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독일 국회의사당을 방문했다. 그는 이 때부터 천연가스를 무기 삼아 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륙을 러시아의 '에너지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전략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푸틴의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가장 충실한 동반자가 됐다. 제조업 강국 독일에 러시아의 천연가스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사람들이 느끼는 겨울 추위는 혹독해졌다. 특히 독일이 그랬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바다를 통해 좀 더 싼 가격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노르트스트림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치솟는 가스와 전기 요금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집에서 옷을 더 껴입어야 했고, 독일 공장의 제품 생산 원가는 높아졌다.
가즈프롬 후원으로 황금기를 열었던 샬케 04
2001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푸틴은 치밀했다. 어떻게 하면 슈뢰더와 독일 정치인들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푸틴은 슈뢰더 총리가 열렬한 축구팬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슈뢰더는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클럽 중 하나인 도르트문트 팬으로, 경기장에 클럽 머플러를 착용하고 자주 등장해 화제가 됐었다.
푸틴은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클럽인 샬케 04를 먹잇감으로 삼았다. 약 27만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 겔젠키르헨에 위치한 샬케 04는 축구 팬덤이 강한 클럽이었다. 하지만 정상급 클럽과 경쟁하기 위한 돈이 늘 부족했다.
푸틴은 2001년 슈뢰더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러시아의 반(半)국영 에너지 회사 가즈프롬이 샬케 04의 후원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줬다. 실제로 가즈프롬은 2006년부터 샬케 04의 후원을 시작했고 슈뢰더 총리는 샬케 04의 홈구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독일 북부 공업 지대에서 강세를 보였던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슈뢰더 총리에게 샬케 04는 중요한 클럽이었다. 샬케 04의 연고지 겔젠키르헨이 과거 탄광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 공업 도시였기 때문이다.
가즈프롬은 샬케 04와 5년 간 약 1975억 원(연간 33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다. 독일 프로축구 역사상 최대 스폰서십 계약이었다. 이 계약으로 샬케 04는 자연스럽게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샬케 04는 이 돈으로 네덜란드의 유망주 클라스 얀 훈텔라르와 스페인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라울을 영입할 수 있었다. 2011년에는 유럽 최고 축구 클럽들의 경연장인 챔피언스리그에서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고 같은 해 독일 프로축구 컵 대회인 포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샬케 04가 전성기를 누렸던 2011년에는 3년 뒤 독일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게 되는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급성장했던 시기였다. 샬케 04는 가즈프롬과의 계약 이후 클럽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이는 노이어와 같은 유망주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샬케 04
지속된 가즈프롬의 후원으로 샬케 04는 독일 프로축구의 최고 수준으로 클럽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2019년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는 샬케 04를 세계에서 14위의 부자 축구 클럽으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20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코로나 팬데믹은 샬케 04 비즈니스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샬케 04는 홈 경기 평균 관중 6만 명을 넘길 정도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클럽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클럽 수입 가운데 티켓 판매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샬케 04는 코로나 팬데믹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수입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무관중 경기 또는 축구장 관중들의 거리두기 정책 때문에 2020~2021 시즌 샬케 04의 평균 관중은 300명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샬케 04는 파산했고 2021년에는 2부리그 강등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여기에는 가즈프롬의 후원 이후 샬케 04가 무리한 투자를 해왔다는 문제점도 함께 존재했다.
샬케 04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물론 샬케 04가 부채를 줄이고 다시 정상적인 운영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금은 가즈프롬으로부터 나왔다. 당시 가즈프롬은 연간 30억 원 정도로 샬케 04 후원을 계속하고 있었다. 클럽이 2부리그로 강등된 상황이라 후원액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샬케 04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클럽 유니폼에서 가즈프롬이라는 글자와 회사 로고를 지웠다. 다른 독일 프로축구 클럽과 마찬가지로 샬케 04가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부채에 허덕이던 샬케 04가 가즈프롬과 스폰서십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럽은 전 세계 어떤 축구 클럽보다도 이른 시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기를 드는 선택을 했다.
