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윤석열차' 검열 논란에…인권위 "청소년 기본권 침해 말라"

문화예술인 단체 "인권위, 문제 원인 언급은 없어 문제…영진위, 갑자기 정치 중립 요구한 배경 밝혀야"

청소년 대상 영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특정 이념과 사상 배제를 요구하는 것은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나왔다.

인권위는 지난달 17일 한상준 영화진흥위장에게 특정 소재나 이념·사상의 배제를 요구하는 방식보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고 4일 밝혔다.

앞서 영진위는 지난해 2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교육 프로그램인 '2024년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사업'의 운영용역 입찰을 공고하면서 프로그램 운영 시 '정치적 중립 소재를 택하도록 하고 특정 이념·사상은 배제한 영화 및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하여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영진위는 지금껏 해당 사업을 이어오면서 정치적 중립 및 사상 배제를 요구한 적이 없다. 또한 공지에 앞서 진행된 영진위 임시회의 관련 자료에서는 '청소년 추천 영화 선정' 외에 해당 사업에 대해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문구가 없었다.

이를 두고 '블랙리스트 이후' 등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같은 해 4월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사업은 '윤석열차' 사건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며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특정 사상과 이념을 배제'하라고 요구하면서 청소년의 정치적 판단과 토론의 기회를 봉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앞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2022년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만화 작품 '윤석열차'를 제출한 고등학생에게 금상을 수여했다가 논란이 되자 지난해 공모전 결격 사유에 '정치적 의도'를 포함했다. 이를 두고 인권위는 "공공기관의 다양한 공모전에서 '정치적 의도' 등의 심사기준으로 국민의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냈었다.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공공기관이 사업을 시행하면서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침해하겠다고 한 것은 명백한 국가검열"이라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영진위가 윤석열 정권 아래 또다시 검열을 시도한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영진위의 검열이 문화예술인과 청소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검열의 배경에 영진위 밖에서의 개입이 있었는지 조사해 달라는 진정을 인권위에 제기했다.

▲영진위가 지난해 2월 '2024년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사업' 운영 용역 공고문에 명시한 정치적 중립 요구안ⓒ국가인권위원회

영진위는 "2023년 11월 국회에서 이 사업을 설명할 때 특정 이념·사상을 지향하는 영화의 학생 관람과 특강 진행에 대해 우려가 제기됐고, 특정 영화(<서울의 봄>)의 학교 단체관람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있었던 점 등도 고려해 이 사건 문구를 명시하게 됐다"는 입장이다.

또한 지난해 10월에는 영진위 홈페이지에 위원장 이름의 사과문을 내고 "지난 5월 말 해당 문구를 삭제하는 변경 계약을 용역사와 체결했다. 아울러 모든 관람 영화 선정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학교의 선택에 이뤄졌으며 해당 문구로 인해 배제된 영화는 한 편도 없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에 인권위는 "이 사건 용역의 입찰공고와 이 사건 문구에 따라 진정인들이 입은 구체적 피해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교육프로그램의 대상이 되는 청소년들의 기본권 침해 또한 현실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문화예술인 단체들의 진정을 각하했다.

다만 "청소년들을 일체의 정치적 소재나 이념·사상으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청소년들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을 배양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자기결정권, 양심 또는 사상 형성의 자유 및 참정권 등을 향유하는 데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아울러 해외에서는 학생들을 정치적 문제로부터 격리하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건전한 관심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문구와 같은 불명확한 개념을 용역 입찰공고의 조건으로 정하기보다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비방하거나 찬양하는 작품' 또는 '정파성에 입각하여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이익에 기여하고자 하는 작품' 등으로 배제조건을 구체화하면 해당 사업이 정파적, 당파적 선전의 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고 제언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1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국내 방송·OTT영상콘텐츠 업계 간담회에서 관계자들과 만나 현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정을 제기한 단체 측은 인권위의 의견 표명을 환영하면서도 외부 개입 여부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책임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영진위 상급기관인 문체부의 장·차관을 맡고 있는 만큼 이번 사안에 윗선이 개입했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윤희 블랙리스트 이후 총괄디렉터는 4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문제가 된 사업은 문체부가 기획재정부로부터 받은 복권기금으로 운영하는 특성상 문체부의 지시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유인촌 문체부장관과 용호성 차관은 각각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던 인물들인 만큼 갑자기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 배경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권위가 학생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인정했다는 점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이번 문제의 발생 원인과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은 점은 큰 문제"라며 "조만간 이번 결정에 대한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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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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