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으로 우발적 살인? '심신미약'이면 여성 살해해도 되나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양형기준 제각각…제도 개선 요구 목소리 높아져

이별을 통보하려 집으로 찾아온 애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애인의 어머니에게 중상을 입힌 26세 김레아. 그는 재판장에서 "피고인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며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관계를 요구하다 교제 3주 만에 이별을 통보받자 애인의 집 앞으로 찾아가 그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또 다른 20대 남성. 그 역시 CCTV가 없는 곳에서 흉기로 범행을 일으켰음에도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이유로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이 소식에 분통을 터뜨렸다.

피해자·전문가 "이전부터 폭력성 보인 경우 심신미약으로 형량 줄여선 안 돼"

교제 살인 가해자들 중 다수가 정신질환 병력을 근거로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음을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은 양형기준이 없어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형량이 대폭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전부터 폭력성을 보였거나 범행을 계획한 정황이 있는 경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이력이 있더라도 형량을 줄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검찰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도 숨지게 하려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6세 김레아의 신상정보를 지난 4월 22일 공개했다. 수원지검 홈페이지 갈무리

김레아 측은 18일 수원지법 형사14부(부장판사 고권홍)가 진행한 김레아의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에 대한 첫 공판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으며 계획 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씨 측은 재판부에 김레아에 대한 정신감정과 폭력성 평가 등을 신청했는데, 김레아의 변호인은 "김 씨가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았다"면서도 "어떤 내용의 치료를 받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 씨는 올해 3월 25일 그간의 폭력행위에 항의하며 이별을 통보하고자 자신의 거주지로 찾아온 애인과 그의 어머니에게 흉기를 휘둘러 애인을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최소 전치 10주의 중상을 입게 한 혐의를 받는다.

조사 결과, 그는 평소 피해자와 다투던 중 "이별을 통보하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겠다"고 말하거나, 휴대전화를 던져 망가뜨리고 주먹으로 피해자를 때리는 등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피해자는 관계 정리를 위해 어머니까지 대동했으나 끝내 사망했다.

이별을 통보받은 당일 흉기를 들고 경기 하남시에 위치한 여자친구의 거주지에 찾아가 그를 수차례 찔러 죽인 '하남 교제 살인사건' 가해자도 심신미약을 호소하고 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조현병 등 정신질환이 있었으며 당일에만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의 유족은 19일 <프레시안>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러 집 밖으로 나간 지 20분만에 벌어진 일"이라며 "흉기를 소지한 채 집 앞으로 찾아와 CCTV가 없는 곳에서 저지른 계획범죄임에도 정신질환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 살인범죄 양형기준. ⓒ대법

범행 전부터 살인을 염두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정신질환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은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없어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인정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가 공시한 살인범죄 양형기준을 보면, 알코올·약물 등의 복용에 의한 심신미약의 경우 본인이 범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견했거나 범행 후 면책 사유로 삼기 위해 자의로 만취상태에 빠졌을 때 피고인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만취 상태를 가중요소로 반영한다.

또한 가해자가 범행을 일으킬 줄 몰랐더라도 과거의 경험과 당시의 정황 등에 비추어 만취상태에 빠지면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경우 범행 당시 가해자의 상태와 무관하게 심신미약을 감경 사유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 모두 포함되지 않더라도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라 아니라고 판단되면 만취상태로 감경받을 수 없다.

이와 달리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은 구체적인 양형 기준이 명시돼 있지 않다. 과거 판례와 가해자에 대한 정신감정서 등을 참고하더라도 재판부에 따라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이 나오는 이유다.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당시 편의점 내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화면 갈무리. ⓒ연합뉴스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20대 남성 A씨는 지난해 11월 '머리가 짧으니 페미니스트', '나는 남성연대인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며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20대 여성 B씨를 폭행했다. 그를 말리던 50대 남성도 폭행에 휘말려 골절상을 입었다. A씨의 가족들은 방송 인터뷰를 통해 그가 전부터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기반한 증오범죄라고 규정한 검찰과 달리, 재판부는 가해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범죄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지난 4월 창원지법 진주지청 형사2부(곽금희 부장검사)는 A씨가 과거 양극성 정동장애를 진단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력이 있고, 국립법무병원과 대검찰청이 실시한 정신감정을 보면 그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검찰이 구형한 징역 5년보다 2년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이 같은 판결에 불복해 즉각 항소했다. B씨 또한 18일 X(옛 트위터)를 통해 "사건 당시 가해자는 무자비한 폭행을 휘두르다 경찰이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모든 언동을 멈췄다"며 "경찰과 검찰 조사 중에도 가해자는 여러 차례 일관되게 여성혐오적 범행 동기를 진술했는데 이것이 가중처벌 되기는커녕 도리어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는 상황을 결코 납득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진주 편의점 폭행' 피해자가 18일 X(옛 트위터)에 올린 게시물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로 피해자가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가해자가 과거 정신질환이 있었거나 범행 당시 정신질환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됐는지 엄격히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폭력 관련 조사를 담당하는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이날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신질환에 의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가해자들은, 왜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동료나 동네 이웃이 아닌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나 머리가 짧은 여성을 특정해서 범행을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사법부가 가해자의 변명을 쉽게 받아들여 감형해 준 사례들이 쌓여 지금 가해자들의 태도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제 살인과 여성 대상 범죄로 희생당하는 피해자들이 재판부에 의해 또다시 상처를 입지 않도록, "감형을 받기 위해 심신미약을 주장한다고 판단될 경우 이를 가중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와 더불어 재판부가 해당 범죄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추게 하거나 전담 재판부를 신설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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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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