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 이재명'의 대결에서 이재명이 승리하는 길은?

[기고] 민주헌정 세력의 압도적 승리를 위한 담대한 기획

차가운 내전(cold civil war)

민주헌정의 위기입니다. 위기인데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위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위기의 근원을 찾기보다 손쉬운 진영대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윤석열 탄핵 반대가 35~40%에 육박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윤석열 탄핵 찬반 여론은 민주헌정의 위기라는 본질을 진영대결 양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일상마저 찌뿌둥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조기 대선이 실시돼도 안병진(경희대 정치학과 교수)이 말한 '차가운 내전(cold civil war)'이 지속될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 '차가운 내전'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소롭고, 가소롭다기엔 너무나 심각한"(필립 로스 소설 <샤일록 작전>) 진영 전쟁입니다. 이 '차가운 내전'은 나오미 클라인이 언급한 것처럼 "양분화된 사회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이쪽에서 말하고 믿는 게 뭐든 상대편은 정반대를 말하고 믿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듯, 정치 전반이 점점 거울 세계처럼 변해가는 방식"으로 민주공화정의 심장부를 거세게 강타하고 있습니다.

'시사인-한국리서치' 웹조사에 따르면, 보수 유튜브 시청시간이 1시간 이상인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탄핵 반대와 폭력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수 유튜브 과몰입층(하루 1시간 이상 시청)의 68%가 비상계엄이 정당했다고 했고, 74%가 윤석열 탄핵에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63%가 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국민의 저항권 행사라고 인식했습니다. (2월3일부터 5일까지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2,000명 대상으로 2025년 유권자 인식조사 실시. 응답률 25.2%.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_2.2%. 자세한 것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사유의 공간을 질식시킨 정보의 무간격성이 새로운 파시즘의 숙주입니다. 확증편향으로 가득한 유튜브에서 진실과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상대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반대하고 혐오합니다. 선거를 통한 독재, 즉 페이퍼 리바이어던(paper Leviathan)의 시대가 구조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깁니다.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에서 극우 포퓰리즘에 기반한 극단적 국가주의와 민주주의 파괴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전장에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선명한 부족주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급기야 공공연하게 상대를 제압한다는 명목 아래 민주헌정 질서를 부정하는 대담무쌍한 파시즘적 반동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은 반헌법적 비상계엄으로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관위를 무장 침탈하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을 장악하려 했으며 주요 정치인, 언론인, 법관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포 투옥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 민주헌정 파괴 시나리오는 만약 위대한 시민이 없었다면 가혹하고 낯설지만 자칫 현실이 될 뻔했습니다. 국회 앞에서 계엄군을 막아내고 남태령, 키세스 시위를 거쳐 지금도 차가운 광장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는 청년과 시민들께 감사와 경의를 보냅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내란의 우두머리는 아직도 뻔뻔하게 진영의 부족들을 선동하며 정치적 전쟁을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원래 중도 보수?

