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은 1920년에 처음 출간된 저서다.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초기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까지 주로 수학자로 알려졌던 그가 어떻게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그 사상적 경로를 따라가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화이트헤드는 1924년 런던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직후 하버드 대학 철학과 정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이처럼 그가 수학자에서 철학 교수로 변신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을 통해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쌓아 올린 수리 논리학자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자연철학자 혹은 형이상학자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훗날 '과정 철학’ 또는 '유기체 철학’이라 불리게 될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의 씨앗이 되는 여러 개념을 펼쳐 보인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자연'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이란 결코 인간이 마음대로 재단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사고(thought)를 통해 자연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모든 면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자연은 인간의 사유가 미치기 어려울 만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사물들의 복합체로서 자신만의 닫힌 체계를 이루고 있어,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인간의 사유가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자연의 '소진 불가성(unexhaustiveness)’이라 부르며, 이는 자연이 매우 복잡하게 얽힌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인간에서 완전히 유리된 채 암흑 속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자연을 알아차릴 수 있는 나름의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는 어떤 수단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을까?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이처럼 때로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자연을 인간의 인식 대상으로 만드는 도구는 바로 '추상화(abstraction)' 능력이다. 그에게 추상화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실들 속에서 단순한 패턴을 포착해 내는 인간 정신의 능력이다. 인류는 이 능력에 의지해 복잡한 자연 현상을 간결한 과학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요컨대, 인류가 이룩한 과학적 성취의 이면에는 늘 인간의 추상화 능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추상화는 매우 유용하지만, 치명적인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자연을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인간에게서 자연이 소외되는 현상을 '자연의 이분화(the bifurcation of nature)’라고 명명한다. 그는 이 책의 2장에서 다양한 표현을 빌려 이를 서구철학의 오랜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대표적인 예로, 자연의 속성을 제1 성질(크기, 모양 등)과 제2 성질(색, 소리 등)로 나누는 철학적 전통을 지적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석양의 붉은 빛과 같은 제2 성질은 인간의 정신이 첨가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연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분자나 전자파 같은 제1 성질과는 달리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된다. 결국, '실재하는 자연’ 하나와 인간의 정신이 '인식하는 자연’이라는 또 다른 자연, 즉 두 개의 자연이 존재하는 셈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잘못된 철학적 습관이 주로 추상화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이런 습관으로 인해 인간은 추상하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을 자기 중심에 놓고, 구체적인 자연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경향이 칸트의 사유를 계승하고 로크에게서 발전된 주관주의 중심의 이원론적 자연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해 이러한 잘못된 사고를 비판하고 자연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추상화의 한계를 넘어서 자연과 인간 경험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화이트헤드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과정(process)’과 '사건(event)’이다. 그에게 자연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이 책에서는 이를 종종 '사건’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화이트헤드에게 과정이나 사건이야말로 인간이 직접 마주하는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며, 반면 전통 철학에서 중시되던 정적인 '실체’ 개념은 오히려 추상화의 산물로 취급된다. 모든 존재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임을 강조하는 이러한 사유는, 이때 본격적으로 철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사유 방식이 오늘의 양자역학이나 복잡계 이론과 같은 현대 과학에 잘 부합한다는 점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본질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과정과 흐름, 즉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자연의 추이(the passage of nature)’에 있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재검토해야 할 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다. 자연은 불변하는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건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틀이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유클리드와 뉴턴의 절대 시공간 개념을 비판한다. 시간과 공간은 결코 물질이나 사건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과정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정과 사건 개념을 통해 전통 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참신한 아이디어들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과정과 사건의 관점에서 자연의 이분화를 극복하고 자연의 소외를 넘어설 때, 우리는 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드는 붉은 당구공이 단순히 붉은색이나 단단함 같은 속성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따스함이나 부딪히는 소리와 같은 경험적 측면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 활동이나 추상적 개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공간, 입체성, 관성 같은 명백한 과학적 사실만을 중시하고, 예술적 감흥과 같은 또 다른 중요한 경험적 측면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불신하게 되기 쉽다. 이 역시 정신적 요소를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이분화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한편,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가 상당한 비중을 두어 논의하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객체(object) 이론이다. 그는 여기서 전통 철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객체 이론을 발전시킨다. 일차적으로 객체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어떻게 일관성과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 역할을 한다. 그에게 객체란, 끊임없이 명멸하는 사건들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혹은 과정이 계속 반복될 때에, 인간에게 인식되는 동일한 패턴이나 형태를 지칭한다. 즉, 객체의 한 기능은 불안정한 흐름 속에 안정성을 부여하며 사건의 일시성을 보완하는 일종의 영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그의 후기 저작에서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라는 개념으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객체는 이러한 안정성의 기능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그는 객체가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사건들의 관계 안에 내재하며 그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는 후기 사상에서 보이는 정교한 주체-객체 이론이 아직은 예비적으로만 다뤄진다. 하지만 오늘날 유명한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이 그에게서 영향받은 철학 이론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논의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드는 인간뿐만 아니라 미립자나 낮은 수준의 생명체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낮은 수준의 생명체들이 인간의 사고(thought)를 포함하는 높은 수준의 지각은 아닐지라도, 일종의 '감각-알아차림(sense-awareness)' 즉, 기본적인 마음(mind)과 유사한 경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로 정서적 반응이나 목적 지향적 행동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낮은 수준의 생명체가 지닌 경험마저, 그들 나름의 감각에 기반한 알아차림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생태계 파괴로 인한 환경 위기나 현대 기술 문명 사회가 야기한 문제들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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