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이 게임 칼럼 새 연재 '게임필리아'를 시작한다. 디지털 게임은 문화인 동시에 기술이며, 텍스트이면서 아키텍처이다. 컴퓨팅, 디자인, 건축, 극작, 공학, 물리학, 시네마의 기술이 공존하는 게이밍의 세계는 동시대 문화와 기술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기획연재 칼럼 '게임필리아'는 게임을 통해 소통하고, 언어를 만들며, 감정의 구조를 쌓아올리는 시대, '놀이하는 인간'의 공동체, 디지털 게임의 비평과 사회문화사를 다룬다.
게이밍과 시뮬레이션의 딜레마
<문명> 이나 <심시티> 등의 시뮬레이션 게임은 정적인 동시에 역동적이다. 긴 시간 동안 동역학을 쌓아 올려 완성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설계에 따라 호전적인 전쟁 문명이 만들어질 수도, 과학이 발달한 기술문명을 건설할 수도, 영성 문명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플레이어가 마음먹기에 따라 노동집약적인 산업 도시가 될 수도, 서비스업과 관광이 주가 되는 문화도시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많은 게이머들이 한 번쯤은 품었을 법한 의문이다. 왜 우리는 지배자(시장, 왕, 대통령, CEO)의 입장에서만 설계하는가? 노동자, 이민자, 실직자, 시민1의 입장에서 설계할 수는 없는가? 파업을 설계하는 노조위원장, 부패한 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 지도자,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철거민은 왜 이 시뮬레이션에 참여할 수 없는가? 개발자에게나 게이머에게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재미가 없을테니까요.'
재미는 게임의 목적인 동시에 딜레마다. 재미가 없다면 게임을 할 이유가 없고, 그것이 게임이어야만 하는 이유도 사라진다. 그런데 오로지 재미만 추구한다면 시적 아름다움도 사라진다. 문명은 문화를 꽃피우기 전 놀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재미를 미학으로 승화하면서 예술을 탄생시켰다. 특히 기술미디어가 소통적이고 네트워크적인 양상을 띠는 현대의 컨버전스(convergence)환경에서는 재미의 양상 자체가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에 게임은 심플했다. 전달기술과 메모리의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8비트 게임은 복잡한 재미를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움직이고, 쏘고, 맞추고, 텍스트를 읽어나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SSD와 GPU의 시대에 게임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 광학 기술과 복제 기술이 진보하면서 영화와 사진이 재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듯이, 게임 또한 재미의 새로운 측면들을 개척했다. 이전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더 큰 용량에 더 빠른 연산처리로 방대한 로직을 담을 수 있다. 재미는 이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게이밍에서 재현의 사실성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재미는 반비례해서 떨어진다. 전쟁 슈터 게임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현실을 반영해 총알을 수백 발 퍼부어도 적을 맞출 수 없거나 눈 먼 총알 한 방에 게임오버가 된다면 즐길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DCS 월드>처럼 실제 전투기 조작법을 구현한 시뮬레이션 게임은 대다수가 지루해한다. 게이머들은 <에이스컴뱃> 시리즈처럼 화끈한 도그파이팅과 역동적인 고속기동을 직접 해보고 싶어한다. 요컨대 현실은 고루하기 짝이 없으며, 모더니즘 예술과 달리 게임은 재미라는 목적(욕망) 때문에 더더욱 실재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게임에서 시뮬레이션이란 결국 얼마나 사실적(realistic)인가가 아닌 얼마나 진정한(truthlike)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 과정이 정교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역사에서는 몰락한 조선 문명이 18세기에 스텔스기와 핵미사일로 세계를 재패하는 결말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즐거워 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혁명의 시뮬레이션, 총파업의 시뮬레이션 같은 진중하고 정치적인 소재들도 충분히 재미의 울타리 안에서 시뮬레이션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까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모든 가치는 인간 노동으로부터 나온다"
2024년 9월 21일에 출시된 <프로스트펑크2>는 이러한 게이밍과 시뮬레이션의 딜레마를 진보정치의 프레임워크 안에서 풀어내고 있는 게임이다. 개발사인 11비트 스튜디오는 이전부터 이런 진지한 게임(serious game)들을 줄곧 개발해 왔다. <디스 워 오브 마인>(2014)은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평범한 시민이 얼마나 부도덕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어드벤처 게임이고, 전작 <프로스트펑크>(2018)은 기후변화로 빙하기가 도래한 뒤 생존자들이 공동체를 재건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들은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교란하는 시스템, 어떤 선택을 하건 고통스럽게 고뇌할 수밖에 없는 게임 진행은 당혹감을 자아냈다. 두 게임은 행복한 선택지를 절대 제공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생존하려면 타인의 물건을 훔쳐야 하는데, 물건을 훔치면 그 주인은 다음날 굶어서 죽어 있다. 눈 폭풍이 몰려와 하나 뿐인 발전기를 계속 가동해야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2교대 정비작업을 할당해야 한다. 시행하지 않으면 동사자가 발생하고, 시행하면 과로사망자가 발생한다.
