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 간 괴벨스, 포로수용소 들른 힘러…그들은 왜 무표정이었나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90]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18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언자 노릇을 할 때가 많았다. 내가 언젠가는 독일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돼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가장 먼저 비웃었던 것이 유대인이었다. 한때는 독일에 사는 유대인이 공허한 웃음을 뱉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목구멍에 턱 걸려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다시 예언자가 되고 싶다. 유럽 안팎의 국제 유대인 금융세력이 여러 나라를 또다시 세계대전으로 몰아넣는다면, 결과는 유대인 세력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에서 유대인이라는 종족의 멸종이 될 것이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213-214쪽).

1939년 1월30일 히틀러는 독일 총통에 오른 지 딱 6년째를 맞았다. 윗글은 그날 독일 제국의회에서 했던 연설이다. 그 무렵 히틀러는 7개월 뒤 폴란드 침공(1939년 9월1일)으로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히틀러는 '수정의 밤'(1938년 11월10일) 폭력사태를 거치면서, 유대인에 호감을 지니지 않은 독일 사람들조차 평상시에 유대인에게 마구잡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거부감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수정의 밤'은 연재 86 참조). 하지만 전쟁은 상황이 다르다.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유대인 학살이 손쉬울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잔혹 행위를 감추기란 어렵지 않다. 지난 1년 동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국제사회의 눈길을 피해가며 저지른 숱한 전쟁범죄 행위가 그러하다.

▲ 가슴에 다윗별 표식을 단 채 수송열차 옆에 선 유대인들. ⓒ독일연방기록보관소

인질로 잡힌 로스차일드, 끝내 재산 넘겨

'유대인 멸종'을 예언한 제국의회 연설에서 히틀러가 꼽은 '국제 유대인 금융세력'에는 로스차일드(Rothschild, 독일 발음으론 '로트실트') 가문을 뺄 수 없다. 히틀러가 꼭 짚어 '로트실트'를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독일뿐 아니라 유럽을 주무르는 유대인 금융자본을 무너트리겠다고 다짐했을 게 뻔하다.

잘 알려졌듯이,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유대인 대부업자 가문에 뿌리를 두었다. 마이어 암셀 로트실트(1744-1812)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맏아들을 뺀 나머지 네 아들이 런던·파리·비엔나·나폴리에서 금융업을 벌였다. 그들은 합법적인 대부와 투기 등으로 떼돈을 벌었고, '로스차일드 금융왕조'를 일궈냈다. 19세기 유럽의 왕조는 5개가 꼽힌다(영국 윈저, 프랑스 부르봉,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러시아 로마노프,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조).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지배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제6왕조'로 불렸다.

그 가운데 영국 로스차일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싸우느라 전쟁자금이 부족한 영국 정부의 전쟁채권(war bond)을 대거 사들이는 조건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와 유대국가 설립을 도와주기로 한 밸푸어선언(1917)을 이끌어냈다(연재 80 참조).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틀러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로트실트(로스차일드) 소유의 회사와 자금을 빼앗아 군비 확장에 보탰다.

나치 독일의 로스차일드 약탈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로스차일드 임원들 몇몇은 회사 재산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죽었다. 크레디탄슈탈트(로스차일드 계열사 신용은행)의 한 핵심 이사는 돌격대 차량에 실려 가다가 달리는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고, 폴퍼파브리크(로스차일드 화학회사)의 대표이사는 집으로 들이닥친 돌격대로부터 '가택 수색'을 받다가 발에 걷어차여 죽었다. 로스차일드 오너들은?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그 가족들이 헐값에 모든 재산을 독일 정부와 국영기업(또는 나치와 유착한 기업)에 넘기는 데 동의한 다음에야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친나치 금융기업인 도이체방크와 드레스덴은행이 큰 이익을 챙겼다.

히틀러, "모든 유대인 멸종시켜야"

1941년 12월12일, 이 날은 미국이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7일) 뒤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하루 뒤이고, 모스크바 점령을 노리던 독일군에게 소련군이 반격을 하기 시작한 지 1주일 뒤다. 바로 그날 히틀러는 50여명의 측근 부하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이뤄질 일을 또다시'예언'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동유럽사)의 역작(Bloodlands, 2010)에서 관련 글을 보자.