윤석열이 탄핵되고 조기 대선이 실시되면 이번 대선은 민주헌정 질서를 지키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를 수호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민국을 전진시키는 선거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조기 대선은 야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재명 대통령을 승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거"가 될 것입니다. 이는 윤석열의 시간이 가고 곧 굉장히 강력한 이재명의 시간이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민주당과 이재명에겐 이 시간의 초반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장점과 단점, 위기 요소와 기회 요소를 명확히 하고 하나씩 대응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거티브 쟁점을 무력화하거나 최소화하고 유리한 그라운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구체적인 공격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응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전략은 트럼프 재선 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리스크를 덮어씌우기 위해 트럼프는 이 슬로건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지금 민주당과 이재명은 아직 대한민국의 방향을 제시할 반복할 슬로건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슬로건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재명 대표는 뜬금없이(아마 전략적으로?) 진보-보수 논쟁의 불을 지폈습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유튜브에 출연해 최근의 자신의 정책적 행보가 '우경화'가 아니며 민주당은 원래 중도 보수 정당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최근 금투세와 상속세의 유예 또는 완화, 주 52시간 유연화 등 정책 우클릭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우클릭이 아니라 그게 원래 민주당의 본래 모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비명계 모임인 초일회를 비롯해 김부겸 전 총리, 김경수 전 지사,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 등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비판의 요지는 중도 진보 정당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민주당을 자기 마음대로 보수로 규정함으로써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주당의 정체성을 훼손했고, 또 이재명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임기제 당 대표가 민주당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자기 마음대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을 보수로 규정한 것은 한마디로 허구이며 월권이라는 뜻입니다. 보수를 자처해 온 국민의힘은 기본소득, 소비쿠폰 등에 대한 이재명의 말바꾸기 등을 소환하며 '양두구육' 같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이재명의 '보수 커밍아웃'은 나름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엔 국민의힘이 보수 정당이 아니라 극우집단, 나아가 범죄집단이 되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국민의힘을 보수가 아니라 극우 혹은 내란세력으로 규정하기 위한 공간 패스 성격을 갖습니다. 축구로 치면 국민의힘이 엔드 라인 밖으로 뛰어나가 장외투쟁을 하면서 축구의 규칙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오른쪽 공간에 볼을 차넣으면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특히 대선 경기에서 이렇다 할 선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진보세력 즉 왼쪽 공간은 무주공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오른쪽 공간으로 달려가 의제를 선점하면 끝이라는 단순한 셈법입니다. 0.73%라는 대선 패배의 섬뜩한 숫자를 중도 보수 지지로 채우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략적 우클릭' 득보다 실 많아

하지만 새로운 쟁점을 만들 때는 언제나 반대급부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사실(리얼리티)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민주당이 역대급으로 보수화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주당의 역사를 인식(퍼셉션)의 관점에서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현실 정치에서 보수-진보는 상대적 개념으로 인식됩니다. 김대중, 노무현도 관점에 따라서는 보수 정치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민주당을 상징하는 이 두 명의 정치 지도자는 평화와 복지,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에서 중도, 진보, 리버럴을 상징하는 대한민국의 리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현재 민주당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강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주독립정신과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촛불시민혁명의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고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라고 시작합니다. 모두 대한민국 진보의 역사를 분명하게 아로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강령에서 제기하고 있는 정책 목표 또한 한국 정치지형에서는 사뭇 진보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혁신성장과 민주적 시장경제, 노동존중사회, 지역불평등 해소, 평화로운 한반도, 탄소중립과 지속가능발전, 보편적 복지국가, 성평등 민주주의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헌법처럼 지금의 민주당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최상위 텍스트입니다. 민주연구원도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당의 역사와 강령을 두루 살핀 뒤 "민주당의 정치철학은 전 세계 중도진보 정당의 주류 노선"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사회자유주의, 독일 기민당의 질서자유주의, 보편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시대에 맞춰 수단을 혁신하는 성찰보수주의가 깔렸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당 대표가 이것을 한마디로 "보수'라고 규정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민주당은 진보, 중도, 보수, 리버럴이 뒤섞인 굉장히 와이드한 이념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이재명의 '보수 선언'은 민주당의 확장 전략에 도움이 될까요? 비토층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번 조기 대선은 민주헌정 질서를 지키는 선거입니다. 단순한 진보-보수의 대결이 아닙니다. 프레임상 민주헌정 질서를 지키는 전선이 폭이 더 넓고 민주당과 이재명에게 유리합니다. 적어도 6대4 정도의 구도입니다. 하지만 진보-보수 대결을 공론화할 경우 자칫 국민의힘에게 상승의 사다리를 내려줄 우려마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인식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국민의힘을,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왔고,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진보-보수가 아니라 민주헌정 질서 수호를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이번에 민주당과 이재명이 캠페인을 정말 잘한다면,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즉 아스팔트 보수의 '불복과 내전' 상황을 극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재명 비토층이 꽤나 두텁습니다. 그리고 그 비토층은 그가 진보여서 비토하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복잡한 사정들이 있습니다. 윤석열 탄핵소추와 체포 이후의 여론이 박근혜 때와 확연히 다른 것은 탄핵 이후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 진영 대결의 격화 등의 이유도 있지만 이재명이 안고 있는 사법 리스크와 '야권 192석+이재명'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심리적으로 '제약 없는 독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단순히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치적 확장에 필요한 것은 진보였던(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한 정치 지도자가 어느 날 중도였다가, 보수였다가 하는 그런 분신술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분신을 또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성을 가진 개인 혹은 세력이 다른 고유성을 가진 개인 혹은 세력과 연합할 때 지지 기반이 확장될 수 있습니다. 김대중의 DJP 연합이 승리한 핵심 이유는 김대중이 어느 날 평화를 포기하고 대결을 말한 것이 아니라 평화의 가치를 지키면서 보수의 대표 주자인 김종필과 권력을 나눠 가져서 지지층을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김성식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책의 우클릭이나 포퓰리즘은 핵심 과제도 아니고 그것으로 신뢰를 회복하기도 어렵다. 과거에 정권을 가졌을 때의 승자독식과 이분법적 국정운영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이야말로 국민들의 마음이 더 넓게 열리도록 하는 출발점이다. 박빙으로 정권을 잡아봐야 내전의 사회적 정서 속에서 정권이 표류할 뿐이다. 이번에는 권력의 독식이나 남용을 아예 불가능하게 하겠다는 실질적 정치 설계(자기 족쇄를 포함한 국정운영의 민주적 제도와 장치의 설계, 선거연합과 국정연합에 대한 비전 등)를 가시적으로 실천할 때, 민주헌정의 지지기반은 더욱 커지고 국정의 성공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극우의 정치사회적 기반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도 자명하다."