<디스 워 오브 마인>과 <프로스트펑크>는 몰입하게 만드는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을 클리어 한 뒤 재미있게 잘 즐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임이기도 하다. 많은 게이머들이 신선한 충격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긴 시간 반복해서 즐기기는 어려운 교조적 측면, 그리고 강한 정치적 성향에 대해 코멘트했다. 이같은 피드백을 받아들인 <프로스트 펑크2>는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의 매커닉을 한층 더 강화해 재미 요소를 정교하게 재배치하는 게임이다. 어떤 교훈을 얻거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게임보다 더 유용한 미디어는 많다. 다큐멘터리나 영화, 책 등이 그렇다. 그러나 진실을 비판적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게임만이 잘 할 수 있는 요소다. <프로스트펑크2>는 바로 그 점을 잘 파고들었다.
보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주요한 자원은 화폐이거나, 혹은 자연자원(금, 은, 철, 식량) 등이다. 인구는 장기말처럼 사용된다. <프로스트펑크2>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노동력'이다. 빙하기가 찾아와 문명이 말살된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턴마다 노동력을 잘 분배해 공동체의 생존 확률을 높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발전기를 유지관리하기 위해서 노동력이 투입되고, 발전기를 주변으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인프라(거주, 채굴, 탐험, 식량, 물류)에도 노동력이 소모된다. <문명> 같은 다른 작품과 달리 이 게임에서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얼어붙은 땅을 깨는 쇄빙작업을 해야 하며, 여기에도 노동력이 소모된다. 노동력은 필수 요소이지만 화폐처럼 잘 통제되지 않는다. 발전기에 적절한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동사자가 발생하고, 식량 생산 인원이 부족하면 아사자가 발생하고, 채굴작업에 일손이 모자라면 발전기가 멈춘다. 거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범죄가 발생해 신뢰도가 떨어지고 신뢰도가 떨어지면 가동 노동인구가 점차 줄게 된다. 게임은 이런 상황이 돌발 요소가 아닌 필연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플레이어를 검증한다.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을 쇄빙해 식량 생산지점을 늘리거나, 기존의 인력에게 초과근무를 할당해 돌파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동사자와 과로사자가 발생하는데, 죽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플레이어는 신뢰도가 떨어져 정치 위기에 봉착한다. <문명> 시리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사치품·전략물자 등은 이 게임에 없다. 생존을 위한 '고철'이 전략물자이자 사치품이고,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한 하이테크 자원 '증기심'은 오로지 탐사 발굴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고철을 분배할 수도, 생존을 위해 고철을 징발할 수도 있다. 이 게임에서 화폐를 담당하는 '열우표'는 노동력에 기반한 주화로, 통화처럼 투자나 판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금 형태로만 확보할 수 있다.
