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외쳤다…"문제는 상상력의 빈곤이다"

[인문견문록] <스승의 손사래>

중년을 넘어가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의 하나가 스승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지 않은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실망하는 일이 늘 반복됐다. 좋은 스승을 적시에 만나는 것은 인생의 과업이다. 스승 찾기를 멈춘 필자는 무턱대고 시중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이런 식의 읽기는 대부분 시간 낭비로 끝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 이정배의 책 <스승의 손사래>(늘봄 펴냄)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저자가 자신의 스승들을 소개하기로 작정한 데에는 "인간은 결코 홀로 되는 법이 없다"는 자명한 이치 말고도 스승 유영모의 기독론 때문이었다.

유영모 사상의 특이점은 예수를 가장 높이면서도 예수를 인간과 다른 별종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도 예수처럼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다석 사상에 있어서 십자가는 인습화된 교리와 달리 결코 믿을 대상이 아니었다.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 그것은 우리도 그처럼 되어(살아)야 할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앞선 이는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우리도 앞선 이를 따라가다 보면 예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저자는 자신의 앞과 옆에 있었던 이들을 소환한다.

저자를 충실히 소개하는 것이 서평자의 덕목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스승론에 대해서 잠시나마 소략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스승은 왜 중요할까? 우리는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고 곧잘 말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곧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장 그 자체다. 지적·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실체적 단독자로 오해한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한다. 이런 말은 적어도 현대 철학에서는 온전히 성립되기 어렵다.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였던 라캉은 인간의 주체는 자신의 실체성에 근거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근거해 존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성에는 이미 타자의 실체성이 또렷이 착근해 있다는 의미다. 독일 현대 철학의 대표자인 하버마스는 주체란 타자의 관점을 내면화하여 수용될 때에만 비로소 정립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진짜 생각하는 주격 나(I)는 대상화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주체의 근원적 측면인 반면 생각되어 질 수 있는 목적격 나(Me)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사회와 타자로부터 동떨어진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경우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한 사람의 정신적, 영적 정체성도 강력하게 영향받기 마련이다. 저자는 누구를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할까?

필자의 눈에 우선 띄었던 스승은 신학자 일아(一雅) 변선환이다. 변선환은 1992년 감리교로부터 종교다원주의를 이유로 출교를 당한 신학자였다. 변선환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학교에 입학한 저자에게는 근심이 하나 있었다.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 없다"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저자는 기독교신앙이 없던 부모님을 걱정했다. 이때 만난 변선환은 제자 이정배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불선 전통이 오히려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보수적 기독교인에게는 불경스러운 말일지 몰라도 당시 저자에게는 복음처럼 들렸다. 변선환은 불교에 대해서도 사뭇 개방적이었다. 저자는 변선환이 강연한 '십자가와 공(空)' 제목의 심포지엄의 한 대목을 이렇게 전한다. "학생뿐만 아니라 스님과 수녀님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감신 역사상 그런 진풍경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와 공이란 낯선 두 개념은 기독교와 불교의 핵심 사상을 담았다. 이 둘의 공통점은 결국 자신을 버리는 데 있었다. 하늘 뜻을 따름으로 자신을 버린 예수(십자가)와 없이(無) 존재하는 공(空)이 어떻게 호응할 수 있으며 다른지를 강의하셨다. 그때 그 강의가 주었던 충격은 참으로 대단했다." (상기 책 인용, 미기재시 동일) 저자는 출교당한 신학자를 이렇게 기린다. "당신께서 내 스승인 것은 내 인생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이신 박사가 필자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장인이기도 한 이신은 1970년대 미국 남부 명문 밴더빌트대학 출신 박사였지만 정작 한국에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한국 전쟁 와중에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자생적 그리스도환원운동을 만나 감리교를 떠났기에교계에서 연고가 없었다. 자신이 몸 담았던 그리스도교 교단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그릇이었다. 귀한 미국 박사였지만 시골교회 목사, 산동네 빈민 목회를 평생 지속했다. 사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후학들이 이신 신학을 정리해 <환상과 저항의 신학>(이은선외 지음, 동연출판사 펴냄)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저자는 이신 박사의 말을 전한다. 울림이 큰 말이다. "나는 민중들만큼, 그 이상으로도 가난하게 살아 봤지만, 가난보다 더 큰 문제는 상상력의 빈곤, 혹은 상상력의 부패이다." 니체는 세기말적 증상으로 말세인(末世人)을 말했다. 세상 어떤 것에도 진지하지 않고 눈앞의 안락에만 빠져 지내는 도파민중독자를 니체는 말세인이라 칭했다. 21세기의 한국인이 떠오른다. 안락에 도착적 애착을 가진 사람은 절대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은 불편함을 불편함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먹고, 즐기는 것이 인생 목표가 되는 세상에서 상상력은 더욱 빈곤해져만 간다. 이신 박사는 가난한 민중이 많던 시절에 그래서 불평등타파만으로 많은 것들이 저절로 호전될 것이라 단순하게 보던 세상 흐름과 달리 인간사의 저류를 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이기에 신학마저 서구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려 했다. 1970년 수운 사상을 신학화하는 최초의 논문을 쓴 이도 바로 이신이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도 저자의 스승 리스트에 올라있다. 도올이 구약무용론을 주장하자마자 기독교계가 앞장서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사실 구약무용론은 고 유동식 연세대 교수의 평소 지론이었다. 우리 민족은 구약성서 대신 유불선을 통해 신약의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유동식의 주장이었다. 도올이 과도하게 비판받는 것을 보다 못한 저자는 감신대에 김용옥 초청 토론회를 연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아니 이은선 교수까지 세 사람은 관계를 이어간다.

