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미국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초기 단계에서 유럽을 배제하려 하고 JD 밴스 미 부통령이 유럽의 극우 "방화벽"을 비판하며 관세나 방위비 등 금전적 문제를 넘어 유럽인들의 동맹 인식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유럽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스타머 총리는 16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텔레그래프> 기고를 통해 "유럽은 그 자신의 안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더 나아가야 한다"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방어 및 부담을 지는 데 얼마나 진지한지 보여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에 대해 너무 오래 얘기해 왔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이를 계속해 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했다.
이어 "영국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가속화하는 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준비가 됐다"며 "필요하다면 우리 군인들을 현지에 투입해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에 기여할 의지와 준비가 돼 있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스타머 총리는 병력 파견이 "영국 군인들을 잠재적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책임을 느낀다"면서도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돕는 모든 역할은 우리 대륙(유럽), 우리나라 안보 보장을 돕는 것"이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지금이 "우리 대륙의 집단 안보를 위한 한 세대에 한 번 있는 순간"이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미래에 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대한 실존적 문제"라고 덧붙였다.
스타머 총리는 다만 유럽이 더 강화된 조치를 취하더라도 "미국 지원은 여전히 중요하다"며 "오직 미국만이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재공격을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안보 보장은 평화 지속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 및 모든 주요 7개국(G7) 파트너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강력한 합의를 확보하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이 협상에서 반드시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고 분명히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가 진짜 국가가 아니라는 푸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크라이나가 동맹에 가입하는 불가역적인 길을 계속해서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스타머 총리의 유럽의 자체 방어 부담 강화 및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에서의 주도적 역할 필요성, 영국의 평화유지군 파병 언급은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전에서 함께 러시아에 대항했던 미국과의 관계를 유럽이 재인식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16일 <뉴욕타임스>(NYT)는 노르베르트 뢰트겐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기민당) 의원 또한 유럽인들이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고 전했다. 뢰트겐 의원은 "이는 새로운 현실이고 유럽의 안보가 미국의 진정한 국익이라는 전통적 정책과의 단절"이라며 "이 행정부는 이를 미국의 주요 국익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이는 근본적 변화"라고 짚었다. 기민당은 23일 독일 총선에서 집권할 것이 유력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양쪽의 삐걱거림은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과 상의 없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뒤 주말 뮌헨안보회의를 거치며 분명해졌다. 15일 키스 켈로그 트럼프 정부 러시아·우크라이나 특사는 사우디에서 열릴 미·러 간 우크라전 종전 협상에서 유럽의 참여를 배제했다. 미 CNN 방송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사우디 회담이 18일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유럽이 우크라전 관련 몇 달간 켈로그 특사와 소통하고 관계를 쌓으려 애써 왔지만, 막상 이번 사우디 회담에 켈로그 특사가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트럼프 정부의 변화하는 결정으로 인해 좌절을 맛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AP> 통신은 미 당국자를 인용해 사우디 회담에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마이크 월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윗코프 백악관 중동 특사가 참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16일 윗코프 특사는 월츠 보좌관과 함께 이날 사우디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미 폭스뉴스에 밝혔다.
이에 더해 JD 밴스 미국 부통령으로부터의 공격도 나왔다. 그는 지난 주말 뮌헨안보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유럽의 혐오 표현 및 행위 대응이 "내부로부터의 위협", "검열"이라며 비난하고 극우 정당과 협력하지 않는 "방화벽"을 거두라고 촉구해 유럽을 당혹스럽게 했다. 독일 총선을 일주일 앞둔 상황에서 극우 알리스 바이델 독일을위한대안(AfD) 지도자를 만나기까지 했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밴스 부통령이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유럽 상황을 일부 권위주의 정권에 만연한 상황과 비교하는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수일 간 트럼프 당국자들을 지켜본 뒤 "유럽 지도자들이 미국에 의지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포함한 많은 문제들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지만 "서방 동맹에 획기적 균열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신문은 지난주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을 만난 뒤 유럽 당국자들이 관세 등 경제적 문제를 넘어 미국이 유럽에서 수만 명의 미군을 철수할 것으로 예상되며 문제는 속도와 규모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헤그세스 장관은 지난 12일 우크라이나 동맹국 회의에서 미국이 더 이상 유럽 안보에 주력하고 있지 않으며 "유럽의 주요한 안보 보증국"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우크라이나 국경을 2014년 이전으로 돌리는 것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일단 17일 프랑스 파리에 모여 긴급 회의를 연다. <뉴욕타임스>는 프랑스 당국자를 인용해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유럽연합(EU) 및 나토 지도자들이 이 회의에 참석해 유럽이 배제된 채 진행될 미국과 러시아 간 회담에 대한 대응을 조율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복수의 당국자를 인용해 이 회의에서 휴전 보장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유럽군을 배치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5일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유럽을 당연히 지원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유럽 군대" 창설을 촉구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도 사우디 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전망이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16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회의도 계획도 없었다"며 사우디 회담 불참을 확인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참여 없인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안보 보장엔 반드시 미국이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쪽 참석자에 대해 16일 미 매체 <악시오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후 17일 러시아 대통령실인 크렘린궁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라브로프 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냈던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외교정책보좌관이 오는 18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미국 대표단과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루비오 장관은 16일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이 우크라이나 종전 회담에서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은" 현 단계를 넘어 "진짜 협상"이 시작되면 "우크라이나가 참여해야 할 것"이고 "유럽도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초기 단계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틀을 마련하고 이후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참여한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루비오 장관은 밴스 부통령의 뮌헨안보회의 연설이 동맹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성과를 거뒀냐는 질문을 받고 "그들이 밴스 부통령의 말을 듣고 화를 냈다면 그게 바로 그(밴스 부통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역사적 연설"이라며 "80년 동안 함께 해 온 동맹, 친구, 파트너는 공개 포럼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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