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는 지중해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고구마처럼 생긴 좁은 회랑이다. 길이 40킬로미터, 폭 4~10킬로미터, 면적 360km²로 서울시(600km²) 절반을 약간 웃도는 크기다. 가자 남쪽 끝 도시인 라파에서 차를 몰고 북쪽의 가자시티까지 지중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1시간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다.
"게토에 가둬놓고 죽이는 걸 히틀러에게 배웠겠죠"
놀라운 사실은 그 좁은 지역에 무려 200만 넘는 사람들이 몰려 산다는 것이다(2024년 통계로는 214만). 주민의 대부분은 1948년 미국과 영국의 도움 아래 중동 한복판에 알박기처럼 이스라엘이 들어서면서 쫓겨났던 난민의 후손들이다. 가자 지구의 절반쯤이 사막형 기후로 불모의 땅이기에, 그곳 인구밀도는 1km² 당 6500명을 넘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인구과밀지역인 홍콩(1km² 당 6300명)보다 높다.
"우리는 하늘만 뚫린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살지요." 가자 지구에 갈 때마다 그곳 사람들로부터 듣곤 했던 말이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세상 밖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없다. 8m 높이의 장벽을 넘으려면 이스라엘 경계병의 총격으로 죽을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 지구(West Bank)로도 가기 어렵다. 이웃 나라인 이집트나 요르단으로의 여행은 어떤 개인적 연줄이나 서류가 없다면 꿈같은 얘기다.
서쪽 바닷길인 지중해도 막혀 있다. 가자의 어부가 배를 몰고 나아갈 수 있는 한계선은 3해리(5.4km)다. 이렇듯 가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봉쇄로 말미암아 비좁은 땅을 벗어날 수 없다. 이스라엘과의 긴장이 커질 때는 의약품이나 생필품을 실은 트럭 행렬이 끊기곤 한다. 지난 15개월 동안이 그랬다. 따라서 가자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유대인들은 우릴 가자 게토(ghetto) 안에 몰아넣고 굶겨 죽이려 드는 못된 짓을 히틀러에게 배웠는가?"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을 비좁은 주거제한 지역인 게토 안으로 모아 놓았다가, 끝내는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열차 화물칸으로 실려 간 사람들은 곧바로 치클론 B 독가스로 집단 학살되거나 노예노동자가 됐다. 가자 난민들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닮은꼴의 악행을 저질러 왔다. 아랍 원주민들을 '가자 게토'로 내몰더니, 걸핏하면 벌이는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희생을 키웠다.
급기야 지난 15개월 동안 4만7000명이 숨졌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비무장 민간인이 압도적 다수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공짜로 건네준 전폭기로 민간 주거지역을 무차별 공습하는 식으로 희생자를 키웠다. 그렇기에 가자 사람들은 절규한다. "히틀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은 역사의 교훈, 즉 '강자가 힘만 믿고 마구잡이로 약자를 괴롭히면, 역사에 전쟁범죄자로 기록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잊었느냐?"
재산 약탈→추방(게토 수용)→학살의 세 과정
나치 홀로코스트의 선구적인 연구자로는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가 으뜸으로 꼽힌다. 힐베르크의 가족은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서 살았고, 1930년대 후반 나치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던 그는 홀로코스트 연구를 숙명처럼 여겼고, 1961년 800쪽이 넘는 대작인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를 펴냈다. 미군이 나치 독일로부터 압수한 1차 자료들을 바탕으로 학살 과정들을 꼼꼼히 살펴본 역작이다(문서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힐베르크는 폴란드에 남아 있던 친인척들이 모두 나치 학살의 희생자가 됐음을 알게 됐다).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긴 역사를 지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관용을 선포한 뒤로 기독교로의 개종 강요→거부할 경우 추방→학살이라는 세 과정을 밟아왔다. 힐베르크는 나치 독일도 이 과정들을 되풀이했다고 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로의 개종 강요를 건너뛰었고, 재산 약탈→추방(게토나 수용소로의 집중, 강제이송)→학살로 이어졌다는 점 정도다. 그 세 과정 하나하나마다 야만적인 행위들이 뒤따랐고, 희생자들의 피눈물이 흘렀음은 말할 나위 없다.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나치 역시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추방과 배제의 정책을 채택했다. 추방은 1941년까지 나치가 펼친 반유대인 정책의 절대적 목표였다. 1941년은 반유대인 정책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룬 해다. 그때 나치는 총력전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수백만 유대인은 게토에 갇혀 있었다. 국외이주는 불가능했다. 유대인들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수송한다는 계획은 포기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 문제'는 추방 이외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했다. 유럽의 유대인은 이제 학살돼야 했다. 세 번째 반유대인 정책이 바로 학살이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2-43쪽)
1941년 말까지만 해도 유대인을 치클론 B 독가스로 대량 학살한다는 '최종 해결'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한다는 방안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는 자신의 직할령 안으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이 실려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는 하루빨리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 유대인들을 모두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보낼 수 있게 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연재 89 참조).