언어의 수준은 결국 한 사람의 지적 역량의 지표다. 필자는 도올을 넘어서는 한국어 구사자를 본 적이 없다. 한국만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 리쩌허우 등 아시아권의 대사상가들도 도올 수준의 구사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만 도올 글의 대부분이 고급에세이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대중서말고 진짜 학술서를 보여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중의 착각일 따름이다. 도올의 작업물은 일견 에세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진짜배기 철학책이다. 아쉽게도 그의 탁월한 언어구사력 때문에 중국에도 일본에도 도올 책의 번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세계 철학계의 스타 한병철은 현재의 독일어가 모국어인 한국어보다 더 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한병철이 표현하고 싶은 세계의 사태가 도올이 서술하고 싶은 사태보다 덜 세밀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물론 한병철을 디스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일급의 철학자임은 분명하다.

저자는 도올을 이렇게 소개한다. "어느 글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것이 있다. 김용옥 선생이 한신대를 다니면서 천안 어느 교회에서 설교했던 기록이 담긴 주보를 지금껏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한신대를 떠나면서 외피적인 기독교는 벗어던졌지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종교적 심성만큼은 벗겨낼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 장면을 기억하면서 저자는 도올이 순정 기독교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경재 전 한신대 교수도 스승으로 소개되고 있다. 반가웠다. 필자 역시 그의 <이름 없는 하느님>(삼인 펴냄)으로부터 받은 깊은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필자가 꼭 서평을 쓰고 싶었던 책 중의 하나다. 김경재 교수를 소개하는 챕터의 소제목이 '대승적 기독교의 주창자'로 되어 있다. 감신대가 토착화신학의 본진이라면 김경재 교수의 한신대는 민중신학의 본류였다. 김경재 교수와의 친분보다도 더 재미있었던 것은 저자가 인식하는 두 사람의 차이에 있었다.

저자는 본인과 김경재 교수와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님과의 차이, 다름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장로교 신학자로서 진보주의는 좋게 생각하셨지만, 감리교의 자유주의전통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셨다, 정치 현안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이 일아(一雅) 변선환 선생님과 가까우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였다. 비종교화(본 회퍼)는 수용하되, 비케리그마화(프리츠 부리) 작업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결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을 바라보는 시각차도 존재했다. 선생님은 후자의 편에서 앞선 이를 보았고, 나는 전자의 시작에서 나중 분을 살핀 것이다." 신학적 차이가 있음에도 저자는 신학자 김경재를 스승으로 삼는다. "선생님의 '대승적 기독교'란 말은 함석헌 사상과 잇댄 것으로 두고두고 한국 교회가 좌우명으로 삼을 주제라 생각하여 자주 언급하면 산다."

저자는 많은 분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아내이자 자신도 훌륭한 신학자인 이은선도 스승으로 등장한다. 기독교 장로에서 동학교인이 된 김성순,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 광주와 아픔을 함께 한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석영, 이웃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이끈 김승혜 수녀, 토착화 신학의 선구자 윤성범 등 소개는 계속 이어진다. 한국 기독교계에 훌륭한 분들이 이토록 많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뿌린 씨앗들을 생각하면 한국 기독교가 현대 서구 유럽에서와는 달리 쉽사리 소멸하진 않을 것 같다.

이정배 선생을 통해 여러 훌륭한 분들을 알게 된 것은 필자에게 큰 수확이었다. 특히 이신 박사의 통찰은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희대의 철언(哲言)이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문제는 상상력의 빈곤이다."

▲ <스승의 손사래>(이정모 지음, 늘봄 펴냄) ⓒ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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