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집단 강간 생존자 공개 재판한 이유는? "수치심은 가해자 몫"

성폭력 피해자에 용기 주고자 공개 증언…"강간범은 늦은 밤 만나는 낯선 사람 아냐·가족이나 친구 중 하나일 수도"

프랑스에서 남편 주도로 9년간 수십 명의 남성에게 약물 사용 집단 강간을 당한 여성이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건 생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며 공개 재판을 통해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강간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 BBC,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 등을 보면 23일(이하 현지시각)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에서 열린 재판에서 증언에 나선 피해자 지젤 펠리코(71)는 비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공개 재판을 요구한 것 관련 "모든 강간 피해 여성들이 '펠리코가 해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강간을 당하면 수치심을 느끼지만 수치심을 가져야 할 건 우리(피해자)가 아니라 그들(가해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일 재판이 시작된 뒤 거의 매일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 지젤은 지난달 5일에도 관련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지젤의 당시 배우자였던 도미니크 펠리코(71)는 2011~2020년 9년간 아비뇽 인근 마을 마잔 자택 등에서 아내에게 몰래 수면제, 진정제 등 약물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온라인을 통해 모집한 남성들과 함께 반복해서 강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도미니크를 포함해 기소된 남성은 51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에 강간 혐의가 적용됐다.

도미니크의 범죄는 2020년 슈퍼마켓에서 여성을 불법 촬영하다 붙잡힌 별도의 성범죄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도미니크의 전자기기를 조사한 경찰은 지젤에 대한 집단 강간 장면이 담긴 2만 건에 이르는 사진과 영상을 발견했다. 지젤은 사건이 드러난 뒤 도미니크와 이혼했다.

도미니크는 지난달 법정에서 "나는 이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강간범"이라고 혐의를 인정했지만 함께 기소된 다른 남성 대부분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던 지젤이 동의를 했다고 믿었다며 강간 혐의를 부인하는 상태다. 이에 대해 도미니크는 다른 남성들도 자신이 아내를 강간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초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도미니크가 이 남성들을 모집한 채팅방 이름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였다.

지젤은 이날 법정에서 "완벽한 남자"로 여긴 남편이 자신에게 몰래 약물을 주입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진술했다. 지젤은 남편이 "식사를 많이 만들어 줬고 그의 세심한 배려라고 여겼다"며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내 침대로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즈베리 맛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도미니크는 이전 재판에서 식사 때 낸 음식이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아내에게 가져다 준 아이스크림에 약물을 넣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지젤은 법정에서 음식에 섞인 약물을 섭취했을 때 알아차린 적 있었냐는 질문을 받고 알아차리지 못한 채 빠르게 의식을 잃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도 없었고 아무 느낌도 못 받았다"며 그저 다음날 "잠옷을 입은 채 깨어났고 아침에 평소보다 더 피곤하다고 느꼈지만 많이 걸은 탓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젤은 이윽고 건강 문제를 겪어 "잠에서 깼을 때 출산했을 때처럼 양수가 터진 듯한 느낌을 여러 번 받았"고 기억력 저하를 경험해 신경학적 질환이나 치매도 의심했다고 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남편이 병원에 동행해 자신을 지지해준다고 느꼈다고 증언했다. 지젤은 "그(남편)는 내가 걱정하고 있을 때 신경과 전문의에게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고 산부인과에도 함께 갔다. 나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며 "나 스스로에게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에 대해 수없이 되뇌었다"고 회상했다.

지젤은 사건 뒤 자신이 "완전히 무너졌다"며 "나 자신을 어떻게 재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곧 72살이 되고 이 사건으로부터 회복할 충분한 수명이 내게 남았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젤은 "강간범은 늦은 밤 주차장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아니다. 강간범은 가족이나 친구 중에 있을 수 있다"며 "강간 문화에 대한 (인식이) 진보해야 한다. 사람들은 강간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에서 강간 혐의를 받은 남성들의 연령은 26~74살, 직업은 간호사, 언론인, 군인, 지역 의원, 농장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다.

<뉴욕타임스>(NYT)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이번 공개 재판을 통해 지젤이 자신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재판 뒤 프랑스에선 연일 지젤을 지지하고 성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 통신에 따르면 지난 20일에도 프랑스 파리, 리옹 등 여러 곳에서 시위 참여자들은 "수치심은 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모두 지젤이다" 등의 팻말을 들고 모였다. 통신은 파리 시위에 참여한 프랑스 여성단체 '페미니스트 되기를 감행하다!(Osez le féminisme!)'의 대변인 엘사 라부레가 지젤은 "이를 상징적 재판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며 "피해자들은 그(지젤)가 한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익명성을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어떤 피해자에게도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공개 재판을 통해 가해자 쪽 변호인이 피해자에게 모욕을 가하는 모습이 언론과 대중에 곧바로 폭로되며 2차 가해에 대한 경종이 울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달 법정에서 한 가해자 쪽 변호인은 지젤에게 "은밀한 노출증 성향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지젤은 "모욕적"이라며 "왜 강간 피해자들이 고소하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이 이러한 모욕이 강간 재판에서 "전형적 전략"이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프랑스 낭테르대 형사법 교수인 오드리 달슨빌이 "경찰이 옷차림은 어땠는지, 성 정체성은 뭔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 그들(피해자)의 삶 전체가 면밀히 조사된다. 이 모든 질문은 강간이라는 폭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지젤 또한 "가해자 쪽 변호인들에게 극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지젤은 "나는 용감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건 용감한 게 아니라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와 결의를 가진 것"이라며 "이게 내가 여기(법정) 매일 나오는 이유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듣더라도 내 뒤에 있는 남성과 여성들 덕에 버티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해자 수가 방대해 재판은 오는 12월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젤 펠리코(71)가 23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 형사법원을 떠나고 있다. 지젤은 이날 당시 배우자 도미니크 펠리코(71)가 주도한 자신에 대한 2011~2020년 약물 사용 집단 강간 사건 관련해 증언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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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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