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의한 검열‧배제‧통제 행위는 언제나 당대 정치 권력과 사회질서가 '불온'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시대적 징후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좌파 척결'이라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이념이 '문화권력 균형화'와 혹은 '문화예술계 건전화' 정책으로 포장된 채, 집권세력에 불복종하는 시민들을 통치하고자 했던 일종의 국가폭력이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의 '국방부 불온도서 지정' 역시 정권의 반공주의, 친미, 친자본주의적 사회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수 학부모 단체에 의해 '음란도서'로 지목되고 정치인들에 의해 공공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는 성평등‧성교육 도서는 어떤 시대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을까. 뚜렷한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기치 아래 벌어지고 있는 도서 퇴출 사태는 성소수자 혹은 여성에 대한 공격을 넘어, 권리 주체들의 적대 구도를 강화하면서 민주적 질서와 사회공공성, 평등의 정치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진행 중이다.
'학부모 단체'라는 허울 속의 보수 개신교 세력
2020년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성평등 도서를 추천하는 '나다움 어린이책' 교육문화사업이 여성가족부에 의해 철회된 이후,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공공 영역에서 퇴출시키려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작년 5월 충남․충북 지역을 중심으로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빼야 한다는 보수 학부모 단체의 집요한 민원이 제기되었다. 김태흠 충남도지사는 "낯 뜨거운 표현이 대부분으로 아이들의 교육 목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며 일부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열람 제한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경기도교육청이 초중고 각급 학교에 보수 학부모 단체의 민원을 전달하며 '선정적'이고 '동성애를 조장'하는 도서에 대해 처리 결과를 보고하라고 계속 압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결과로 517종 2528권이라는 충격적인 숫자의 도서가 경기도 내 학교도서관에서 사라졌다.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았을 뿐 서울, 인천, 세종, 대구 등 다른 지역의 공공․학교도서관에서도 이미 다수의 도서들이 검열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수 학부모 단체' 민원으로 촉발되었다고 하나 성평등‧성교육 도서 퇴출을 요구하는 핵심 행위자가 보수 개신교 세력이라는 사실이 가려질 리 만무하다. 2007년 노무현 정권에서 7개의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한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이래 보수 개신교는 가시적인 반동성애 운동 세력으로 본격 등장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추진되기 시작한 반차별 입법이나 인권의 제도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이들이 특히 주력한 영역이 바로 교육이다. 학생에 대한 체벌 금지, 복장 및 두발 자유, 집회의 권리 보장을 담은 학생인권조례에 '동성애 및 임신․출산 조장'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집요하게 반대해왔다. 2010년대부터 확산된 조례 제정 운동은 결국 현재 전국적인 폐지 시도로 귀결되고 있다. 2014년 국정역사 교과서 사태는 도덕 교과서에서 성소수자 관련 내용을 대폭 수정하도록 압박한 한기총 중심의 '동성애조장 교과서문제 대책위원회'의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2015년 자위, 성적 지향, 다양한 가족형태 용어 사용을 금지시킨 교육부의 퇴행적인 '성교육 표준안' 사태는 성소수자, 재생산권, 성평등을 모조리 삭제하며 공표된 2022년 개정 교육과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이른바 '우리 자녀 지키기'를 내건 보수 개신교 정치가 한국 사회에서 학생인권과 청소년의 권리, 교육의 공공성을 침식해온 과정이기도 하다.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전국적인 민원 공격 역시 이 속에서 벌어지는 풀뿌리 보수 개신교 운동에 가깝다. 이들은 여전히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을 압박해 150여 권의 도서를 '청소년유해도서'로 일괄 지정하고 공교육 체계에서 몰아내려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 개신교 세력의 도서 퇴출 요구는 '성소수자 혐오'이기 때문에 문제인가?
보수 개신교 vs 성소수자의 싸움?
보수 개신교의 표지에 '반동성애'가 있다 할지라도 이들의 정치 활동은 종교적 신념에 기반해 성소수자의 권리를 소멸시키려는 시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16년 촛불 당시부터 최근 윤석열 정권의 '여성가족부 폐지' 국면까지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는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슬로건을 떠올려보자. 성평등을 빼놓고 새로운 민주주로의 전환 혹은 갱신은 가능하지 않다는 강력한 사회적 요구 속에서 교육 영역에서도 기존 교육 체계를 성평등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 또한 등장했다. 2017년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 2018년 21만 명이 참여한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스쿨미투 운동은 여성‧성소수자‧청소년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체제에 도전하는 목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인권‧존엄‧평등이라는 가치를 토대로 공적 시민을 길러낸다는 근대적 공교육의 지향은 현실 정치에서 계속 거부되었다.
현재 공교육을 둘러싼 몸살은 '갈등'이 아니라 정치의 사회구조적 개혁이 지속적으로 실패해 온 결과다. 학생-학부모‧교사‧학교라는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전제로 구성된 비민주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경쟁으로 재편된 공교육의 시장화는 가속화되었다. 성소수자 존재를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추상적인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소환될 때 사회적인 제지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다움어린이책의 3대 핵심 가치로 제시된 '자기긍정, 다양성, 공존'은 교육공공성을 구성하는 원칙이라기보다 그저 좋은 말이었다. 페미니스트 페다고지가 평등한 시민, 평등한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지식이자 방법론이라는 것을 선언하지 못한 사회적 부정의 또한 누적되어 왔다.
