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도 말했다. 국민저항권을

[오찬호의 틈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게 국민통합

'죽을' 각오가 아닌 '죽이겠다'는 결의

인문학의 중요성이라는 말은 대단히 추상적이지만, 언어의 맥락이 찌그러져서 부유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 저 단어의 의미가 저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자유, 공정, 정의 등을 설명하는 철학자들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면 어찌 윤석열 대통령이 연설마다 뱉었던 언어들이 납작하지 않다고 여기겠는가. 정치인 한 명의 문제라면 내가 다 부끄럽다면서 한숨 몇 번 쉬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런 대통령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언어를 멋대로 오용할 때다.

서부지법 폭동을 '시민불복종'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서 자화자찬하는 게 아니라 어떤 교수가 라디오에서, 어떤 정치평론가가 TV에서 망설임 없이 말했다. 심지어 전태일이 연결되어,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충되기도 한다. 한 목사는 '국민저항권'이란 참으로 울컥한 단어를 광장에서 연일 얄팍하게 부르짖는다.

역사가 평가하는 국민저항권은, 저항하면 죽는 마당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꿈틀거렸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니 울컥한다. 하지만 현재 이 말을 퍼 나르는 이들이 뱉는 추임새는 죄다 이렇다. 빨갱이들, 종북좌파, 가루가 될 것이다, 너희들이 살길은 이것뿐이다 등등. 이건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이겠다는 결의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용기가 아니라, 상대를 두렵게 하겠다는 폭력이다. 역사 속 저항자들, 불복종자에게는 없었던 맥락이다. 그러니 얄팍하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11차 변론일인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악은 무엇이고 양심의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이게 요즈음에는 어떤 맥락에 붙고 있는가. 최근 보수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는 유명 역사 강사는 칠판에 이 글귀를 적어놓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으니 행동하자고. 그러니 DJ의 교훈은 곳곳에 다다른다. 탄핵을 반대하는, 헌법재판소가 이념적이라는, 계엄은 계몽령이었다는, 중국사람 꺼지라는 등등의 말을 내뱉는 이들이 DJ의 저 말을 사용하면서 분노한다.

한국사에서 계엄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정치인이 그런 맥락에서 사용했겠는가. 이 말은 <씨알의 소리> 창간 5주년 기념 시국강연회 연설에서 등장했다. 납치되어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은(1973년) 국가폭력이 일상이었던 서슬 퍼런 유신시절(1975년 4월 19일)에도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DJ는 "방관은 최대의 수치, 비굴은 최대의 죄악"이라며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죽을지도 모를 각오로 말이다. 그만큼 절실했다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런 시절이었다.

1974년 1월 8일에 공표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될 수 있다는 협박이 가득하고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며 끝맺는다. 토 달면 인생 끝난다는 말이다. 4월 3일에 등장한 긴급조치 4호는 희대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짓밟고자 만든 이 조치에는 학생들이 시위하거나 이유 없이 결석하면 문교부장관이 학교도 폐교시킬 수 있다는 겁박이 공식문서로 등장한다. 이 황당한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에도 처할 수 있다는 더한 황당함과 함께. (복귀하지 않는 전공의를 처단하겠다는 2024년 12월의 계엄령 포고문에 묘한 기시감이 든 이유일 거다.)

그때 한 말이다. 악은 무엇이고 양심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시대의 맥락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행위'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이들을 끌고 갔고, 고문했고, 심지어 죽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발표하면서, 국회의 탄핵 의결을 앞두고 국민담화문을 말하면서, 헌재에서 계엄의 사유로 선거부정을 들면서 뱉은 모든 언어에 있던 맥락과 무엇이 다른가.

DJ의 말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건,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국민의 저항을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국민저항권을 불씨 삼아 정권을 잡았고 이후 나치독일을 정당화하고 보편적 인권의 크기를 찌그러트렸다. 국민저항권은 보편적 인권에 '나도 포함시켜 달라!'는 절규인데, 그게 역사에서 오용되니 인종을 차별할 자유 따위가 만들어져서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색깔론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는 이들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하고 있으니 어떤 세상이 도래했는가. 거기에 도취된 이들이 재판관 집을 찾아가 조롱하고, 인권위 앞에서 사람들을 겁박하고, 대학을 찾아가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지 않은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출석한 가운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열린 지난 1월 18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법원 담장을 넘으려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해야 역사는 진보한다

맥락 없는 말은 이 정부 내내 이어졌다. 기념일마다 기념일 취지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연설을 대통령은 반복했다. 그 전통, 최상목 권한대행도 잘 이어받고 있다. 3월 1일의 기념사는 어떠했는가. 국민통합, 국민통합, 국민통합이 처음과 끝이었다. 통합에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현재의 갈등이 어느 쪽으로 통합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통합을 언급한다면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묻는 방향, 일본의 미온적인 사과를 비판하는 방향이 되어야 함이 '맞는' 맥락이다.

그 결을 다 제쳐두고 그저 통합이라는 말만 내세우는 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느냐'는 괴상한 가치관만을 부유하게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걸 어긴 자들은 갈등을 야기시켜 통합을 방해한 자로 매도당했다. 성차별을 따진 사람은 남녀 갈라치기의 주범이 되었고 양극화를 비판한 사람은 계층 간 혐오를 부추겼다면서 말이다. 언젠가부터 일제강점기의 끔찍함을 짚으면, 한일 양국의 미래를 방해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통합이라니. 그것도 삼일절에.

그날의 하나 된 외침, 오늘의 하나 된 대한민국. 이번 기념일의 주제였다. 권한대행이 국민통합이라고 강조할 때마다 뒤편에 적힌 그 글귀가 강하게 겹쳐졌다. 그날, 모두가 하나되어 만세를 외쳤으니 오늘도 제발 하나가 되자는 의도였을 거다. 하지만 3.1 만세운동은 그저 많은 이들이 참여했기에 의의가 있는 게 아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목숨 걸고 말했기에 대표적인 국민저항으로 평가받는다. 처음엔 서구열강에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는 목적으로 지식인 위주로 기획되었던 행사가 민중들에게 들불처럼 번진 이유는 일제가 원하는 통합은 상식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힘이 있었기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군주제인 대한'제'국이 아니라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염원하는 역사의 물결을 상해임시정부는 배신하지 않았다. 괜히 헌법전(前)문에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쓰여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시작점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 장군들의 흉상을 이전하기로 한 이유는 얼마나 추잡했는가. 그래 놓고, 통합이라니.

3.1 운동의 교훈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때,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범죄자 소굴이라고 했다. 어떻게 통합한단 말인가? 대통령은 자신의 전화 통화 지시를 들은 국정원 1차장에게 술 취한 거 아니냐면서 의심했다. 대통령 변호인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수방사 1경비단장에게 '의인인 줄 아냐'면서 빈정거렸고 암 투병 중인 경찰청장을 향해선 조사 받을 때 섬망증세 없었냐면서 별의별 공격을 가했다. 어찌 통합이 가능하겠는가.

그 대통령을 따르는 이들은 국민저항, 시민불복종 등의 엄중한 단어를 맥락 다 제거해 멋대로 사용하면서 헌법재판소를 협박하고 판사를 겁박 중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역사에 기록하는 그 민주적 절차가 무시받는데 통합이 가능한가? 상식과 비상식의 양측 입장을 중립을 지키며 균형 있게 이해하면, 서로 싸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통합은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를 때만 해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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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민낯들>(2022),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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