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혁개방 초기 중국 대중음악의 상징으로서 덩리쥔
타이완의 여가수 덩리쥔(鄧麗君)은 영화 <첨밀밀>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영화 <첨밀밀>은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온 대륙 출신 남녀 간의 굴곡진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는데, 두 주인공이 처음 친해지는 장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면, 이별 후 다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각자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인생을 살다가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덩리쥔과 그의 노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간다. 이 영화에서 덩리쥔은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중국인들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홍콩반환 1년 전인 1996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중국 대륙과 홍콩, 타이완을 잇는, 소위 중화권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것과 별개로, 덩리쥔은 대륙과 타이완 간의 정치적 긴장 관계 속에 놓여있던 존재였다. 덩리쥔의 음반은 대륙에서 정식 발매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라디오나 TV의 전파를 탄 적도 없었다. 덩리쥔 본인 또한 평생 대륙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덩리쥔의 노래는 줄곧 불법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유통되었다. 덩리쥔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사랑에 빠진 여인을 노래하는 가사는 그동안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찬미하는 혁명가요만 들어왔던 중국인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1979년 발표되어 개혁개방 이후 "중국 대륙 최초의 유행가"로 칭해지는 리구이(李谷一)의 노래 <향수(鄕戀)>는 덩리쥔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창법을 사용하여 중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스타일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덩리쥔은 타이완에서 군부대 공연을 위시한 반공활동에 열심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관방기관에서는 덩리쥔 비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글은 1980년대 초 덩리쥔의 군 위문 공연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며,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했던, "개혁개방 초기 중국인들을 사로잡았던" 덩리쥔이 실제로는 냉전 국면 속 타이완과 중국 대륙의 국가담론에 의해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덩리쥔과 국민당
덩리쥔은 1953년 타이완에서 출생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1949년에 장제스를 따라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퇴각한 국민당 군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들의 집단 거주지역인 권촌(眷村)에서 성장했다. 권촌의 거주인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버지처럼 국민당 군인들로, 이들은 타이완 현지의 본성인들과 분리되어 군대식의 위계적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강한 국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덩리쥔 역시 국민당과 인적, 정신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14세에 가수로 데뷔한 덩리쥔은 타이완과 동남아를 무대로 활동하다가 21세인 1974년에 일본 시장에 진출하였고, 그 해에 바로 일본 레코드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스타로 성장하였다. 그러던 덩리쥔의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닥치는데, 바로 1979년에 일어난 인도네시아 여권 사건이다. 1979년 2월, 덩리쥔은 홍콩에서 타이완으로 입국할 때 불법취득한 인도네시아 여권을 제시했다가 타이완 공항에서 발각되어 입국을 거부당한다. 그 자리에서 덩리쥔은 홍콩을 거쳐 바로 일본으로 갔고, 도쿄에서 체포되어 일주일간 도쿄 입국관리처의 유치장에 입감, 조사를 받았다.
그 여권은 인도네시아의 화교 지인이 마련해준 것으로, 덩리쥔은 타이완 여권보다 더 일본 비자 발급이 쉬웠던 인도네시아 여권을 이용해 일본 활동을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971년 타이완이 UN에서 퇴출된 이래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의 입지가 급속도로 축소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1972년 일본과 타이완이 단교한 이래 타이완 여권으로 일본의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늘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했고, 이는 자주 일본을 드나들어야 했던 덩리쥔에게 있어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덩리쥔은 사적으로 인도네시아 여권을 만들어 해외 출입 시에 사용하고 있었는데, 마침 타이완에 입국할 때 그 여권을 제시했다가 발각된 것이었다. 하지만 덩리쥔의 고충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타이완인들의 격렬한 공분을 샀다. 때마침 미국이 1979년 1월 1일,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함과 동시에 타이완과 단교를 발표한 직후였다. 스스로 "아시아의 고아"라고 느끼고 있던 타이완인들에게 국민가수 덩리쥔이 다른 나라 여권을 들고 다녔다는 사실은 배신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도쿄의 유치장에서 풀려난 덩리쥔은 쫓기듯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반가량 타이완과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덩리쥔의 타이완 귀국이 이루어진 것은 1980년 가을이었다. 