그 실패의 자리에 보수 개신교의 혐오 정치가 쉽게 들어설 수 있었다. 여성학․종교학자 이숙진이 날카롭게 비평한 바대로 보수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 정치의 뿌리에는 "정상가족의 해체에 대한 위기의식과 정상가족 복원기획"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간 성적 동의와 자기결정권 대신 죄의식을 강조하는 성적 보수주의, 성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 대신 이분법적 남녀 구분을 강조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 친밀성과 돌봄을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실천 대신 결혼․임신․출산 중심의 이성애 정상가족 질서가 제도적으로 관철되어온 시간이기도 했다. 보수 개신교의 '가족 가치' 위기 복원 전략이 힘을 얻는 사이, 성평등‧성교육이 왜곡되거나 철회되어도 국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비정상 상태가 '정상 상태화(normalization)' 되어 왔던 것이다.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반동 속 가려진 정치의 책임
당연히 반동성애․반페미니즘 전략에 기반해 가족 가치를 복원하려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모든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민주화와 동반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거대한 불평등의 상흔을 새기며 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국가와 정치의 존재 의의를 계속 의심하게 만들었다. 대안적 사회 전망을 내놓지 못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대중의 절망과 분노는 타자화된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극우 정치의 등장은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젠더 갈등' 구도로 수렴하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성별 적대를 격화시키면서 구조적인 불평등을 외면하는 정치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중요한 건 민주주의와 평등의 정치를 무력화시는 데 앞장선 안티페미니즘 극우 정치가 다양한 집단들을 결집시키면서 확장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성학자 김보명은 이른바 '20대 남성'과 보수 개신교로 대표되는 보수우파의 정치가 안티페미니즘으로 조우하고 교차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 질서와 재생산적 '가족' 질서를 강화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정치 지형에서 보편적 권리 보장과 민주적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의 문제는 적대와 경쟁을 통해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념이나 권리를 확보하는 쟁투로 대체되기 쉽다. 서울시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에 근거해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을 발표하자 '성평등'을 "편향적 단어"로 규정하고 학생인권 반대에 나선 서울특별시교원단체총연합회의 입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서 성평등은 남녀 두 성별이 아닌 성소수자들을 포괄하는 왜곡된 개념이자 갈등적인 개념으로 등장할 뿐이다. 교육에서 성평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가 핵심이 아니라, 학생인권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교사의 권리를 저해하는 원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성평등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동원할 뿐이다.
무엇보다 주류 정치가 실질적으로는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둘러싼 적대를 적극적으로 격화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정치의 역할을 경합하는 입장들을 '민원'으로 매개하며 형식적․민주적 절차의 '조정자'로 설정한다. 여기에 공공성이나 사회정의를 실현할 정치의 책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권리와 성평등이 삭제된 배경에 대해 교육부는 "성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인 청소년기에 성소수자가 사회적 소수자의 구체적 예시로 들어갔을 때 발행할 정체성 혼란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면서 그 누구보다 젠더 갈등의 효과를 보고 있는 윤석열 정권에서 성차별과 성적 권리는 개인화되고, 보수 개신교의 전통적인 가족 가치는 정당한 아동 보호와 교육 가치로 둔갑한다. 하지만 성평등 민주주의-교육을 실현할 책임은 허공에 사라진다.
2017년 국회의원 시절 기독교 단체의 '동성애 옹호' 주장을 근거로 충남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공격적인 국정감사 질의를 했던 김태흠은 도지사가 되어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을 제한했다. 학생인권과 교권을 '학교구성원 조례'로 조화롭게 통합한다는 명분 하에 전국에서 첫 번째로 제정된 경기도학생인권조례 폐지를 기정사실화 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은 2528권의 도서 폐기에 대해 제기된 민원을 안내했을 뿐이라며 '각 학교의 자율적인 판단'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두 정치인의 행보는 단순히 보수정당 인사의 비합리적이고 안하무인격 선택이 아니다. 인권과 성평등,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와 투쟁을 권리로 보편화할 책임을 갈등으로 치환해온 정치의 문제다.
성평등-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속 성평등‧성교육 도서의 자리를
한 성교육 전문가는 '도서가 대안이자 대책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공공 영역 내 성평등‧성교육 도서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민주주의와 성평등이라는 큰 사회적 전망이 부재한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평등‧성교육 도서가 각기 개별적으로 방치된 이들에게 대안적인 전망을 얼마나 열어줄 수 있을까. 어린이‧청소년에게는 고립 대신 신뢰와 주체성을, 양육자에게는 성적 수치심 대신 성적 권리를 토론하고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교사에게 '페미냐'는 낙인 대신 자부심을 가져다줄 리 만무하다. 성평등‧성교육 도서는 도서라는 형식이 아니라 성평등 지식의 사회적 생산과 민주적 관계의 교류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교육 체계'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열람이 제한되거나 폐기된 성평등‧성교육 도서들이 다시 공공 영역에 비치되는 것은 그저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성평등 민주주의와 교육 공공성을 세우려는 투쟁 속에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보편적 권리를 무력화시키는 정치적 연합과 방관으로부터 존엄과 평등을 지키는 강력한 성평등-민주주의를 사회적 요구로 만들어가는 싸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싸움은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원칙을 폐기하거나 우회하려는 '양성 평등' 전략이 아니라, 성평등의 의미와 전망을 만들어 가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진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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