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밤의 '비상계엄'은 해를 넘겨 4월 4일 '대통령 윤석열 파면' 선고로 일단락되었다. 그 123일은 광장에서 부른 노래 한 구절처럼 각자의 시간과 현대사에 되돌릴 수 없는 '한 페이지'가 되었다.
헌재의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론 1.19 서부지법 폭동사태 재현의 우려도 컸다. 다행히 선고 당일 집단적 폭동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첫 집회에서 김용현은 지지자들에게 '파면 불복'을 선동했고, 전광훈 등은 헌재 해체와 헌법재판관들을 위협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비상계엄 이후 민주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광장의 경이로움만큼,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적 도발을 일삼고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부상은 낯선 공포였다. 그러나 반인권적 혐오와 파괴적인 광기를 드러낸 그들을 극우로 호명하며 불가피한 '공존'이라 단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푸코는 현대 정치학의 핵심은 더 이상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생산되고 유지되는 규제 메커니즘을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권력의 정신적 삶>, 주디스 버틀러). 그런 점에서 극우로 불리는 세력의 본질을 따져보는 일은 다양한 생각과 지향이 질서있게 병존하는 민주주의 사회와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구성을 위한 대비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1.
극우는 끊임없이 '옳지 않은' 선을 만들어왔다. 역사적으로 초기 파시즘은 특정한 인종을 배제함으로써 '상상의 유기체적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다. 극우의 배척 대상은 국면마다 변모해왔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이민자, 이주민, 특정지역, 노동조합 등이다. 극우세력은 이들을 사회의 보호 속에 함께 사는 동료로 여기기보다 타자화하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가상한다.
하지만 이 선동은 아주 쉽게 거짓임이 드러난다. 정말 '배척 대상'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고, 그들이 사회를 위협하는가? 돌아보라. 스펙트럼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고, 크고 작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어딘가로 더 나은 삶을 쫓아 이주하며 사는 노동자이다. 또한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은 성소수자나 노조원을 보았다면, 그들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되찾아 모두에게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 분투하는 시민들이다. 극우는 자신들이 나열하는 집단들이 사회 안전에 위험해서가 아니라, 보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어떤 부정의로부터 얻어진 것임을 이 집단들이 깨우치게 하기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2.
지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경제 원리이자 문화적 담론으로 작동하는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다. 그것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생산과 축적의 과잉, 주기적 금융위기 등 자본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계속 노출해왔다. 자본주의 세계화는 글로벌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일국 내에서 양극화와 불평등이 급격히 증가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파시즘>, 미켈 볼트 라스무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정치적 의사결정은 자본의 이익에 종속될 뿐 아니라, 자본축적의 위기를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없는 권력자 개인과 소수 엘리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유용되고 있다. 또한 안정된 일자리나 급여를 얻지 못하는 한계 상황의 노동자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갈등을 은폐시킨다. 대신 자유로운 소비자 정체성의 강조, 특정 집단에 대한 사회적 낙인화, 노동에 대한 폄훼와 자기경멸의 담론을 통해 노동계급을 약화시켜왔다. 노동자∙농민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정당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려고 할 때조차, 권력편향적인 경찰을 동원해 '과격∙불법'의 오명을 씌우고 강압적이고 잔혹한 물리력으로 노동자∙농민을 직접 통제해왔음은 이번 남태령집회에서도 보여진 사실이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와 모순을 외재화하고 지연시키는 반동적 수단으로서 극우세력을 제도정치의 장 안으로 불러들였다. 자생적인 극우추종자들의 결집과 세력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런 집단을 너무도 안이하게 정당세력의 일부로 진입시킨 책임은 매우 크다. 집권세력은 극우를 배양하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기보다, 선정적인 극우를 내세워 자신들의 실정을 엄폐하려 했다. 현재 한국 극우가 처한 이런 상황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체제적 저항과 연결될 수도 있는 극우의 발흥이 한국에서는 기존 권력과 구조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다.
3.
민주주의 사회에서 극우의 확장은 극우세력의 토대를 개선하는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두에게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라는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지난 넉 달 동안 극단적 선동가들은 인간의 생명과 존재,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고 했던 수많은 희생을 무참히 거슬러 권위주의와 폭력을 자행하는 권력자의 회귀를 주장했다. 그리고 윤석열과 그 윤석열에게 자신이 가진 지위와 능력을 보태 내란을 지속시킨 '윤석열들'은 그런 극우의 주장을 방패삼아 시민들이 애써 성취해낸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까지 서슴치 않고 파괴해왔다.
극우는 사회위기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지만, 그들의 주장으로 이 위기를 해소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거친 선동은 누군가에게 매력적일 수 있지만, 종국에는 해체와 소멸로 이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복합위기 해소의 역량은 극우의 '척결 대상' 이 된 사람들에게 있다. 소외와 착취에 내몰렸지만 더 취약한 약자를 찾아 분풀이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광장의 시민들. 그들이 확인한 것은 각자의 위기와 두려움이 우리 모두와 연결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고,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구성원들을 길들이기 위한 틀 때문이라는 공감이었다. 그래서 나눌 수 없는 거대한 소수자가 되기로 한 광장의 시민들에게 갈라치기를 전략으로 삼는 극우는 이길 수 없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민주주의와 서로를 책임지려는 동료의식은 우리의 최전선이었다. 광장이 계속 더 큰 가능성과 힘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제 겨우 윤석열을 파면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모두가 또렷하게 '직관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사적 이익으로 공모한 거대한 '윤석열들'의 비루하고 탐욕스런 민낯이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혐오를 외치는 광장의 극우세력이, 실은 극우를 배양하는 체제를 책임지지 못하고 극우세력을 내세워 자본과 국가체제의 모순과 위기를 사적으로 전유한 권력과 동일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내란수괴 윤석열과 마찬가지로 그의 내란집행에 조력한 고위공직자들, 입법∙사법∙군경 엘리트들에 대해 헌정질서와 시민의 삶을 혼란과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물어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페이지에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한 목록을 채워가야 한다. 인민의 삶에 복무하는 정치를 위해 각자의 삶과 일터에서 이뤄져야 할 체제적 전환의 구체적 모습들을 만들어내자. 이제 광장의 구호도 달라졌다.
"바~~꿔 바꿔! 세상을 바꿔!"
나의 광장을 채우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 한 주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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