["세계대전이 이미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네. 이제 유대인 멸종은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결과이네." 그 시점부터 그의 가장 중요한 충복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됐다. 즉 가능한 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유대인을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티머시 스나이더, <피에 젖은 땅: 스타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글항아리, 2021, 384쪽).

히틀러와 그의 충복들은 독일이 지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데엔 유대인의 음모와 내부의 적에게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라 믿었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분수령으로 전쟁 주도권이 히틀러가 아니라 스탈린에게 넘어가는 시점에서 '유대인=배반자, 독일인=희생자'라는 믿음이 더 커졌고, 독일민족이 겪을지도 모를 재앙을 막으려면 유대인을 없애버려야 했다.

히틀러로부터 '유대인 멸종' 지침을 받은 며칠 뒤, 폴란드 점령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부의 수장 한스 프랑크는 바르샤바에서 이런 지침을 내려 보냈다. "제군들, 이제 모든 연민의 감정은 잠시 접어두길 명하는 바다. 우리의 위대한 제국 전체를 위해, 우리는 그 어디서든 눈에 보이는 유대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티머시 스나이더, 384쪽).

같은 무렵 히틀러의 나팔수(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장에다 이렇게 적었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독일 민족을 애처로워할 뿐이다"(티머시 스나이더, 385쪽). 괴벨스는 소련 침공(1941년 6월22일) 뒤 '영국, 소련, 미국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음모의 촉수가 유대인'이란 주장을 잇달아 펴며 독일 보통사람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 유대인 박해에 앞장 선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와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사진 오른쪽은 '유대인(Jude)' 글자가 박힌 다윗별 표식. ⓒ위키미디어

괴링,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준비하라"

지난 글에서 히틀러는 전쟁범죄의 증거를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나치의 용어로 '유대인문제의 최종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총통의 문서는 없다. 연합국이 압수한 산더미 같은 문서철에서도 학살 지시를 담은 '히틀러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대인 멸종이니 절멸이니 했지만 말로만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독일 패전 뒤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다수의 피고인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관련 명령을 헤르만 괴링(부총리), 하인리히 힘러(친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장) 3인에게 주로 내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명령을 들었다"고 증언하면서도 "문서를 봤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아가 '최종해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몰랐다고 발뺌했다.

심지어 나치 서열 2인자 헤르만 괴링조차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또는 "유대인 절멸에 대해선 여기 법정에 와서야 알았다"고 낯 두껍게 주장했다. 곧바로 검사 쪽에서 증거 문건을 내놓으며 반격에 나서자, 괴링이 거짓말쟁이라는 게 들통 났다. 법정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1941년 7월31일 제국보안본부(RSHA)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제국 방위를 위한 각료회의' 의장 자격으로 괴링은 이런 지령을 문서로 내렸다.

[1939년 1월24일의 지시를 통해 당신에게 이미 위임한 과업, 즉 유대인 문제를 국외 이주나 대피의 형태로 가능한 한 시대 상황에 적합한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지시에 덧붙여, 독일의 영향권 안에 있는 유럽 유대인 문제의 총괄적 해결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할 임무를 위임한다. 나아가 나는 당신에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실행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전체 기획서를 곧 제출할 것을 위임한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풍경, 2002, 74쪽).

그 바로 직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이 내려 보낸 지령문의 영어 번역에 문제가 생겨 작은 소동이 일었다. '최종 해결'이란 문장이 잘못 번역된 탓이었다.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의 설명을 보자.

[이 지령의 영어 사본에서 마지막 줄의 독일어 단어 Endlösung이 '최종해결'이 아닌 '바람직한 해결'로 오역되어 있었다. 독일어를 알지 못했던 미국인 잭슨 판사는 괴링이 반대심문 중에 자신은 그런 불길한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도록 빌미를 준 셈이 됐다. 괴링은 "제가 이 끔찍한 절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바로 이곳 뉘른베르크에서입니다"라고 소리쳤다](윌리엄 샤이러, <제3제국사: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독일의 패망까지>, 책과함께, 2023, 1656쪽).

