스는 1954년에 당시 독일 전후 청년 문학을 대표하는 모임 '47그룹'에 가입하여 1958년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고를 모임에서 읽는다. 이 낭독만으로 <양철북>은 이 해 '47그룹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 작품은 당시 불모지와 다름없던 전후 서독 문학에 세계적인 시선을 끄는 전환점이 된다.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현재와 오스카가 돌이켜보는 1899~1954년의 독일 역사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풀린다. 1부는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의 출생과 성장, 결혼, 오스카의 탄생을 그리며 단치히에서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정의 밤'은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나치당원과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이 독일 전역의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시나고그에 방화한 사건이다. 당시 깨진 유대인 상점의 진열대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던 것에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란 이름이 붙었다. '깨진 유리의 밤', '11월 포그롬' 등으로도 불린다. 2부는 단치히를 떠나기까지, 3부는 전후 시대 뒤셀도르프를 배경으로 오스카의 개인적 운명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라스가 양철북을 통해 인간들이 떨쳐 버리고 싶었던 거짓말, 피해자와 패자 같은 잊힌 역사의 얼굴을 장난스러운 블랙 유머 가득한 동화로 잘 그려 냈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이 "양철북을 두들기는 빌헬름 마이스터"란 평가를 받았지만, 영웅의 발전과정을 기록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난쟁이이고 등장인물은 역사에서 고통받은 소시민들이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을 따르지만, 인용문이 대변하듯 성장이 아닌 성장중단을 결심했다는 측면에서 특별한 성장소설인 셈이다. 비범하고 강렬한 언어 구사, 상징과 암시가 넘치는 이미지, 반어와 역설 그리고 풍자로 가득 찬 표현이, 흥미로운 줄거리와 함께 작품을 가득 채운다.

발표 당시 교회와 신성에 대한 모독, 외설성 등으로 논란이 일긴 했지만 그로테스크를 앞세운 리얼리즘 서사로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한 작품으로 남았다.

오스카가 폴란드 민족운동가였던 조부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한다. 추격을 피해 감자밭으로 도주한 조부는 밭에서 일하던 소녀의 치마 속에 숨어 들어가고 이 일로 소녀는 오스카의 조모가 된다.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는 폴란드인 사촌인 얀 브론스키를 사랑하지만 독일인 알프레드 마체라트와 결혼한다. 이 결혼에서 오스카가 단치히에서 태어난다. 단치히의 현재 명칭은 그단스크로 폴란드 영토다. 오랫동안 독일 영토였다.

오스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의 지적 능력이 있었고, 추악한 어른 세계를 혐오하여 3살 때 더는 성장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일부러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성장을 멈춘다. 오스카는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다만 나에게 약속된 저 양철북만이 당시 태아의 머리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나의 욕구가 강력하게 표출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이 상태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난쟁이로 살아가는 오스카는 선물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이 양철북은 오스카의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 흐름에 대한 순응을 거부하는 직접적인 상징으로 사용된다. 오스카가 성장이 멈춘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의미상 난쟁이 상태와 양철북은 연결된다.

신체가 아이 상태로 멈춘 채 성인의 지능으로 사유하며 오스카는 세상을 관찰한다. 때로 양철북을 두드리며 어른들과 그들이 만든 잘못 돌아가는 세상에 분노를 표출한다. 그에겐 약간의 초능력이 있어서, 양철북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면 그 충격파로 주변 유리가 모조리 깨진다. 엄숙한 나치 행사에서 북을 쳐서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행사를 망쳐버리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 아그네스와 친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브론스키가 차례로 사망한다. 아버지가 고용한 가정부 마리아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가 마리아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전쟁이 끝나는 와중에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사살되고, 그의 장례식에서 양철북을 집어 던지고는 다시 성장하기로 작정한다.

오스카는 마리아와 동생 혹은 아들인 쿠르트와 함께 단치히를 떠나 서독으로 이주한다. 서독에서는 암시장에서 거래하는가 하면 석조공으로 일하는 등 새롭게 성인의 경험을 쌓는다. 간호사 도로테아를 만나 흠모하게 되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오스카는 살인 누명을 쓴다. 정신이상자로 판정돼 정신병원에 갇힌 오스카가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정신병원에서 나가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한다.

귄터 그라스(1927~2015년)는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설립된 자유도시 단치히에서 독일계 식료품 상인인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치히는 제2차세계대전 후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가 되었고, 작가는 명성을 얻고 나중에 고향인 그단스크 명예시민이 되었다. 청소년기에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고 전쟁 말기에 공군보조병, 전차병 등으로 복무했다가 미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 수감됐다. 이 일로 나중에 나치 부역 논란에 휩싸였다. 가난 때문에 15세에 학업을 중단했고, 전후에는 광산에서 일하며 석공 기술을 배웠고 이후에는 뒤셀도르프 예술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적 모임인 '47그룹'에 가입했다. 1958년 처녀작인 <양철북> 초고를 '47그룹'에서 낭독하여 그해 47그룹 문학상, 이듬해 폰타네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독일 사민당에 입당하여 빌리 브란트 선거 운동을 하였다.

<고양이와 쥐>(1961년), <개들의 시절>(1963년)을 발표하여 <양철북>을 포함한 '단치히 3부작'을 완성하였다. 1976년 하버드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넙치>(1977년) 등 대작을 발표하였다. 국내외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많이 낸 독일의 대표적 참여작가다.

<양철북>의 역사성은 세계 많은 역사의 현장에 소환될 수 있다. 성장을 멈추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민망한 역사 앞에서 때로 소설에서 오스카가 보여준 성장의 중단 같은 회피가 가능하지만, 종국엔 성장 중단을 중단하고 삶을 대면하여야 한다는 성찰, 혹은 고통을 제시한다. 역사는 선별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1999년 수상.

▲Child's head (1916), Gustave De Smet (Dutch, 1877 –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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