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교훈, 국가 성쇠는 리더들의 능력에 달렸다

[독점이냐 쏠림이냐, 포용과 분권이냐] 독일 통일과 동·서방국가들과의 통합 정책: 서독 정치 지도자들을 위주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전범국으로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1945년에 점령되었다. 이 연합국은 점차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이는 냉전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세계는 양분화되었고, 독일은 분단되어 19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건설되었다. 독일은 1990년 10월 3일에 평화 통일을 이루었다. 평화 통일의 시발점은 동독 평화 운동에 기인하지만, 서독 정치 지도자들의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 정책도 간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동독에서 1989년과 1990년에 독재 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날로 강화되는 민주화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 동독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이를 진압하는 데 소련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취임하면서 동유럽 국가에 대한 간섭권을 천명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였고, 따라서 동독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급상승하면서 상황이 심각하게 되자 서독의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 과업인 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서독 주민은 독일의 일원화를 찬성했다. 1990년 2월에 서독 국민의 89.9%, 동독 국민의 84.1%가 범 독일 헌법인 기본법에 찬성했다. 동독의 최고 인민회의 자유 선거(1990.8.23.)에서는 독일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인민회의의 의원 중 약 81%(363명의 의원 중 294명)가 독일 연방공화국 가입에 동의했다. 평화적 전환에는 서독 지도자들의 실리적 동서독 정책, 서방국가에의 통합 그리고 소련을 위시하여 동유럽과의 개방된 정책이 토대를 이루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독에서 이차대전 이후 독일 통일까지 여섯 명의 수상이 있었고, 이들 중 독일 통일과 동·서방국가들과의 통합 정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네 명의 주역으로 아데나워(기민당), 브란트(사민당), 슈미트(시민당) 그리고 콜(기민당) 수상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연맹국이나 강대국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국제 정치 무대에서 자율성을 키우면서 국가의 운명을 개척한 정치 지도자들이다. 그들의 국내외의 정치적 활동에서 자주성, 주체성, 공존과 평화의 가치관, 정책의 연속성 등이 구현된다.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 목표는 서독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로 발전시키며 서유럽에 통합하고, 국제외교 원칙을 준수하며, 자율성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는 새로 건설된 서독의 국경을 존중하며 국제법상의 의무를 다할 것을 천명했다. 나치에 박해받았던 개인, 단체, 국가에 배상을 시작했고, 프랑스와는 엘리제조약을 체결하여 양 국가 간에 쌓인 적대감을 청산하면서 협력을 시작했다. 이러한 원칙을 기반으로 그는 서방국가와의 평화 통합의 골격을 다져나갔고, 이는 통일 전까지 서독 내부 구조와 외교 정치 방향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외도 서독의 재건, 사회적 시장 경제 발전, 사회 정책 등은 그의 임기 중에 이루어졌다. 외교 정책의 원칙이었던 동유럽과 소련을 배제하는 할슈타인 독트린(반공주의, 1955-1969)을 넘어서 소련과의 대화도 추진했다. 동시에 유럽의 경제공동체를 창출하여 공동 번영 증대를 도모했다. 서독의 핵심 산업인 석탄·철강 부문의 일방적인 연합군의 통제와 생산 제한을 없애면서, 이를 파트너십 제도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 정책은 독일의 재건과 주권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독일, 프랑스, 영국, 베네룩스 3국)가 1952년에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안보 확보와 평화가 유지되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동시에 연합군에 의해 해체된 독일 군대를 서구 집단안보체제 아래 다시 건설하는 데도 주력했다. 프랑스는 이를 서독의 재무장으로 보고 반대했다. 서독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한국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권의 위협을 느끼면서 서독은 1955년 5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1949년 창설)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동유럽과 특히 소련의 위협에 맞서 생존을 확보하게 되었다. 서독 연방군(1955. 11.)이 창설되어, 나토에 통설권을 이양했다. 이 정책을 토대로 브란트는 소련과 동유럽도 외교 관계를 개방했다. 이는 동방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원칙으로 동독과의 화해를 촉진했고, 소련, 폴란드 및 기타 동유럽국가와의 관계도 개선하기에 이른다. 그는 1970년에 동독 총리 스토프를 만났고, 동년에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현재의 유럽 국경을 인정하는 모스크바 조약과 그해 말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에 서명했다. 나아가 통일의 토대인 동서독의 기본조약을 1972년에 체결했다. 기본조약에 따라 서독과 동독은 ‘상임 대표’라고 불리는 사실상의 대사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동서독의 상태는 합법화되었고, 평등한 관계는 공식화되었으며, 두 국가는 1973년에 유엔에 가입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독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더욱 높이는 데 한몫했다.

독일 기본조약의 골자를 지키면서 슈미트 수상은 내독 관계를 심화시켰다. 냉전 중에도 동서독 군사 대결을 피하며, 주민의 평화를 위해 동독 지도부와도 만났다. 동독 총리 호네커의 초청으로 1981년 12월에 제3차 내부 독일 회의에 참석했다.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다. 두 나라는 1978년에 유럽통화체제(EMS) 창설과 1979년에는 유럽통화단위(ECU)를 도입하는 데 협력했다. 이는 후에 유럽경제통화연합과 유로를 탄생시켰다. 나아가 동·서방국가와의 헬싱키 조약을 통해서 유럽의 안보와 긴장 완화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동·서방 국가와의 공고한 협력을 토대로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1992)을 콜 정부는 달성했다. 콜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유럽연합의 동구권 확장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미국과는 협력을 통해서 독일 통일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그리고 소련과는 소련이 부족한 재정적 문제 해결을 도우면서 그들의 승인을 받아냈다. 통일에 가장 반대가 심했던 프랑스와 영국도 독일 통일에 찬성하도록 외교를 펼쳤다. 통일 후에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이들의 국제적 인정을 추진하는 데 그리고 보스니아 전쟁을 해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독 정치 지도자들의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 정책은 시사한 바 크다. 국가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위한 정신은 아데나워에서 시작하여 동방정책을 거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정책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동방정책은 긴 호흡과 인내로 동독과 동구권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는 초당적이며, 그 기조는 통일 전까지 이어졌다. 이는 우리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내놓은 대북 정책과는 대조적이다. 통일을 달성하는 데는 서독 정치 지도자들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 뛰어난 지도력, 합리적 정책 등이 중요했고, 그들은 개인보다 국가의 이해에 주목하여 정치를 실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의 성쇠는 지도자들의 능력도 크게 한몫함을 알 수 있다.

▲통일 당시 베를린 장벽에 모여든 독일 시민들. ⓒAP=연합뉴스

(본 글은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비전: 평화·통일·통합”에 게재된 두 저자(정무형·김해순)의 논문(독일 통일과 유럽의 동·서방국가들과의 통합 정책: 서독 정치 지도자들을 위주로)을 토대로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 원탁토론아카데미에서 2024년 5월 30일에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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