첨언하자면 현대 정치에서도 지도자가 가진 에토스의 일관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뢰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관성이 없으면 포용적 리더십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일관성은 독주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관성을 존중하는 정치인은 다른 사람의 일관성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을 가진 리더가 포용성을 갖고 다양성을 수용하며 결정적으로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결단을 할 때 지지층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재명이 보수라고 주장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재명이 스펙트럼을 넓혀 좌든 우든 중도든 연합권력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구체적 계획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신뢰받는 정치 분석가는 (새로운 데이터 등으로 인한) 발견을 통해 마음을 바꿀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뢰받는 브랜드는 이와 정 반대의 의무를 지닌다. 천지가 뒤집히는 한이 있더라도 사활을 걸고 브랜드 정체성-약속-을 사수해야 한다. 좋은 브랜딩이란 절제와 반복의 수양이다. 그건 언제나 미리 걸음의 폭을 계산해둔, 즉 제자리걸음이라는 뜻이다."(나오미 클라인 <도플갱어>) 정치 리더는 분석가가 아니라 브랜드에 가깝습니다.

이재명의 '보수 선언'은 그 전략적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네거티브 측면을 부각하게 됩니다.

첫째,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관통해 온 민주당을 독선적으로 규정한다는 비판. 즉 민주당 사당화 프레임

둘째, 말바꾸기 논란. 표가 되면 무엇이든 한다는 비판

셋째, 진보의 성지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광주와 호남 시민과 진보 지지자들에게 정체성의 혼란

넷째, 정의당, 조국혁신당 등에 새로운 진보블럭 형성의 동기를 강화

다섯째, 정책공약의 허구화. 약속에 대한 신뢰 자본이 고갈될 가능성이 점점 상승

그러므로 진보-보수 논쟁을 확대하지 말고 민주헌정 질서 수호와 대한민국의 통합적인 전진을 강조하는 것이 이재명의 시간을 더욱 두텁게 지켜줄 것입니다.

이재명 박스권인가, 대세론인가?

헌재가 25일을 최종 변론일로 지정했습니다. 26일엔 이재명 선거법 위반 재판 결심이 열립니다. 이래저래 이재명의 시간이 왔습니다.