위 인용문이 들어간 두툼한 책(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1960)의 저자 윌리엄 샤이러는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시카고 트리뷴>과 CBS방송의 유럽 특파원으로 있었다. 1930년대에 독일 제국의회에 드나들며 히틀러의 연설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게슈타포가 스파이 혐의를 씌우려 하자 1940년 독일을 떠났다. 전쟁 동안 C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유럽전선의 흐름을 알렸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현지 취재했다. 하지만 냉전시대 초기의 매카시즘 광풍으로 미 언론계에서 퇴출되는 아픔을 겪었다(넷플릭스 6부작 미니시리즈 '히틀러와 나치'는 샤이러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다윗별 달고 게토에 갇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1일) 뒤 그곳 유대인들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히틀러가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한 한스 프랑크(나치 변호사 출신)는 유대인들을 쉽게 가려내기 위해 1939년 11월23일부터 12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와 여자는 파란색 다윗별이 그려진 흰색 완장을 차도록 했다. 얼마 안 가 규정을 바꿔, 노란색 바탕에 10cm 크기의 검은색 다윗별을 웃옷의 앞뒤(가슴과 등)에 달도록 했다. 바르샤바에서는 표식 판매가 갑작스런 돈벌이가 되었다. 시장에는 천으로 만든 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세탁이 가능한 예쁜 플라스틱 표식은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렸다.

다윗별 표식을 한 유대인들은 그동안 살던 집에서 쫓겨나 게토로 내몰렸다. 폴란드전역에 1,000개의 게토가 들어섰고, 장벽과 철조망이 둘러쳐져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가장 규모가 큰 바르샤바 게토는 1940년 가을에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유대인은 게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고, 게토 안에서도 저녁 9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엔 발이 묶였다.

독일(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 포함) 유대인들은 폴란드 유대인들보다는 좀 늦게 표식을 달았다. 1941년 9월부터 6살 이상의 유대인은 모두 노란색 바탕에 '유대인(Jude)'이란 검은 글자가 다윗별 장식 한 가운데 박힌 표식을 달아야 했다. 이들 독일 유대인들도 곧 기차에 실려 폴란드 수용소로 떠날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다음 주 글에서 살펴봄).

"굳이 다윗별을 달게 할 필요까지 있느냐"

길거리에서 유대인을 누구라도 금세 알아챌 수 있도록 표식을 달게 하자는 제안을 내놓은 이는 나치 선전상 괴벨스였다. 나치 연구자로 이름이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니콜라스 스타가르트(옥스포드대, 독일현대사)는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의 6년 동안 나치 독일의 지도부와 군부, 그리고 일반 독일 병사들과 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전쟁을 치렀는지에 초점을 맞춘 대작(The German War, 2015)을 냈다. 그 책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유대인의 다윗별을 부착시키자고 히틀러를 설득한 사람은 괴벨스였다. 그는 유대인을 공적으로 낙인찍은 조치가 대중적인 반유대주의에 불을 댕기리라 기대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똑같이 예상했다. 그래서 전직 유대인 교수 빅토르 클램퍼러는 1941년 9월에 그 다윗별을 달고 길거리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쇼핑을 전적으로 '아리안' 아내 에파에게 맡겼다](니콜라스 스타가르트, <독일인의 전쟁>, 교유서가, 2024, 347쪽).

괴벨스가 바랬던 대로 다윗별 부착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안겼다. 스타가르트에 따르면, 1941년 사사분기 동안 베를린에서만 243명의 유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마지막 3주일 동안 오스트리아 빈에서 87명이 자살했다. 그 무렵 독일 보통사람들 사이에는 "굳이 다윗별을 달게 할 필요까지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급기야 나치 정권은 1941년 10월24일 유대인에 대한 동정 표현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3개월 동안 수용소에 가둔다는 행정명령을 내놓았다.