이 게임은 동역학의 기반을 노동력으로 설정함으로써 카를 마르크스·해리 브레이버만 등 좌파 정치경제학의 핵심 테제인 노동가치론의 시뮬레이션을 플레이에 접목시킨다. 플레이어는 좋든 싫든 모든 재화가 노동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회전할 때 우리는 가치의 원천이 노동력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모든 상품과 부가 주식이나 금융으로부터 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은 자본이 노동력을 상품처럼 구매해 착취하면서 생산물의 가치보다 더 적은 대가를 교환하는(임금) 비등가교환과정을 기본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논증했듯이, 화폐란 노동이 물상화되어 신뢰받는 제 3자(은행, 정부)의 인증 하 암묵적인 교환 수단이 된 것일 뿐, 노동력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좌파 정치경제학은 이를 준거로 달러본위제와 금융자본주의의 축적을 상품과 노동과정을 생략한 도박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파국에 이르러서야 이를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대공황, 전쟁과 재난 상황에서 화폐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상품도, 화폐도 인간노동과 그 첫 결과물인 사용가치에서부터 출발한다. <프로스트펑크 2>의 노동력 기반 매커니즘은 탄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예상치 못한 배신감을 선사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진리로 믿었던 재생산·투자 중심의 '자유 시장경제'가 허상이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비등가교환(임금과 착취)이 핵심이지만 <프로스트펑크2>의 재난경제는 모든 것이 등가 교환이다. 열기를 얻기 위해 석탄을 투입해야 하고, 석탄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투입해야 한다. 열기가 없으면 노동력도 감소하고, 석탄 채굴 과정에서 또 노동력이 감소한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현실의 자본가·정치인 등 지배자들과 달리 우리는 이 게임에서 '실재 내가 처해있지만 외면해온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 뭔가 하려면 반드시 노동력 또는 인명을 대가로 바쳐야 하는 현실을. 그러니 게임이 관습적으로, 매끄럽게 잘 진행되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가 말했듯이, "진실은 곧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생명관리 정치의 시스템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플레이어는 '인간주의'라는 개념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식량위기에 봉착하면 노인 인구들이 자원해서 공동체를 떠나겠다고 제안하는데,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게이머는 혹한의 폭풍 '화이트아웃'을 대비하는 식량 비축과정에서 큰 애로사항을 겪게 된다. 식량 비축에 실패하면 사상자는 훨씬 많이 발생한다. 노인들을 떠나보내면 위기를 더 쉽게 통제할 수는 있지만 할머니·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아이들의 이벤트가 이어진다. 인구와 노동력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과 정책을 설계하는 것도 플레이어의 주요 임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정치를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프로스트펑크2>는 노동력과 정치경제학적인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생명관리 정치'를 치밀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다.
플레이어는 자원과 에너지, 노동력을 관리하는 동시에 추위, 질병, 범죄, 배고픔, 위생도 관리해야 한다. 안전-인구-영토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시위가 일어나고, 범죄가 발생하며, 사상자와 긴장의 증가로 인해 인구성장이 감소해 결국 게임 최대 자원인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서 플레이어는 경비대를 운영하며 교도소를 세워 규율권력을 확립하게 된다. 또한 게임 내에는 의회가 있어 기술·복지·거주·식량·노동과 관련된 정책과 테크트리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게임 내 각 파벌세력의 동의를 얻어내야만 한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 내 인구의 생사여탈과 관련한 모든 의사결정을 해야만 하는 냉혹한 '생명권력'의 행사자가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인간의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생물학적 요소가 정치권력의 전략으로 전화하는 방식이 곧 생명관리정치의 매커니즘이라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서는 감시와 처벌(교화), 그리고 훈육과 통제가 동반된다.
플레이어는 훈육과 통제가 얼마나 혹독한가를 경험하게 되는데,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파벌의 요구를 들어주고 투표에서는 부결시키는 전략을 짠다던가 온건파-급진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권력을 보전해야만 한다. 복지를 박탈하고 생산성을 증대하면 긴장이 높아지면서 시위가 발생하거나, 건설할 수 있는 건물 공간을 감시탑으로 소모해야 한다. 전통을 버리고 합리적인 정책을 밀고나가면 치안이 위협받는다. 정책을 자동화와 기술효율성에만 집중하면 인구는 많은데 필요할 때 써야하는 노동력은 줄어들고 위생이 위협받는다. 탐험에만 집중하면 희소 자원인 증기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더 큰 노동력을 소모해야 하는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플레이어가 어떤 정책과 기술을 개발하고, 어떤 파벌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진행할지 컨셉을 짜서 밀어붙이면 반드시 그에 따른 합당한 대가가 뒤따른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구 행성의 영구동토화라는 상황에서 생명권력의 운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도덕적 시험대에 들어서도록 만든다.