하지만 1942년 들어 전쟁의 흐름은 나치 독일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게토에 집중시킨 유대인들을 최종 처리한 것이 수용소로의 이송과 학살이고, 이른바 홀로코스트다. 잘 알려졌듯이, 대량학살을 뜻하는 위장 용어인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은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직속 부하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제국보안본부(RSHA) 본부장과 나치 차관급 간부들이 모였던 '반제 회의'(1942년 1월20일)에서 결정됐다. 그 회의는 절멸(Vernichtung)해야 할 유럽 유대인 숫자를 1100만 명으로 꼽았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이 사실이라면, 절반 넘게 죽인 셈이다(연재 91 참조).
동유럽에 들어선 1000개의 게토
1939년 폴란드 침공 뒤 나치 독일의 실세였던 하인리히 힘러(경찰과 친위대SS 우두머리)와 그의 최측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RSHA 본부장), 한스 프랑크(폴란드 총독)는 히틀러의 재가를 받아 유대인 추방에 나섰다. 이들 3인이 "유대인 대학살로 가는 지옥문을 열어 젖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치는 유대인 집단학살에 앞서 특정 장소로 유대인들을 몰아넣어 죄수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게토'(ghetto)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 뒤 퍼진 평등사상으로 허물어졌던 게토의 담장이 다시 세워졌다.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게토는 1939~40년 겨울에 병합 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최초의 주요 게토는 1940년 4월에 설립된 우치(폴란드 중부도시) 게토였다. 폴란드 총독령에서는 게토가 1940년 봄부터 느리게 형성되어갔다. 바르샤바 게토는 1940년 10월에, 바르샤바 지구의 소형 게토들은 1941년 초에 구성되었다. 크라쿠프(아우슈비츠 인근 도시)의 게토는 1941년 3월에, 루블린의 게토는 1941년 4월에 설치되었다. 갈리치아의 주도인 리비프에는 1941년 12월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게토가 설치되었다. 총독령 유대인들의 게토화는 1941년 말에 사실상 완료되었다. 1942년에는 그저 몇 개가 추가되었을 뿐이다.](라울 힐베르크 311-312쪽)
독일의 폴란드 점령 직후인 1939년 말부터 폴란드 전역에 게토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장 큰 것이 바르사뱌 게토였고, 우치, 크라쿠프, 루블린, 라돔, 키엘체, 첸스토하우, 르부프(리보프)를 비롯해 큰 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 곳곳에도 장벽, 목책, 철조망을 두른 게토가 들어섰다.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는 고스란히 게토로 바뀌었다. 게토는 히틀러가 그동안 줄기차게 외쳐온 '유대인 절멸'로 가는 중간 단계였다. 힐베르크의 글을 더 보자.
[1939-1941년은 유대인 강제 이주 계획으로부터 '최종 해결' 정책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그 이행의 절정에서 '임시 해결'을 찾으려는 시도가 행해졌고, 그 결과가 서에서부터 동으로의 이주였다. 총독령 폴란드의 긴장이 가장 컸다. 거주 유대인 수가 150만 명인데다가 더 이상 동쪽으로 이주시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라울 힐베르크, 304쪽)
1941년 6월 독일군이 독·소 불가침조약(1939년 8월23일)을 깨고 소련을 공격하면서 동부전선이 열리자 게토는 더욱 늘어났다. 리비우(독일 명칭은 렘베르크)를 비롯한 동폴란드의 여러 도시들, 민스크(벨라루스 수도), 리가(라트비아 수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도시들에도 게토가 들어섰다. 1941년 말 무렵 소련 점령지역을 포함해 게토 숫자는 1000개를 넘어섰다.