괴벨스의 게토 시찰기

그해 11월16일 나치의 선전매체인 <제국>에 실은 논설에서 괴벨스는 "유대인과 사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사람은 유대인을 편드는 사람이고, 유대인으로 취급돼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괴벨스의 논설 제목은 '유대인은 유죄다'였다. 태생적으로 유대인은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마땅하다는 괴벨스의 의식세계에선 유대인과의 공존이나 배려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게토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상세히 지켜보았다. 이건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물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일은 인간적인 업무가 아니라 수술이다. 이곳은 근본적인 방식으로 도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유럽은 유대인의 질병에 걸릴 위험성이 있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123쪽에서 재인용)

윗글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폴란드의 한 게토를 다녀온 뒤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다. 독자분들도 짐작하시듯, 괴벨스의 일기엔 너무나 일방적인 시선만 담겨 있다. 게토 수용자가 인간이 아닌 '동물'로 여겨졌다면, 그렇게 만든 책임은 괴벨스를 포함한 나치 정권 지도자들에게 있다. 게토 수용자들 상당수는 그곳에 오기 전까지는 부자든 서민이든 나름의 인간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게토에 갇혀진 뒤 먹거리도 부족해 병약해졌다. 이․벼룩이 들끓었고 화장실 등 위생 상태도 좋질 못해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졌다.

일단 티푸스를 비롯한 전염병이 돌면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어린이와 노인들부터 숨을 거두었다. 상황이 그런데도 괴벨스는 '유대인의 질병에 걸린 위험'을 경고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질병'이란 유대인을 '세균덩어리'로 보는 반유대적 언어다. 괴벨스 일기를 보면, 그는 게토를 다녀오면서 죄책감이나 연민은커녕 심리적 갈등조차 못 느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포로수용소에 들른 힘러

독일의 소련 침공(1941년 6월22일)으로 엄청난 숫자의 포로들이 생겼다. 미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에 따르면, 전쟁 중 붙잡힌 소련군 포로 숫자는 575만 명에 이르렀고, 이들 가운데 1945년 연합군이 포로수용소를 해방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00만 명쯤으로 추정된다(윌리엄 샤이러, 1636쪽).

전쟁 관련 통계는 정확하기가 어렵다. 연구자마다 조금씩 달라 논란을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독일 연구자로 이름이 알려진 영국 전쟁사가 리처드 오버리(엑스터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와 스탈린의 행적을 비교 분석한 그의 역작(The Dicators, 2004)에서 '1944년 여름까지 독일군은 520만 명의 소련군 포로를 붙잡았고, 전쟁 기간을 통틀어 사망한 소련군 포로는 어림잡아 254만명에서 33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교양인, 2008, 723쪽).

소련군 전쟁포로의 대부분은 1941년 6월부터 12월 초까지 이어졌던 독일군의 공세(전격전과 포위전) 기간에 붙잡혔다. 독일군의 처분은 그야말로 무자비했다. 소련군 정치위원과 보안기관 요원, 그리고 유대인 장교는 우선적으로 처형됐다. 포로들의 대부분은 굶어 죽었다. 미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의 글을 보자.

[교전중인 군대가 신속히 진격하는 가운데 이토록 많은 포로를 적절히 돌보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독일 측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1941~42년 눈으로 덮인 영하의 혹한 속에서 소련군 포로들을 일부러 굶기고 허허벌판에 방치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 포로들이 더 많이 죽을수록 우리에게 더 이롭다." 이것이 바로 책임자 로젠베르크(동부점령지 장관)의 말이며 나치 관료들의 전반적 태도였다](윌리엄 샤이러, 1636쪽).

히틀러 전쟁지도부는 독일 본토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데 소련군 포로가 쓸모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챘다. 그러나 소련군 포로들 가운데 독일로 보내기에 적절한 체력을 갖춘 포로는 드물었다.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포로들은 노동 능력을 이미 잃은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담은 오랜 흑백사진 자료 가운데 친위대(SS)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가 1941년 8월15일 이른 아침 민스크(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벨라루스의 수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사진이 남아있다. 철조망 사이로 소련군 포로를 바라보는 힘러의 얼굴은 그야말로 무표정이다. 덤덤하다 못해 로봇(기계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1941년 11월 힘러는 민스크에서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현장을 지켜본 적이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동영상으로 남긴 촬영기사이자 '히틀러의 카메라맨'으로 알려진 발터 프렌츠가 남긴 필름에 그때의 영상이 남아있다.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아시아 연구자 이안 부루마(뉴욕 바드칼리지, 저널리즘)가 근래에 내놓은 책(The Collaborators, 2023)에서 관련 대목을 읽어보면, 힘러는 사무적이고 얼음처럼 차디찬 성격에다 메마른 내면을 지녔음을 짐작하게 된다.