한국갤럽 2월 3주 정례조사(2월18일~20일, 이통3사 가상번호 전화면접조사, 만18세 이상 성인남녀 1,002명, 95% 신뢰수준에 +_3.1%. 자세한 것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탄핵 찬성이 60%로 탄핵 반대 34%의 두 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정권교체 53%, 정권연장 37%로 두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모양새입니다. 합리적 보수와 중도 세력이 극우 세력의 폭력적 행동에 거리를 두면서 보수 과표집이 눈에 띄게 해소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한길의 야만적인 광주 금남로 집회는 민주주의 희생자에 대한 역린으로 받아들여졌고, 집단으로 몰려가 항의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헌재 흔들기가 중도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층마저 떠나가게 만들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재명 지지율은 34%로 지난 주와 같았으나 김문수 장관은 9%로 3% 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여권 주자들의 존재감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민주헌정 질서를 지키려는 중도층이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며 적극적으로 조사에 응답하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국민의힘의 '훌리건 폭주'는 민주당과 이재명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입니다. 한덕수 탄핵으로 정치적 공간을 만든 국힘은 윤석열의 관저 농성으로 극우 보수의 결집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진행됐었습니다. 하지만 권영세 비대위원장이 내란은 물론 계엄마저 정당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국힘의 도를 넘는 막가파 정치가 중도층 민심을 싸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2월11일~13일에 실시한 한국갤럽 정례조사에서는 의미 있는 데이터가 포착됐습니다. 여야 대선 후보의 비토층(지지의향 없다+절대 지지하지 않는다)에서 지지층(지지의향 있다+적극지지한다)을 뺀 여론을 조사한 것입니다. 이 조사에서 이재명은 -12(53-41)을 기록해 압도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국힘이 내란을 옹호하고 그들에 기반해 있는 한 이재명 박스권이라는 말은 언론의 프레임에 불과하다는 방증입니다. 국힘이 반성과 혁신을 통해 스스로를 대전환하지 않는 한 현재 상태는 이재명 대세론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이 조사에서 여권 유력후보로 떠오른 김문수는 -30(58-28), 오세훈은 -32(61-29), 홍준표는 -43(68-25), 한동훈은 -53(72-17), 이준석은 무려 -65(78-13)였습니다. 데이터로 보면 이재명은 현재 거론되는 여야 대선 후보군 가운데 비토층이 가장 엷고 지지층은 가장 두텁습니다. 지금 상황은 이재명 박스권이 아니라 이재명 대세론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국힘의 태도에 따라 이재명의 현재 지지율은 박스권일 수도 있고, 대세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힘은 이 상태로 주저앉고 말까요? 대통령 헌재 판결 이후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요? 저는 그 가능성을 현재 반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힘엔 스티브 배넌이 없다, 아직은!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스티브 배넌 같은 교활한 전략가가 국힘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법 질서를 대놓고 부정하는 전광훈, 전한길 등의 지지 폭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힘이 이들에 기대어 시간을 허비한다면 야권의 집권은 의외로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트럼프 정부의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2020년 대선 패배 이후 '워룸'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 지지자 확장에 나섰습니다. 'MAGA 플러스', 즉 마가의 확장판을 자처한 그의 팟캐스트는 우리나라 극우 유튜버들처럼 단지 극렬 지지층 결집만을 위한 방송이 아니었습니다. 배넌은 오히려 "상대편 지지층에서 먼지 쌓인 사각지대와 낡아 해진 모퉁이를 읽어내는 예리한 눈썰미로 취약점을 파고들어 자기 편으로 끌어오는 전략"(나오미 클라인 <도플 갱어>)을 구사했습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고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추앙한 이탈리아 여성 첫 총리이자 파시즘에 뿌리를 둔 '이탈리아 형제들' 당수인 조르자 멜로니도 마가 플러스의 일원이었습니다.

배넌이 반복하는 이념은 놀랍게도 포용 국가주의입니다. 트럼프가 이민자를 공격하는 동안 배넌은 '포용'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배넌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비 지원 확장에 반대한 미국 좌파의 강경한 반전주의자들의 논점을 차용해 바이든 정부의 군산복합체 카르텔을 공격하며 이를 교묘하게 반중 메시지로 연결시킵니다.