게토를 세우려고 나치는 학교 부지와 건물들을 징발했다. 특정 지역이 게토로 설정되면 그 지역 사람들은 집을 비우고 떠나야 했고, 그 자리를 유대인들이 채웠다. 빈민가나 다름 없는 게토 안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작은 방 하나에 5~6명이 함께 지냈다(바르샤바 게토는 방 1개 당 4.8명, 우치 게토는 5.8명. 라울 힐베르크 319쪽). 영양실조, 불결한 위생에 따른 전염병도 큰 문제였다. 프라하 출신의 유대계 언론인 오스카 징어는 게토로 끌려간 뒤 큰 충격을 받고 이런 물음을 던졌다.
[게토에 갇힌 상황에서 유럽 사람들이 문화적 품위를 잃어버리는 데 과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스프와 나무침대마저 빼앗는 가혹한 처벌을 당해도 사람들은 이 문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침구와 속옷을 빨고, 바꿔 입고, 바람에 쏘여줄 수 없다면, 사람들이 이에게 물리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문화가 뭔가?](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65-66쪽)
나치, 유대인 평의회를 착취 도구로 쓰다
나치 독일이 게토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유대인 평의회'다. 폴란드 침공 20일 뒤인 1939년 9월21일 하이드리히 제국보안본부장은 폴란드 주둔 친위대 지휘관들에게 이런 지령을 내렸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의 글을 보자.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첫 번째 선행 조처는 지방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큰 도시들에 집단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속하게 실행돼야 한다. 집단수용 장소(게토)로 쓰일 도시들은 기차 연결 지점이든가 아니면 최소한 철도가 놓여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모든 유대인공동체 안에는 '유대인 장로회의'가 구성돼야 하고, 가능하다면 점잖은 중도적 인물과 랍비로 구성될 수 있다. 장로회의는 (독일이) 발표하는 모든 지침들을 정한 시한 안에 정확히 실행하는 데 말 그대로 총책임을 져야 한다.](볼프강 벤츠, 55-56쪽)
위 옮긴 글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집단수용 장소를 철도와 관련시킨 것이다. 게토의 유대인을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옮기려는 중간 집결지(임시수용소)로 게토를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이드리히는 각 지역에 새로 구성되는 평의회가 나서서 유대인 인구조사를 성별로, 직업별로 세밀하게 조사해서 그 결과를 나치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하이드리히가 말한 '장로회의'가 곧 '유대인 평의회'(Judenrat)다. 1939년 11월28일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는 '총독부 행정명령'으로 인구 1만 명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는 24인 위원, 1만 명 이하는 12인 위원으로 이뤄진 유대인 평의회를 만들도록 했다. 그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미 여러 도시에선 유대인 공동체가 만든 평의회들이 있었다. 유대교회당, 학교, 고아원 운영 등 지역사회의 관심사를 다루는 조직이었다. 이와는 달리, 나치 독일의 공식적인 행정명령으로 구성되는 유대인 평의회는 점령자의 통제와 지시를 따라야 했다. 악역을 마다할 수 없었다.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평의회는 덫에 걸렸다. 과거에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던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 역할들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했다. 독일 관청의 지시와 명령을 유대인들에게 전달하기, 유대인 공동체의 자체 경찰을 만들어 독일의 점령정책 집행하기, 유대인의 재산과 노동과 생명을 독일인 적에게 넘겨주기 등이었다](라울 힐베르크, 308쪽).
새로 조직된 평의회는 기존의 평의회 위원들에다가 관련 조직의 간부로 일했던 전력이 있고 유대인 공동체에 그런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점령자는 구성원을 채우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유대인 가운데 스스로를 '명망가'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평의회원이 될 경우에 챙길 이익을 바라면서) 기꺼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희생자를 내 손에 맡겨 달라"
유대인 평의회원들도 게토에 갇혀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게토의 부족한 식량 문제와 열악한 주거·위생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애썼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나치 독일의 요구를 순순히 따랐다. 많은 경우 나치의 권위에 올라 타 유대인들의 복종을 요구하면서 마치 점령자의 대리인처럼 굴었다.