독재자가 되어서 민주주의를 농락해 정권을 운영하는 시뮬레이션 게임 <트로피코> 시리즈는 이런 시스템을 농담처럼 즐길거리로 제공하지만, <프로스트펑크2>는 소름끼치는 결과들을 덧붙여 권력운영의 맹점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러나 이 점은 불쾌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모든 상황이 시간·자원의 제한에 걸려있으므로, 플레이어는 망설이지 않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 후 결과를 평가받으며 윤리에 대해 곱씹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지속가능한' '순환적인' 시스템의 역동성을 설계하는 재미보다 그 설계 과정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정지상태'에 더 큰 방점을 찍는다.
우리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순간 이것이 꿈은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깨지 않았으면 하고 더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과감히 꿈에 정지를 걸고 깨어날 때 비로소 지난한 현실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을 무덤덤하게 치룬 뒤, 그가 남긴 작은 유품을 만지고 나서야 모든 것이 정지하며 눈물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 정지는 언제나 각성의 순간이다. 우리는 정지 상태에서만 죽은 사람의 인기척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꿈꾸어온 세계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프로스트펑크2>에서 플레이어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정지상태'는 각성의 시뮬레이션이다. 망각되지 말아야 역사, 외면당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상기하는 과정. 이것이 '정지의 시뮬레이션'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시적 아름다움이다. 테트리스나 스타크래프트 같이 정교한 시스템에서 나오는 수학적 아름다움(에르고딕)만이 게임의 재미요소가 아님을 일깨운다.
비판적 실재를 위한 시뮬레이션 게임
디지털 게임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루돌로지(ludology)의 전통에서 '비판적 게임(critical game)' 또는 '진지한 게임(serious game)'이란 개념이 등장한 시기는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이다. 그 선구자 중 한 명인 곤살로 프라스카는 자신의 책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에서 모드 제작에 참여하는 집단지성 기반 게임개발, 그리고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차용한 게이밍의 기법을 제안한 바 있다. 나는 이 개념이 과도기를 지나 서서히 연착륙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집단이 참여하는 공동개발은 이미 게이밍을 넘어 오픈소스 기반 개발, 탈중앙화 시스템, 깃허브 등 컴퓨팅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자리 잡았지만, 프라스카가 꿈꿨던 진보 정치의 급진성은 이제야 화두로 떠오르는 중이다. 이는 11비트 스튜디와 소수의 진취적인 독립게임 개발자들에 의해 점점 작가주의적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수히 많은 게임의 재현양식 중에서도 '시뮬레이션 게임'이 비판적인 프레임워크를 재미 요소와 잘 어우러진다는 사실이다. 누벨바그 영화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는 "반전 전쟁영화란 성립될 수 없다. 영화 속의 전투는 어떻게 표현되어도 그 자체로 관객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기 편대가 마을을 폭격하는 유명한 시퀀스는 베트남전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웅장한 스펙타클에 빠져들도록 만든다. 나는 이에 반만 동의하는데, 카메라가 아닌 플레이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현실의 궁핍·비참은 슈터 게임이나 RPG 게임에서는 성립하긴 어려워도(플레이어도 전투 자체에 흥분하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강력하게 어필된다. <프로스트펑크 2>가 그렇다. 따라서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이란 이념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대안적인 현실을 향한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시뮬레이션의 강력한 연산적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메타-실재를 넘어 비판적 실재(critical realism)를 재구성할 기회를 거머쥔다.
<프로스트펑크 2>가 시뮬레이션적 실행성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파산을 선고받은 자본주의의 너머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어떤 비전이다. 플레이어는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떠나 불가능하다거나 소멸되었다고 믿어왔던 진보 정치의 아젠다들이 실현 가능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복지, 기본소득, 생산수단의 공유 같은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거 했다가 망한 나라들을 봐. 꿈 좀 깨.' 라고 이야기하는 현상론에 단호한 정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히려 망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플레이어가 묵시록에서 생존하고자 구현하는 메타실재는 그것이 설령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냉소와 무기력을 극복하는 초월적인 영성으로의 동력을 부여하고, 나아가 비판적인 실재를 재구성한다. 게이밍의 강력한 시뮬레이션 기능은 우리가 가야만 하는 세계, 되고 싶은 존재를 실제로 체험하게 만듦(being being)으로써 현실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북돋운다.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을 넘어, '비판적 실재를 위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시론을 재구성해보도록 하자. 이 같은 게임은 더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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