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차관, <채식주의자> 폐기 논란에 답변 회피…"보수 단체 따르나"

야당 의원들 "장관 없는 국감, 초유의 상황…윤석열 정부, 직무 유기"

신영숙 여성가족부 장관 직무대행(차관)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일부 학교 도서관에서 '청소년 성교육 유해 도서'로 지정돼 폐기된 데 대해 "청소년 성교육 프로그램에 민감한 여러 부분을 생각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야당은 신 직무대행이 시종일관 답변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자, "여가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일부 기독교 단체, 보수 단체의 의견대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 직무대행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진행된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백승아 의원이 "<채식주의자>를 읽어봤느냐. 유해 도서가 될 만한가"라는 질의에 "(<채식주의자>는) 여러 가지 인간 문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대상이 청소년이다 보니까 성교육 프로그램에 민감한 여러 부분을 생각해서 (폐기와 같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백 의원이 "그러니까 (<채식주의자>가) 폐기되어 온 것도 이해한다는 말인가"라고 다시 묻자, 신 직무대행은 "아동 청소년 대상의 성교육 내용은 학생이나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의 의견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백 의원은 이어 "경기도교육청이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 그리고 일부 보수 성향 의원들의 성교육 도서 폐기 요구 내용을 세 차례나 공문으로 내려보냈다"라며 "그렇게 해서 폐기된, 열람이 제한된 도서에는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미국 주간지) <타임>에서 추천한, 또 스웨덴 최우수 청소년 도서상을 받은 성교육 도서도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책도 있다. 이런 도서 폐기 문제에 대해 여가부가 나서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신 직무대행은 "청소년 유해 도서는 교육청에서 자체 심의를 하게 돼 있다"라고 했다.

백 의원은 "그러면 교육청에만 책임을 미뤄 놓고 여가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라고 묻자, 신 직무대행은 "심의 결과를 판단하는 기관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통보되면 여가부는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에 백 의원은 "지금까지 어떤 조치를 했느냐"라고 추궁했고, 신 직무대행은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 통보되면 저희는 그것을 고시할 수 있다"며 기존 입장을 반복하자, 백 의원은 "그냥 결정된 대로 따로 고시만 한다는 것인가. 답답하다"고 탄식했다.

여가부가 청소년 도서 유해성 여부에 대한 별도의 판단이나 자체적인 기준 없이 특정 단체 의견에 끌려가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백 의원은 신 직무대행에게 "지금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음란하다' '선정적이다' 이런 이유로 성교육 도서 폐기를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심의 요청한 결과, 다 청소년 유해 간행물이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됐다. 일부 단체는 유네스코에서 제작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 라인' 활용도 반대한다"며 "이런 일부 단체의 성교육 도서 폐기 요구가 적절하다고 보느냐"고 질문했다.

신 직무대행은 "청소년 심의기준에 해당된다면 그런 부분들은 유해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자, 백 의원은 "심의기준에 따르는 게 아니라 일부 기독교 단체, 보수 단체의 의견대로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신 직무대행은 "그런 부분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백 의원은 이어 "'딥페이크' 이런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한 문제도 성교육·성인권교육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가부가 올해 성인권교육 예산 5억5600만 원 전액을 삭감했다"며 "국회에서 증액 의견을 내면 반영할 생각 있느냐"고 물었다.

신 직무대행은 "필요한 예산이라고 그러면 재정 당국하고 협의하겠다. 그리고 국정감사 끝나는대로 교육부와 협의하겠다"고 했다.

경기지역 초·중·고등학교에서는 2022년 3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1년간 한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성교육 도서 총 2528권이 폐기됐다. 이는 일부 보수단체가 '동성애 조장' 등을 이유로 폐기할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으로, '보건학문&인권연구소' 등 시민단체는 성교육 도서 141권의 폐기를 주장했다.

또 올해 용인의 한 공립중학교와 여주의 한 여자중학교에서는 <채식주의자> 열람을 제한했으며, 성남의 한 여자고등학교는 <채식주의자>를 폐기하면서 "음란한 자태를 지나치게 묘사한 것, 성행위·성관계를 조장하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장관 직무대행이 10월 30일 오전 서울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야당 의원들은 사상 유례 없는 '장관 없는 국감'을 비판하며 장관 임명을 촉구했다.

민주당 김한규 의원은 "장관 없이 국정감사를 하는 초유의 상황"이라며 "현재 여가부 장관은 8개월째 공석이다. 동네 통장도 이렇게 오래 비워 두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런 행정부의 공백 상황을 지적하지 못한 입법부 또한 국정을 감사할 헌법상의 의무를 해태하는 것"이라며 "위원회 결의로 장관 없이 국감을 하게 만든 대통령에게 유감을 전하고 신속하게 장관을 임명하도록 촉구하자"고 했다.

같은 당 김남희 의원도 "8개월째 장관 공석이라, 딥페이크라는 중요한 현안이 생겼는데 지난 4월 이후 장관 주재 여성폭력방지위원회를 단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서영교 의원은 여가부 장관 공석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은 일하는 건가, 뭐 하는 건가"라며 "윤 대통령은 여가부 장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당 이연희 의원은 국민의힘 소속인 이인선 여가위원장에게 "유감을 표명할 것"을 요청했고, 이 위원장은 "(장관이) 공석인 상황에서 국감을 진행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표시한다"고 말했다.

여가위 소속 의원들은 국감 시작 전에도 별도 기자회견을 열고 "여가부 장관 부재는 단순한 인사 지연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이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도움과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이며, 윤석열 정부가 이들을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에 놓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더욱이 가정폭력, 성범죄, 청소년 문제와 같은 시급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들은 현장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지휘하고 조율해야 할 장관과 주요 인사가 공석인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 삶과 직결된 이런 문제들이 방치되는 상황은 정부의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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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프레시안 이명선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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