1940년 4월에 만들어진 우치 게토의 평의회를 이끌었던 유대인 장로 룸코프스키가 그랬다. 그는 게토 사람들에게 독일군 군수품을 만드는 노예노동을 재촉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총독'이라 부르길 은근히 바랐다. '독일군의 협력자' 또는 '유대인의 배신자'라는 원성이 커지자, 룸코프스키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2만 명의 유대인 주민을 게토 밖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유대인평의회)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어렵고 피비린내 나는 행동을 수행해야만 하고, 몸통을 구출하기 위해 사지를 절단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내가 정말 수행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명령입니다. 나는 부러지고 떨리는 손을 여러분에게 뻗어 간청합니다. 여러분의 희생자를 내 손에 맡겨주세요. 그렇게 해야 더 많은 희생자를 막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 10만 명의 유대인을 구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볼프강 벤츠, 68쪽)
우치는 바르샤바, 크라쿠프(아우슈비츠에 가까운 남부 도시)와 브로츠와프에 이어 폴란드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1941년 12월 우치 게토 안에는 16만3000명 쯤의 유대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나치는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조금씩 나눠 열차에 실어갔다. 수용소 행은 죽음을 뜻한다는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다. 필사적으로 이송을 피하려는 사람들을 강제로 역으로 끌어간 것이 (유대인 평의회에 속한) 유대인 경찰이었다.
미국의 홀로코스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사학)는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피의 땅>(Bloodland, 2010), <블랙 어스>(Black Earth, 2015) 등의 역작을 낸 역사학자다. 미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를 경고한 <폭정>(On Tyranny, 2017),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 Road to Unfreedom, 2018)을 펴내기도 했다(국내에 이 4권 다 번역 출간됐다). 스나이더는 유대인 경찰도 나치의 유대인 억압 정책의 물리적 도구로 부역했다는 사실을 짚었다. 그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곤봉으로 무장한 유대인 경찰대는 형식적으로는 유대인 평의회의 하부조직이었지만, 중대한 사안에서는 (친위대를 비롯한) 독일인의 명령을 받았다. 바르사뱌 게토의 2000명에 이르는 유대인 경찰 우두머리는 유제프 셰린스키였는데, 전쟁 전에는 폴란드 경찰로 일한 자였다. 유대인 경찰은 1940년부터 모든 유대인의 의무였던 강제노동을 감독했다. 1941년부터 이들 경찰은 유대인을 붙잡아 게토에서 노동수용소로, 1942년에는 (아우슈비츠 같은) 학살 시설로 이송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2018, 165-166쪽)
한나 아렌트, "나치 학살의 협력자는 유대인"
유대인 평의회원들과 경찰은 같은 게토에 머물면서도 식량 배급 등에서 특혜를 누렸다. 이들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오랫동안 유대인들 사이에서 민감한 주제로 남았다. 논쟁의 불을 지핀 것은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였다. 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다룬 화제의 책((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에서 유대인 공동체 안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바르샤바처럼 암스테르담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처럼 베를린에서도, 유대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자신들(나치)의 추방과 학살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희생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유대인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을 기차에 태우도록 경찰력을 제공하며, 마침내 마지막 행동으로 유대인 공동체 자산의 최종 약탈을 위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유대인 요원들은 (나치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188쪽)
[우리는 유대인 관리(평의회 간부)들이 살인의 도구가 되었을 때, 자신의 배가 침몰할 때 갖고 있던 화물들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운항한 선장들처럼 1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000명을 구한, 1000명을 희생시키고 1만 명을 구한 구원자들처럼,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알고 있다. 진실은 더욱 끔찍했다. 예를 들면 헝가리에서 (유대인 장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을 뿐이다.](한나 아렌트, 188쪽).
유대인 평의회 간부들은 강제수용소로 가는 열차에 태울 이송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린 뒤 운이 좋아 강제노동에 편입돼 당장의 죽음은 면하더라도,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긴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유대인 평의회에 그런 '비밀'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아렌트의 표현에 따르면, 나치가 보기에 그들은 '자발적 비밀의 담지자들'이었다.
유대인 평의회 간부들은 그런 불편한 진실을 간직한 채 이송자 목록을 작성해갔다. 그들 나름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열차를 타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에 일어날 혼란을 막으려면, 알려주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베를린의 최고 랍비였던 레오 배크 박사는 독가스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은 더욱 고통스런 일이라는 '인간적인 배려'로 입을 닫았다고 한다. 평의회 간부들은 그렇게 나치의 명령을 항의는커녕 순한 양처럼 따르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열차를 타고 떠나는 것만큼은 막으려 애썼다.
아렌트에게 쏟아진 유대인들의 비판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평의회와 그 구성원이었던 유대인 장로들을 비판하자, 엄청난 논란이 따랐다. 아렌트를 겨냥한 비난의 화살을 앞장 서 쏘아올린 사람은 (독일 출신으로 이스라엘로 옮겨온) 저명한 시온주의자 거숍 숄렘(히브리대, 유대교리)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번역자이기도 한 김선욱(숭실대, 철학)의 글을 보자.
