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북미정상회담을 타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 바 있다. 하지만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조선의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에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2019년이 지나면서 대미 관계 정상화의 미련을 접은 상태이다. 그리고 이 이후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왔다.
조선이 '가난하고 고립된 핵개발국'에서 '가난과 고립을 탈피하는 핵보유국'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안보는 핵무력으로, 경제는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외교는 중국 및 러시아 중심으로 삼겠다'는 "새로운 길"이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고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대미 관계 정상화 포기와 대미 장기전 돌입'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의 대전환은 2019년 말부터, 즉 트럼프 1기 중반부터 일어났다. 이러한 조선 전환은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가시적인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 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트럼프의 재등장은 조선의 전략적 셈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일단 미국 대선 이후 김정은은 대미 강경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11월 21일 "우리는 이미 미국과 함께 협상주로의 갈 수 있는 곳까지 다 가보았으며 결과에 확신한 것은 초대국의 공존의지가 아니라 철저한 힘의 립장과 언제 가도 변할 수 없는 침략적이며 적대적인 대조선정책이였다"고 말했다. 1기 트럼프와의 협상 결과에 대한 불만을 소환한 것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발언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도 있다. 조선은 2020년 미국 대선 때에는 대선 기간은 물론이고 바이든 당선 후 약 4개월 동안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었다. 이에 반해 이번 미국 대선에는 간헐적으로나 관심이나 입장을 표명했다.
김정은의 대미 강경 발언도 주로 바이든 행정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핵을 공유하는 군사동맹체 확대, 방대한 전략타격수단 전개, 군사적 압박과 도발 수위 고조" 등은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한미동맹이나 한미일 군사협력 차원에서 이뤄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미국의 패권 욕망이 폭발의 임계점을 벗어나 참혹한 전쟁과 파국적 재단이 벌어지고 있다"며 현 세계 정세를 "난장판"이라고 진단했는데, 이 역시 바이든 행정부를 비난한 성격이 짙다. 김정은의 발언 속에는 트럼프가 바이든과 어떤 차별성을 보여줄지 지켜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럼 향후 조선의 대외 목표는 무엇일까? 조선이 최근 부쩍 강조해온 "전략 국가"와 "전략적 균형", 그리고 "국제질서의 다극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목표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핵무력법 제정과 헌법 개정을 통해 핵보유국 지위를 공고히 하는 국내적 절차를 마무리한 조선은 외부로 향해 이러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이미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상황이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조선은 중국의 시진핑 정권에게도 핵보유국 인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최근 북중 관계에 냉기가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이유다.
그런데 트럼프의 귀환은 조선이 트럼프 행정부로부터도 '묵인'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조선은 푸틴의 공개적인 인정과 시진핑의 암묵적인 인정, 그리고 트럼프의 용인을 통해 핵보유국 지위를 공고화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마도 김정은의 머릿속에는 핵보유국의 지위를 공고히 하면서도 '북러 동맹 유지-북중관계 강화-북미관계 개선'이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략적 지위를 다질 수 있는 구상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비핵화를 내려놓고나 먼 훗날의 일로 미뤄놓고 접근해온다면, 김정은도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까닭이다.
물론 반론의 근거도 있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북미대화가 재개되어도 조선이 비핵화에 동의하지 않으면 대북 제재 해결이 난망하다는 것이다. 이미 조선은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완전 폐기와 부분적인 제재 해제를 맞교환하는 제안을 내놓았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또 많은 전문가들은 조선이 제재 해결을 여전히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조선이 뭘 기대하고 북미대화에 임하겠냐, 조선은 비핵화가 불가하다하고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온다. 하지만 조선의 최우선 기대치를 제재 해결로 보는 것은 '과거의 북한'을 상대로 한 분석이다.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제재를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기로 하고선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북미대화 재개 시 유력한 의제인 군비통제가 조선의 핵무력을 포함한 국방력 강화 노선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핵무력 강화 노선은 한미일의 군비증강 및 동맹 강화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이 짙은 것이다. 조선이 최근 "전략적 균형", "군사력 균형"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이에 따라 관건은 트럼프 행정부 2기 때 한미동맹 및 한미일 군사협력의 향방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미동맹을 "핵 기반 동맹"으로 강화했다는 윤석열-바이든의 '워싱턴 선언'의 계승 여부, 바이든 시기에 부쩍 강해진 한미(일) 연합훈련의 실시와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여부 등이다. 이들 문제와 관련해 트럼프가 자제를 선택한다면, 조선도 핵무력 강화 노선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제재 문제보다 군사 문제가 더 큰 쟁점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셋째는 조선이 전략 동맹으로 강화되고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북미대화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다. 북-미-러 삼각관계의 핵심적인 변수는 러-우 전쟁의 향방과 이와 연계된 조선의 대러 군사지원이다. 전쟁이 계속되면 삼각관계에도 일대 파란이 일어나겠지만, 휴전이나 종전이 이뤄지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서 주장한 것처럼, 조선의 향후 전략적 목표는 핵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면서 '북중관계 강화-북러 동맹 유지-북미관계 개선'에 방점이 찍힐 공산이 크다. 트럼프가 북러 동맹 파기를 요구하지 않는 한, 김정은으로서도 북미대화를 마다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한 이유이다.
김정은이 과거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트라우마'만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2021년 1월에 열린 8차 노동당 대회에서 "총결기간(2016~2020년) 이룩된 성과"와 관련해 트럼프를 비롯한 각국 정상과의 만남을 열거했다. 그런데 딱 하나만 뺐다. 바로 남북정상회담이었다. 한마디로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성과"로 일컬은 것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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