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외신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두고 위기를 맞은 한국 민주주의가 깊은 분열과 권위주의적 도전을 이겨내며 성숙함과 회복력을 입증했다고 입을 모았다. 동시에 정치적 양극화와 탄핵 부정 등으로 당분간 긴장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5일(현지시각) 분석기사에서 윤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동시에 회복력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윤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국회 무력 진입 시도에 대해서는 "과거 한국이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이라며, "시민들과 제도가 즉각적으로 대응해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강조했다.
NYT는 "최근 몇 주간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방탄소년단(BTS)이나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같은 문화 수출보다도 자국의 민주주의에 더 큰 자부심을 느껴왔다고 말했다"며 "윤 대통령이 그 자부심에 상처를 입혔을 때,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선택한 셈"이라고 평했다.
한국 특파원 출신 다니엘 스나이더 스탠퍼드대 교수는 NYT 인터뷰에서 탄핵을 "1980년대 민주화 이후 구축된 제도의 승리"라며 "보수 성향 인사들이 임명한 재판관들까지 만장일치로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린 것은 사건의 명백함뿐 아니라, 이념적 분열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다만 NYT는 "윤 전 대통령의 권력 장악(power grab)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신문은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민주주의 모범사례로 여겨져 온 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경고한다"고 전했다.
외신은 윤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 이전까지 보여온 통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NYT는 "윤 전 대통령은 한때 한국인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부패 혐의로 구속하는 데 기여하며, 타협하지 않는 검사로서 전국적인 이미지를 쌓았다"면서도 "정치인으로서는 참담한 실패를 드러냈다. 야당이 장악한 국회와의 협상과 타협에 전혀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윤 전 대통령이 초기에는 강단 있는 지도자로 비쳤으나, 점차 타협을 거부하고 비판을 억압하며 권위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특히 언론 탄압, 의사 파업 대응, 야당과의 극한 대립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시민사회와 충돌을 빚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매체는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성명을 인용해 "윤 전 대통령의 계엄령 시도는 인권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며 헌재의 판결이 자유와 권리를 지켜낸 결정적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고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경제와 문화를 지닌 나라로 다시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평했다.
외신들은 다만 윤 전 대통령 파면 이후에도 한국이 민주주의를 온전히 회복하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소셜미디어에서는 '북한과 중국이 윤 대통령 탄핵을 공모했다'는 음모론까지 퍼졌으며, 윤 대통령이 1월 내란 혐의로 구속되었을 당시 그의 지지자들은 영장심사가 열린 법원을 습격하기도 했다"며 탄핵 과정에서 벌어진 극우세력의 행동들을 지적했다.
FT는 이번 사태 자체와 그 여파 모두가 한국 정치 체계의 우려스러운 약점을 드러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혼란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전했다.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의 한국정치 전문가 칼 프리드호프는 FT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것이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라며 "국가 내 깊은 분열이 계속해서 곪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에릭 모브랜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또한 "윤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권력에서 물러났지만, 그들이 보여준 권위주의적 성향은 한국 사회와 기득권 체제의 일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라는 고통스러운 과거 위에 세워졌다. 권위주의 구조는 부분적으로만 해체됐을 뿐"이라며 "계엄령 선포 직후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윤 전 대통령을 비판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여당인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그의 행동을 모호하게 해석하거나 대놓고 옹호하기 시작한 인사들이 생겨났다"고 여당의 태도를 지적했다.
신기욱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계엄령이 수 시간 만에 철회했을 때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믿고 낙관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낙관은 줄어들었다"며 "사회적 분열이 너무 명확하고 고착화돼 이 나라가 국민적 화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고 FT 인터뷰에서 말했다.
외신들은 특히 대선 기간 정치권의 갈등이 더 격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와 유권자들이 지난 4개월 간의 대립을 쉽게 잊을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드물다"며 "향후 몇 달 간 정치적 긴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부 외신은 유력 대권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한국의 정치적 분열을 치유할 가능성도 낮다고 봤다. 프리드호프는 "이재명은 행정 경험이 있고, 윤석열보다 대통령 권한을 훨씬 더 영리하게 활용할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윤이 물러났다고 해도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가 험난한 길을 걸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우려했다고 FT는 전했다.
<가디언>은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윤 전 대통령이 무심코 훼손해버린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사회의 깊은 분열을 치유하는 일"을 꼽았다. 그러면서도 "올해 말 새롭게 선출될 대통령이 누구든 그가 직면할 과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김태형 숭실대 교수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하면, 반대쪽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며 대선 불복 사태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악순환이 계속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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