당시 국민당의 문화공작위원회 주임위원인 저우잉룽(周應龍)이 LA로 덩리쥔을 방문하여 귀국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자강(自强) 애국기금 콘서트에 출연할 것", 또 하나는 "군 위문공연을 할 것"이었다. '자강 애국기금 공연'이란, 1979년 미국과의 단교 후 고립에 빠진 타이완 정부가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1980년을 '자강의 해(自强年)'으로 지정하고 개최한 각종 행사 중 하나였다. 약속에 따라 덩리쥔은 귀국한 지 한 달 만인 1980년 11월 14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자강 애국기금 공연' 무대에 올랐고, 이 공연의 수익금을 국가방위기금으로 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덩리쥔은 타이완 복귀 후 본격적으로 군 위문 활동에 매진하였다. 1981년 상반기에는 타이완 본섬 내 각지의 군부대를 순회하며 소규모 공연을 진행했고, 하반기에는 금문도(金門島)와 마조열도(馬祖列島) 등 중화인민공화국과 가장 가까운 전초기지를 직접 방문하였다. 이제 덩리쥔은 타이완에서 '애국'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3. <님은 전방에>: '군인들의 연인' 이미지 만들기
덩리쥔의 애국 활동 중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프로젝트는 1981년 8월에 국민당 정부가 직접 제작한 군부대 위문공연 프로그램 <님은 전방에(君在前哨)>의 제작이다. 덩리쥔은 약 3주간 전국의 군부대들을 다니면서 위문 공연을 펼쳤고, 각지의 군인들과 함께 노래하고 인터뷰하는 장면들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8월 25일에 타이중(臺中)의 부대에서 약 1만 2천 명의 군인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한 위문 공연 실황과 함께 엮어 그해 9월 추석 특집 TV 프로그램으로 제작하여 타이완 TV(TTV)를 통해 방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연예인의 군대 위문 공연을 넘어, "군대-국민-국가" 간의 감성적 연대를 형상화한 전략적 문화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그램의 앞부분은 덩리쥔이 각지의 부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노래하며 어울리는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상들에서 그녀는 군복 혹은 군복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하고 여러 명의 군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노래를 부른다. 영상은 주로 촬영지 부대를 소개하는 화면들이 주를 이루며, 덩리쥔은 작은 마이크 하나만 들고 오직 MR(반주음악)에만 맞추어 <승리의 노래소리(勝利之歌聲)>, <님은 전방에(君在前哨)> 같은 노래들을 부르는데, 영상 속의 덩리쥔은 시종 군인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거나, 어깨와 팔을 맞대며 신체적으로 매우 밀착된 모습을 연출한다. 뒷부분은 이 프로그램의 메인인 군부대 위문 공연 실황으로, 무대 위의 덩리쥔은 줄곧 여성미를 한껏 강조하는 의상을 입고 사랑 노래부터 애국적인 내용의 노래, 심지어 미국의 팝송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공연 중간중간에는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관객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사를 나누면서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고, 섹시한 의상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과 함께 댄스곡에 맞추어 춤을 추며 공연의 열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이 무대를 통해 보여지는 덩리쥔은 '군인들의 연인(軍中情人)' 그 자체였다.
노래 <님은 전방에>는 타이완으로 복귀한 덩리쥔의 애국 활동을 위해 기획된 곡이었다. "오늘 당신에게 그리움을 보내요/ 나에게 따스함을 주어서 고마워요/ 당신이 전방에서 나를 지켜주기에/ 당신을 위해서 나를 소중히 여길게요"라는 가사에서 보이듯, 이 노래는 '전방에 있는 당신'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연인 간의 대화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노래를 통해 덩리쥔은 군인들의 연인으로 표상되는 동시에, 군인들로부터 보호받는 타이완 국민을 대변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 공연은 타이완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음반과 영상물로도 제작되어 널리 소비되었다. 대부분의 군부대 위문 공연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님은 전방에> 프로젝트는 단순히 군인들을 위로하는 공연의 성격을 넘어, 전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의 위기 속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덩리쥔은 '애국'의 아이콘이 되었고, 타이완의 국민가수가 되었다.
4. 문화냉전 국면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타이완에서 덩리쥔이 군부대 위문 공연에 매진하면서 '애국 연예인'으로 호칭되는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그녀의 노래가 불법 유통된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관방에서는 덩리쥔의 노래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봄, 중국의 음악인들을 관리하는 공산당 조직인 중국음악가협회는 회의를 개최하고 덩리쥔의 음악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들의 입장은 덩리쥔의 음악이 퇴폐적이고 유해하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리쥔의 음악이 정식으로 발매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관방조직이 나서 덩리쥔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당시 중국 대륙에서 덩리쥔의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징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덩리쥔이라는 가수는 타이완 해협 양안에서 수용자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로 투영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문화냉전의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감정 정치'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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