배넌은 백신 반대자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민주당 계열의 유명한 페미니스트 나오미 울프를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배넌은 인종주의와 페미니즘의 틈새에서 백인 남성과 여성 노동자를 파고들었습니다. 배넌은 "단방향 거울 너머를 들여다보며 정적이 방관하고 무시하는 주제들, 깃발을 꽂아봄직한 비옥한 이념적 영토, 적어도 전문성이 있는 것처럼 텃세를 부려볼 수 있는 세 구역 그 이상을 간파"했습니다.(<도플갱어>)

특히 배넌은 이른바 좌파가 축출한 사람, <뉴욕타임스>가 능멸한 사람을 찾아가 방송 출연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선에 출마했다가 트럼프 지지를 선언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입니다. '워룸'을 통해 그가 백신 반대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열어줌으로써 트럼프 그룹의 포용성을 증명했습니다. 2024년 트럼프의 압도적 승리는 이런 배넌의 아주 교활한 포용적 국가주의 덕분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국힘의 태세 전환에 대비해야 합니다. 국힘이 '탄핵 반대'로부터 한걸음 자유로운 오세훈 같은 후보를 선택하고, 2012년 박근혜 캠페인처럼 진보적 어젠다를 전취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배넌은 아니어도 배넌 짝퉁이 이번 대선에서 대활약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국힘이 오세훈을 후보로 선택하고 한동훈, 유승민이 선거를 도우며 여기에 이준석과의 단일화를 실현할 수 있다면 의외로 강력한 힘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 민주당에선 경선 스토리를 만들기가 어렵고, 현재로선 힘을 합칠 세력의 레버리지 효과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준석 이펙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통해 정리를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튼, 최선의 전략은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 내전을 종식하려면 압도적 승리가 필요합니다.

조기 대선은 '이재명 대 이재명'의 대결

이재명은 누구인가?

우리 앞에 가장 많이 던져질 질문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떤 후보든, 때때로 어떤 유권자든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 마치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이쪽의 컬러 세계와 저쪽의 흑백 세계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다 아는 것처럼 자수성가한 유능한 정치 지도자 이재명과 비열한 범죄자 이재명이 그것입니다. 이재명은 어느 날 윤석열의 내전을 막는 야전 사령관이었다가 어느 날 온갖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피의자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윤석열이 헌재에서 파면 선고를 받고 나면 곧이어 이재명 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가 나올 예정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는 간극이 너무 큽니다. 너무 커서 작은 스킬로 돌파할 수 있는 그런 간극이 아닙니다. 국민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큰 이재명으로 거듭나야 이 간극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정책 우클릭이나 보수 선언 같은 것은 지금 이 간극을 돌파하는 본질이 아닙니다. 최근 당내 비명계 인사들을 연쇄 접촉하는 것은 일단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이 만남이 반성과 성찰에 기반하지 않은 형식적 만남이라면 역풍이 불 수도 있습니다. 실질적이고 담대한 당내 통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큰 비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핵심은 민주헌정 질서를 지키려는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진보의 지도자나 보수의 지도자가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특정 계층을 위한 지도자가 되는 자리도 아닙니다. 진영의 지도자가 된다면 내전이 지속될 것입니다. 지금 국민들의 우려는 '거대 야당 + 이재명'에 쏠려 있습니다. 어떻게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는 연합권력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담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이번 대선에서 변수를 제어하고 압도적 승리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개념은 때에 따라 '관측소'가 되기도 하고 '피난처'가 되기도 하며 '창살 없는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진보나 보수는 피난처이거나 감옥이 될지언정 관측소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대선은 민주헌정 수호와 대한민국의 전진이라는 중차대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합과 전진을 통해 대전환기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민주당과 이재명은 상대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전에 이재명과 이재명의 대결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민주헌정 세력의 압도적 승리를 위한 권력 연합의 담대한 기획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번 대선이 지닌 특이점이자 숙명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민주당-한국노총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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