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같은 가정부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것도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취향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박리나 옮김, 민음사)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이 구절은 사회에 만연한 성적이고 계급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먹잇감을 사냥해 군중에게 던져놓는 황색언론의 선정적 보도행태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공공연하게 발화할 뿐 아니라 고착화하고 확장한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하는 카타리나가 자신의 성적 선택의 이유를 윤리가 아니라 취향으로 제시하자 코웃음을 치는 장면이다. 윤리라는 사회적 규범을 들었다면 그나마 ‘참작’의 사유가 되었을 텐데, 가정부가 영화배우를 거부한 이유로 취향을 거론하자 이 소설의 주요한 캐릭터이자 황색언론 종사자인 베르너 퇴트게스는 거의 분개한다.
여기에는 카타리나가 가정부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기가 높은 영화배우에게 당연히 매력을 느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가십 미디어가 카타리나에게 드러낸 악의는 그가 감히 주제넘게 취향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개인에 대한 국가 또는 사회의 통제와 지배의 기제로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과 생명권력(bio-pouvoir)을 논한다. 인구 전체의 생명, 건강, 위생, 생식 등을 관리하는 권력이 생명권력이고, 군대, 학교, 병원 같은 제도를 통해 개인의 신체와 행동을 세세하게 규제하는 힘을 규율권력이라고 한다.
이 구분에서 윤리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애매하나 두 권력의 범주에 함께 걸쳐 있다고 판단하는 게 무난하지 싶다. 그렇다면, 취향은 윤리와 달리 대체로 생명권력의 범주에서 작동한다. 자기 감시를 통해 사람들이 사회 규범과 규율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며 종국에 개인의 욕망과 행위까지 (당하는지 모른 채) 규율 당한다는 게 푸코의 통찰이다. 윤리가 공공연하다면 취향은 은밀하다. 성 취향은 더 사적이기에 더 은밀하다.
현대 사회 혹은 자본주의 사회는 은밀하고 사적인 취향이 말 그대로 개인의 취향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개인의 선택이나 개성을 반영한 본래의 취향이라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을 품는다. 특정 계층이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여 취향이 획일화하거나 계급화하는 상황이 자본의 이익과 지배의 효율에 유리하다.
주지하듯 광고, 미디어, 문화산업은 취향의 획일화에 앞장선다. 특정 브랜드의 옷이나 생활방식이 성공과 매력을 상징하게 되면 소비자는 자신의 본래 선호와 무관하게 성공과 매력의 대세를 추종한다. 본래 선호가 무엇이었는지도 잊힌다.
획일화는 계급화와 결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획일화하고 규격화한 취향엔 계급성이 작용한다. 취향 구분은 구매력과 연결돼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은 단지 구매력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미적 선호가 나뉘며 이러한 구별을 통해 계급을 표현하거나 강화한다고 보았다.
취향은 계급화와 획일화가 동시에 작용한 산물이다. 계급화에 따른 구별짓기와 획일화에 따른 시장의 헤게모니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반면 윤리는 탈계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에 내재하는 보편성은 획일화와 다르다. 자본은 취향의 획일화에 이해관계가 있지만 윤리에는, 보편성이든 특수성이든 애초에 관심이 없다. 시장은 이해관계가 없으면 관심을 거둔다. 시장 자체의 본래 속성은 윤리적 무심함이다.
윤리가 취향보다 상위의 개념이란 판단은 그러므로 타당하다. 사회적 연대와 타인에 대한 책임 등을 포괄하는 윤리는 개별적 취향이나 개인의 선호를 넘어서는 더 큰 가치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윤리는 종종 쉽게 무력해지고 빈번하게 무시된다. 그러나 취향은 언제나 공고하다. 취향의 성립 단계에 획일화가 계급화가 개입하였다 하여도 드러난 취향의 행사는 개체 단위 주체성을 구현한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윤리적 원칙은 사회적 이해관계나 현실 권력의 개입에 따라 자주 무력화한다. 그럼에도 윤리의 깃발은 지배와 권력의 견지에서 절대 포기되지 않는다. 지배계급이 부도덕하고 권력행사가 비윤리적일수록 윤리는 더 강조된다.
카타리나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 이유로 윤리를 들었다면, 허위의 깃발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기에 내심 비웃으면서도 그의 우둔함을 수긍하며 어쩌면 박수까지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취향을, 그것도 획일화와 계급화에 반하는 취향을 하층민이 꺼내 드는 순간 어떤 이들은 불쾌해진다. 취향이 정체성을 뜻하기에 취향을 거론한 것 자체로 빈정상하는 일인 데다 그것이 정말로 정체성을 드러낸 고유한 취향이기에 카타리나의 ‘거부’를 지배계급으로선 용납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의 애인 줄리아가 윈스턴에게 한 “당신은 허리 밑으로만 반역자”란 말은 줄리아가 잘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정말 위험한 윈스턴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한 취향을 지닌 개인의 존재는 획일적이고 계급적인 지배체제에서 체제의 가장 큰 위협이다.
참고로 푸코는 외부의 규율이나 권력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주도적 실천을 통해 개인의 가치와 신념을 정립하는 자율적 윤리를 ‘자기배려(la souci de soi)’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주인공 카타리나가 어쩌면 ‘자기배려’의 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사회는 무자비하게 ‘자기배려’의 인물을 파괴한다. 소설의 결말을 보면 카타리나가 나름의 복수를 행하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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