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10대 초반의 어린학생들은 왜 '동맹휴교'에 나섰나

[주산보통학교 동맹휴교①] 조선인 차별·일본인 교사들의 폭행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전북자치도 부안군 주산면의 주산초등학교. 1924년 54명이 입학하면서 문을 연 주산공립보통학교는 한때 학생수가 2000명에 육박하는 지역의 거점학교였으나 농어촌지역 거주인구 감소와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2024년 현재 9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소규모학교가 되었다. 그나마 주산면에서는 유일한 학교다. 개교 100주년을 앞둔 이 학교가 특별히 관심을 받는 것은 1926년, 개교 3년차에 발생했던 학생들의 '동맹휴교(同盟休校)사건' 때문이다.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이 그해 6월부터 7월 사이에 세 차례나 집단적으로 등교를 거부했던 이 사건은 지역사회와 교육계 등에 적지 않은 파장이 미쳤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전말이 규명되지 못한 채 후손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전설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프레시안> 전북취재본부는 당시의 기록과 후손들의 증언, 지역 주민들의 구술 등을 토대로 동맹휴교 사건을 재조명하고, 98년이 지난 오늘날 왜 그들의 동맹휴교와 같은 의거가 기억돼야 하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산공립보통학교의 동맹휴교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부안지역의 근현대 교육사를 탐구해 오던 조봉오씨(전 교사, 부안 인터넷신문 발행인)의 공이 컸다.

지역주민들 사이에 희미하게 구전되어 왔던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추적하던 조봉오씨는 국가기록원에 보관중인 자료 가운데 '주산보통학교 연혁지'와 당시 학생들의 학적부를 통해 이같은 사실의 일단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주산초등학교 연혁지 가운데 동맹휴교관련 부분 ⓒ

문서보존 연한이 '영구(永久)'로 분류된 <주산보통학교 연혁지>에 따르면 주요사건 항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1926. 6~7: 3회에 걸쳐 學生 同盟休校(학생 동맹휴교) 있음. 當時 敎長(당시 교장) 小川傳三郞氏는 參加 兒童(참가 아동) 南宮珍(남궁진) 외 35명 中 無期停學(무기정학) 處分者(처분자) 五名, 其他 二十三日間(23일간)의 有期停學 處分(유기정학 처분)'

매우 건조하게 기록된 이 내용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추적하다보면 주산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 사건을 둘러싼 실로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시대상황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주산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교에 나섰던 당시의 전후 사정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920년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식민지 조선의 상황

1920년대의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한 뒤 10여년이 흐르면서 '3.1만세운동'과 같은 민족적 저항을 겪고 문화통치로 전환을 꾀하던 시대였다.

문화통치는 조선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2차례 조선총독 역임, 1919~27, 1929~31)가 오면서 그 동안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의 한계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문화통치의 가장 큰 특징은 종전의 헌병경찰제가 보통경찰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동안은 헌병이 군사업무와 민간인을 상대로 한 경찰업무까지 겸했다면 이후로는 경찰 업무와 군사 업무가 분리된 것이다.

또한 언론과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일부 허용되면서 조선어 신문인 '동아일보'나 '조선 일보' 등이 발간되기 시작하고 여러 사회단체가 앞다투어 결성을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한국인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어 학교 설립이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일부이긴 하지만 주민자치라는 이름의 민의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이 달랐다. 종전에 비해 경찰의 수는 세 배 가까이 늘었고 신문에 대한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교육이 확대되었다고는 하나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국한되었고 고등교육의 기회는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거리가 멀었다.

지방자치는 허울 뿐으로 의결권이 없는 허수아비 조직이었고 그나마 친일적인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조선민족은 열등하다'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강요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일본 내부의 급격한 공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급증한데 따른 식량 부족이 대규모 '쌀 소동'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쌀을 빼내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소위 '조선산미증식계획요령'이라는 이름의 쌀 공출은 제1차 (1920~1925)와 제2차(1926~1934)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토지개량사업과 농지 개량, 농업에 대한 투자 등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이 때부터 일본의 자본이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흘러들어오면서 식민지 자본주의의 기초가 놓여졌고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에서 모순이 극심해지며 노동운동이 점차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건과 상황이 서로 맞물려 주산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안에서 배우던 조선의 어린학생들까지도 시대적 모순에 눈을 뜨면서 급기야 주산보통학교 생도들의 역사적인 '동맹휴교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926년 초여름 주산보통학교 학생들의 움직임

동맹휴교 사건이 발생했던 1926년 당시로 돌아가 본다.

이 때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강압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뀐 뒤 매우 유화적인 정책들이 시행되던 때다.

언론과 집회, 결사가 형식적으로나마 보장이 되어 다양한 민중운동이 전개되던 때였고 청년단체와 노동조합의 움직임 또한 매우 활발했던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모욕, 조선 민족성에 대한 폄훼, 학생들에 대한 교사들의 폭압적인 태도와 체벌 등이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실제로 앞서 1924년 2월에 고창공립보통학교에서는 사립 암치보통학교(고창군 성송면)에서 쫓겨난 교원 우에하라 도쿠신(上原篤信·42)이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생도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부정한 행위가 많다 하여 학생들이 일시 맹휴에 나섰다. 이후 학부형들이 긴급회의를 거쳐 우에하라의 해임을 군청과 도청에 건의했다는 내용이 당시 신문에 보도됐다.

또 같은 해 6월에는 고창흥덕공립보통학교에서 2학년생 최예기가 소학교 소유림에서 국기를 매달기 위한 나뭇가지 하나를 벌취하려다 교장 시노자키 스케다(篠崎助太郞)에게 맞아 중상을 당한 사건에 분개해 동맹 휴교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사례가 일본인 교사들의 폭압적인 행태로 빚어진 감정적 동맹휴교 사건이라면 주산보통학교의 동맹휴교는 보다 중층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종황제 장례행렬. ⓒ
▲순종황제 장례행렬. ⓒ

주산보통학교의 동맹휴교가 발생한 시기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사망과 그에 따른 장례였다.

나라를 잃은 민중들은 비록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지만, 그에 대한 애증과 울분이 '6.10만세운동'으로 분출되었다.

또 하나는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 독서회와 야간학교가 활발하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부안에서는 백산면과 인근 신태인 화호리 등에서 독서회가 조직되고 야간학교를 통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이 일간지에 보도되고 있다.

청년들은 일제에 압박속에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나름의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선배들을 보면서 자란 주산보통학교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본받아 뒤를 좇는 형태가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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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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