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요? 추적할 일이 하나 있어요."
"추적할 일…?"
"예. 나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 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언젠가는 과거를 되찾게 될 거라고 늘 생각했어요.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는 되들아보지도 않고 한걸음에 나갔다. 나는 공허함을 느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소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기 롤랑이다. 그는 카페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소나기가 그치고 카페를 나서 함께 흥신소에서 일한 위트를 만난다.
흥신소의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사장인 위트는 이제 흥신소 문을 닫고 은퇴할 생각이다. 인용문은 흥신소 폐업 후 롤랑이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해하며 위트가 묻고 롤랑이 대답하는 내용이다. 문답이 특이하다. 흥신소에서 일한 롤랑이 이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겠다고 하니 말이다.
독자는 곧 롤랑이 기억을 잃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대화 시점으로부터 10년 전, 롤랑은 갑자기 기억상실중에 걸려 안개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었다. 위트가 롤랑의 처지를 매우 딱하게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넓은 친분을 통해 심지어는 신분중명까지 만들어주었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기 롤랑'이오." 위트가 롤랑에게 신분증과 여권이 들어 있는 큰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작가는 도입부에서 소설의 얼개를 다 밝힌다.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다가 막 이 일을 그만둔 주인공 롤랑이 자신에 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인물임이 드러남으로써 독자와 주인공은 공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다. 기 롤랑이란 이름 또한 임의로 부여된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진짜 탐정 일을 시작한다. 마치 의뢰받은 일을 하듯 자신의 과거를 추적한다.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다. 그것을 단서로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퍼즐처럼 하나씩 짜 맞춘 기억에서 한편으로 뚜렷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불확실해지는 '잃어버린 시간'과 대면한다.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증언이 모여 1940년대 밀수와 가짜 증명서, 배반으로 가득 찬 어느 집단을 지시한다. 거기서 '페드로'라는 사람이 환기된다. 그는 기억상실자인 탐정과 동일인일까. 그는 패션모델을 하다가 전쟁 말기에 스위스로 잠적한 저 신비스러운 '드니즈'를 사랑했는가. 그것은 그의 과거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의 과거인가. 기나긴 기억회복의 여정이 끝에 닿도록 주인공은 미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기억 자체에 집착했다기보다 기억의 회복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탐정이란 독특한 인물이 주인공이고, 이 인물이 자신의 기억과 추격전을 벌이는 듯 박진감 넘치게 스토리를 전개한 것이 특징인 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에 파리 근교 도시인 불로뉴비양쿠르에서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사업가 아버지와 벨기에인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인 가운데 유년기를 보낸, 말하자면 과거를 상실한 세대의 일원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기억상실'로 명명될 프랑스 현대사의 비극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소멸과 그 안의 자아 찾기라는 인류 공통의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모디아노는 '잃어버린 시간'을 신비하고 몽환적인 언어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여정을 담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현대 프랑스 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 찬사를 받으며 모디아노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소멸한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 대전(大戰)의 악몽과 세대 공통의 경험을 주제로 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끝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거의 다 밝혀내고도 과거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체성은 안개 속을 떠돈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에게 나를 축적하여 현재를 이룬 과거란 무엇이고, 과거에 과거의 지위를 부여하는 기억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겉보기에 이 소설은 어느 기억상실자가 몽유병 환자처럼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탐색을 수행하는 미스터리가 중심이다. 읽다 보면 주인공의 기억의 모험이 미스터리를 넘어서고 인물 자신도 초월하여 어떤 세계상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짙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실체를 구성하듯 허구나 다름없어 보이는 과거의 현상에 접근하는 모습은 흥미롭다. 주인공은 어떤 향기를 언젠가 이미 맡아본 냄새라고 기억한다. 또한 가슴을 떨며 지나간 길을 기억한다. 그 거리에 가면 옛날에 들었던 발소리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저 창문은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라본 곳이다. 그렇게 과거의 조각들을 기억하며 주인공은 기억한 과거 속으로 이따금 침투해 잠깐 살기도 한다. 완벽하게 회복하지도 못하고 찾아낸 기억이 맞다고 확신하지도 못하는 이런 탐색의 의의는 무엇일까. 작가만이 행할 수 있는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문학적 성찰이 아닐까.
현재 대한민국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과거를 규명하느라 이 소설을 능가하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기억상실증에 빠진 모습을 목격한다. 어떤 이들은 우습게 특정 기억만 상실했다. 하나의 기억이 분열돼 여러 개로 진술되기도 한다. 소설의 기억찾기가 개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실존의 여정이라면, 역사의 기억찾기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 개인에겐 가치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국가엔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국가의 기억이 왜곡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달리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적 도정은 열린 결말을 예상해선 안 된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작품 활동 내내 어렴풋한 과거로 시선을 꽂은 채 그곳의 유령 같은 존재들의 정체를 추적했다.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간 애틋한 흔적을 시적인 아름다움을 동원해 되살렸고 기억, 정체성, 그리고 과거와 관계를 탐구한 우리 시대의 프루스트이다. <슬픈 빌라> <청춘시절> <팔월의 일요일들> 등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2014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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