[(프렌츠가 남긴 영상에 따르면) 힘러는 총살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시체더미 속에서 아직 움찔거리는 사람들에게 다시 총을 쏘라고 지시 내렸다. 시체가 쌓여 있던 구덩이는 그대로 이들의 집단 무덤이었다. 힘러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기차에서 저녁을 먹었다. 민스크에서 뉴스와 영상을 찍음'](이안 부루마,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 글항아리, 2023, 238-239쪽).

▲ 1941년 8월15일 민스크 지역의 소련군 포로수용소에 들른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위키미디어

우리 마음속의 '도덕 경찰'

괴벨스나 힘러는 희생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중동에서 '막가파식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진 못했을까. 독일 심리학자 롤프 데겐은 뇌과학과 진화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을 알린 과학저널리스트다. 데겐은 그의 책(Das Ende des Bösen, 2007)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악(惡)의 존재와 죄책감에 대해 살펴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선과 악의 문제를 놓고 생각해볼 시간을 갖도록 이끈다. 그의 글을 보자.

[죄책감의 기본 전제는 공감능력, 즉 타인이 입은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입힌 해를 함께 느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맛보게 된다.](롤트 데겐, <악의 종말>, 현문미디어, 2010, 142쪽).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또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기 어렵다.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지녔다면, (괴벨스나 힘러처럼) 유대인 게토나 포로수용소의 비참한 일상을 두 눈으로 보면서 아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을 수는 없다. 눈물을 흘리거나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다. 위의 심리학자 데겐은 "얼굴 홍조가 '도덕의 경찰'로서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마음속에 나름의 '도덕 경찰'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면 얼굴이 붉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괴벨스․힘러의 무표정

게토에 들른 괴벨스나 포로수용소에 들른 힘러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저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다. 그들의 내면에는 '도덕 경찰'이 없는 것일까. 심리학자 제프 엘리슨(미 덴버대)은 "죄책감이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 감정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확실하게 구별시키는 특징적인 얼굴 표정이 없다"고 했다. 죄책감은 언제나 수많은 하위감정들의 얽힘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하위감정들을 반영하는 얼굴표정들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특징적인 얼굴 표정이 없다고 한다(롤트 데겐 142쪽 참조).

엘리슨의 이런 분석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전문 연구자 영역이다(엘리슨은 심리학자이면서 암벽등반가다. 암벽등반의 심리학적 분석을 다룬 <버티컬 마인드>가 국내에 번역돼 있다). 그보다는 데겐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더 빨리 와 닿을 듯하다.

[죄책감에 저항하는 손쉬운 방법은 정신적으로 희생자와 거리를 두거나 그의 인격을 외면함으로써 자기 안에 공감이 생겨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혐오에서 비롯된 자기비난도 섞여 있다](롤트 데겐 142쪽).

괴벨스나 힘러 같은 골수 나치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무표정으로 게토나 포로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비결은 결국 '거리'다. 그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공감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린 데 있다. 여기서 '거리'란 몇 미터 떨어졌느냐는 공간적 거리뿐 아니다. 세계관이나 정치이념(의식), 현실인식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 유대인을 박멸해야 할 '세균'으로 여기고 러시아인을 '열등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선 죄책감은커녕 연민조차 품기 어렵다.

괴벨스나 힘러야 죄책감을 못 느꼈다 쳐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수용소 감시원으로 배치된 독일 병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유대인 학살부대로 발령을 받은 병사들은 또 어땠을까.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면 세뇌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까닭에 죄책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덕 경찰'을 지닌 인간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내적 갈등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다음 글에서 독일 유대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의 길로 떠나게 됐는지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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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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