[아렌트를 비판하는 숄렘의 글은 동족으로서의 배신감을 강하게 나타냈다. 비난의 핵심은 '아렌트는 민족애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숄렘은 유대인의 전통 가운데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Ahabath Israel)'이라는 개념이 있다면서, 아렌트는 이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숄렘은 전체 유대인 3분의 1이 파멸을 당한 사건을 다룰 때는 '가장 오랜 방식으로, 즉 전통에 입각하여 민족에 대한 사랑에 충실하여,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면서, 아렌트의 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김선욱, '한나 아렌트에 있어서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인 정치', 사회와 철학 제16호, 2008)
유대인 사회의 주류를 이뤘던 시오니스트 지식인들은 위와 같은 숄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트의 책이 논란을 일으킨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붙잡혀 온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재판과 관련해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잔인하고 극악한 나치'가 아니라 '윗사람의 명령을 성실히 따랐던 평범한 나치'로 봤다. 그의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분석은 많은 유대인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들이 아이히만 재판에서 바란 것은 나치의 악마화였고, 유대인은 악마의 희생자여야 했다(아이히만 재판과 악의 평범성 논란에 대해선 따로 곧 살펴볼 예정임).
이스라엘에서 '왕따'당한 아렌트
후폭풍이 불었다. 오랫동안 친교를 맺어온 사람들이 아렌트와의 절교를 선언했다. 속된 말로 '왕따'를 당했다. 대중 강연이나 학술대회장 같은 곳에 아렌트가 마이크를 잡으면 야유가 튀어나오곤 했다. 오랫동안 선민(選民)임을 자랑스레 내세워 온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아렌트가 흠집 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대중은 그를 '배신자', 심지어 '부역자'로 비난했다(친일파들이 가리고 싶은 더러운 과거사를 찾아낸 연구자에게 '민족 정통성을 훼손하니 그만 두라'고 시비를 거는 '신친일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렌트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론을 폈다. 숄렘이 말하는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았다. '민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유대인의 유일신에 대한 사랑'이 전통이라 했다. 아울러 아렌트는 게토의 유대인 장로들이 희생자를 앞장서 구하는 영웅적 행위를 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서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유대인 현대사의 가리고 싶은 어두운 대목을 콕 찌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출간 뒤로 아렌트를 향한 유대인들(특히 시오니스트들)의 눈길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아렌트의 주요 저작의 히브리어 번역은 지지부진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히브리어 번역판이 나온 것은 책이 나온 지 37년 뒤인 2000년이었다. 한국은 어떤가. '한나 아렌트 현상'이라 일컬을 정도로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아렌트의 출세작인 <전체주의의 기원>를 비롯해 주요 저작들이 모두 번역돼 나와 있다. 아렌트 평전이나 그의 이름을 책 제목에다 넣은 해설서들도 10여권에 이른다. 대학원 석·박사 논문에도 아렌트를 다룬 것들이 적지 않다.
"히틀러처럼 유대인도 아랍 난민 만들었다"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강성 시오니즘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학계라고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유대인 대중이 아렌트에 관심을 갖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다. 언젠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정치학 전공자를 만났을 때의 인상적인 기억 하나. 중동 분쟁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도중에 아렌트 이름을 꺼내자, 조금 전까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중동평화 해법을 말하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가야할 곳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유대인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아 유대인 주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패리아(pariah)가 됐지만, 아렌트는 1975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질 때까지 의연했다. 유대인-아랍인이 참여하는 평의회를 바탕으로 한 연방국가론을 꺼내 '현실을 모르는 책상물림 이상주의자'란 지적을 받긴 했지만, 이웃 민족(팔레스타인 원주민인 아랍인)과 더불어 사는 평화공존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직된 시오니스트들과는 달랐다.
특히 아렌트는 1948년 70~80만 명의 팔레스타인 대량 난민을 만들어 내면서 유대민족국가를 세운 강성 시오니스트들에 비판적이었다. 그들의 행태는 지난날 나치 히틀러가 유대인 대량 난민을 만들어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이 대목에서 한낱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 아렌트'를 떠올려 본다. 글이 길어져 여기서 그친다. 다음 주엔 게토의 비참한 실태, 나치 독일의 야만적 게토 정책, 그에 맞선 유대인 봉기를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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