가즈프롬과의 계약이 취소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당초 샬케 04는 가즈프롬과의 후원 계약 기간 동안 후원사로부터의 독립적 클럽 운영을 팬들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동안 샬케 04 클럽의 이사 가운데 가즈프롬이 지명하거나 파견한 인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9년부터 샬케 04 이사로 재직했던 마티아스 바르니히는 노르트스트림 회사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샬케 04는 러시아와 독일 추진했던 노르트스트림 계획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는 맹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시민구단으로 전환한 '뉴 샬케 04'
가즈프롬과 결별한 뒤 샬케 04는 늘어난 부채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23년에만 이자와 부채 원금 일부 상환을 위해 약 253억 원을 내야 했다.
결국 1년 뒤 샬케 04는 협동조합 체제로 변신했다. 19만 명에 달하는 샬케 04 클럽의 기존 회원들을 주축으로 부채 탕감과 클럽 운영 정상화를 위한 협동조합 모델이 구축됐다.
회원들은 조합원 자격으로 낸 후원금의 액수와 관계없이 클럽과 관련된 모든 일에 1표씩 그들의 권리를 행사한다는 조항도 추가했다. 후원금을 많이 낸 특정인이나 법인이 클럽 운영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샬케 04의 협동조합 체제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협동조합으로 변신한 뒤 3일 만에 52억 원이라는 돈이 모금됐다. 비록 2부 리그에 속해 있지만 2023~2024 시즌 홈경기 평균 관중 6만1388명을 기록한 샬케 04에 대한 지역민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샬케 04 팬들은 그 어느 축구 클럽 팬 이상으로 연대의식이 강하다. 독일의 대표적 탄광 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겔젠키르헨의 사회적 성격 때문이다. 샬케 04의 팬들은 광부의 아들딸들이 많다. 어둡고 위험한 탄광 갱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경험이 세대가 지나도 전해진 덕인지 이들의 공동체 의식은 끈끈하다.
'크나펜(Knappen, 광부들)'이라는 별칭이 샬케 04에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지어 샬케 04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서는 터널은 탄광 갱도를 옮겨 놓은 것처럼 만들어졌다. 광부들의 성원으로 성장했던 클럽의 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지난 3월 20일 샬케 04는 2024~2025 시즌 상반기 클럽의 경영지표를 발표했다. 클럽은 104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2023~2024 시즌에 샬케 04가 38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반등이다.
샬케 04의 흑자 전환에는 물론 조합원들의 모금액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여기에다 공연 때마다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샬케 04 홈구장에서 진행한 콘서트도 클럽의 수입 확대에 큰 도움이 됐다.
흥미롭게도 우크라이나 클럽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도 샬케 04의 흑자 전환에 힘을 보탰다. 전쟁 중이라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를 치를 수 없었던 샤흐타르 도네츠크는 유랑극단처럼 떠돌아 다니며 경기를 치러야 했다. 샤흐타르 도네츠크는 이번 시즌 침패언스리그 경기를 샬케 04의 홈구장에서 펼쳤다.
러시아 가즈프롬에 후원을 받아 전성기를 누렸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즈프롬과 손절한 샬케 04의 홈구장에서 우크라이나 클럽이 경기를 펼치는 일이 벌어지자 유럽에서 큰 화제가 됐다.
프랑스 기자 마리옹 반 렌테르켐은 <노르트스트림의 덫>이라는 책을 통해 "노르트스트림은 푸틴이 유럽 대륙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다"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 트로이의 목마를 좀 더 부드럽게 움직이게 했던 윤활유는 가즈프롬의 샬케 04 후원이었을지 모른다.
샬케 04가 위치한 겔젠키르헨은 탄광도시에서 태양광을 중심으로 한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했다. 연고 도시의 변신과 마찬가지로 샬케 04의 변화는 성공할 수 있을까? 푸틴의 야욕에서 시작된 가즈프롬 후원 시대를 청산하고 협동조합 체제를 선언한 '뉴 샬케 04'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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