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운동, 영성 있는 새로운 길 찾기

[복지국가SOCIETY] 한국 진보 운동, 새로운 영성을 찾을

지난 5월 19일 일요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44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주간에 빛고을 광주에서 '일하는 예수회' 정기총회와 모임이 열렸다. 일하는 예수회가 광주에 모인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우리 모임은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위한 교회운동이었던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해 왔던 목회자들의 모임이다. 민중교회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서 큰 영향을 받아 시작됐다.

한국민중항쟁의 고유성은 종교적 열정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오후에 떠났다가 밤차로 돌아오는 일정을 잡고 광주로 향했다. 프로그램을 보니 주제 강사가 김상봉 교수였고, 본인의 저서인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한다고 했다. 사실 그 글은 김 교수가 지난 10월 경남대 K-민주주의연구소 학술심포지엄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논문으로 발표되었을 때, 어느 분이 카톡에 올려준 원고를 보고 프린트하여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언젠가 깊이 있게 논의해 볼 기회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터여서 반가웠다. 고속버스로 내려가는 중에 2년 전 광주다일교회에서 열린 종교개혁기념 강연회에서 '교회, 정치를 말하다'는 강연을 유튜브로 들으며 내려갔다. 2시간 30분 가까이 강의와 질의응답이 진행된 내용을 통해 강사의 주된 관심과 강조점을 미리 맛볼 수 있었다.

광주에 도착해 약속된 식당에서 김상봉 교수를 직접 대면하여 처음으로 인사했다. 모임 장소인 5.18교육장에서 강의 전 대화하다 보니,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학번에 기독학생회(SCA)와 기독청년회(EYC) 활동을 한 것을 알고 정말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알고 보니 내 고교동기와 대학 동기임을 알았다. 한 다리 건너는 친구가 되기에 더 반가웠다.

김 교수는 책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자신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결부하여 담담하게 알려주었는데, 너무나도 공감이 가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 것과 같은 통찰력을 얻었다. 본인이 십수 년 전 광주에 내려와 연구하게 된 5.18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민중항쟁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이를 점차 한국의 근대 민중항쟁 역사(부마항쟁, 전태일 열사의 분신, 4.19혁명, 4.3제주민중항쟁, 동학혁명)로 확장해서 살펴보니 ‘한국민중항쟁의 고유성이 종교적 열정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믿음이 새로운 윤리와 실천을 낳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수운 최제우가 시작한 동학에서 이를 잘 볼 수가 있다. 영성이란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이웃에게 확대하여 하나됨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바로 종교적 열정이 바탕이 되어 영성에 기초한 사랑으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 운동, 왜 힘을 잃어가고 있나?

하지만 무신론적 사회과학에 기초한 세속적 운동은 이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하여 점차 메말라지고 권력투쟁에 매몰된다. 영원한 진리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어서 보편적 지지와 지속가능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진보적 영성은 종교 간의 차이도 뛰어넘는다. 김 교수는 유교에 영향받은 최제우, 천주교에 영향받은 안중근, 불교에 영향받은 만해 한용운, 그리고 기독교에 영향받은 전태일의 영성이 일맥상통한다고 보며, 이들의 영성은 종교를 뛰어넘어 하나의 깊은 영성을 나타내 준다고 강조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백할 때, 한국인들은 최제우의 하나님(상제), 한용운의 하나님(님), 전태일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의를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이 났다. 하나는 민중교회를 하면서 우리가 많이 하던 이야기라는 점이다. 지역주민들이 민중교회의 탁아소(어린이집)나 공부방(지역아동센터)과 같은 프로그램에는 참여하면서도 왜 교인으로는 나오지 않을까? 이를 좀 더 확대하면 가톨릭이 주류이고 해방신학의 본거지라고 할 라틴아메리카에서 보수적인 성령 운동 개신교가 판치는 것은 무슨 현상일까? 앞에서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이 영성보다는 사회과학적인 운동론에 매몰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나 자신을 비롯한 민중교회 동역자들이 본래 출발한 종교적 영성을 소홀히 하고 사회과학이나 세속적 운동론에 경도되어 한계를 보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태일 열사. ⓒ전태일기념관

사실 80, 90년대 기독교 운동에서도 일반운동론과 기독운동론의 조화를 위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조화를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도 했지만 점차 종교적 열정에 소홀하게 되었고, 결국은 기독교 운동의 고유성보다는 일반운동의 보조적 운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동안 교회 목회보다도 마을 운동과 교육 운동을 통한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에 참여하면서 내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교회의 소중함이다. 마을에 들어가 보니 교회에서와 같은 종합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사실 교회에서는 좋은 설교를 듣고, 성가대에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고,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교인 간의 친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인적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마을에는 그러한 전인적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교회적 훈련방식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김 교수의 핵심적 주장과 연결해 보면 모든 사회운동이 기본적으로 종교적 영성에 기초해야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일하는 예수회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기독교 중심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김 교수의 본래 주장은 진보 운동 일반에 관한 것이다. 지난해 발표한 논문 제목은 바로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였다. 김 교수는 한국민주주의의 위기, 특별히 진보의 위기를 영성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과거 진보신당에 합류해 강령 기초 작업을 한 바 있다. 그런 경험을 포함해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진보 정치를 겪으며 '영성의 부재'가 진보 정치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영성과 함께 했던 우리의 사회 운동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영성, 좁혀서 말하면 '종교적 영성'이 이끌어 온 역사이다. 19세기 말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영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쟁이었고, 3·1운동도 믿음 깊은 종교인들이 대표로 참여해 이끈 거족적 항쟁이었다. "19세기 이래 다른 나라에서는 진보적 정치 행위가 세속주의에 의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 운동의 토양이 됐던 것"이야말로 한국 근현대민중운동사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러한 종교적 영성으로 일한 대표적인 두 사람을 저자는 전태일과 서준식으로 예를 든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신의 한쪽 눈을 팔아 착취 없는 작업장을 세우려 했고, 그 꿈이 좌절당하자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으로써 그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서준식은 19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영성이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던 서준식은 옥중에서 기독교 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를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해방을 바라는 자"의 모범으로 발견한다. 그는 "유물론적 영성"의 전범이 되었다. 그런데 1980년 이후 진보 운동은 이러한 전태일과 서준식이 걸었던 영성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리어 목적이 선하다는 확신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무차별하게 정당화하는 가치 전도에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 한국의 진보 정치는 영성을 잃어버리고 권력투쟁에 함몰하고 말았다. 이제 이러한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는 영성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김 교수의 개인적 결심과 같이 믿음의 회복이 필요한 시대요, 교회나 사회적으로 새로운 믿음, 새로운 케리그마(설교)가 필요한 시대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운동이나 민중교회가 일반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교회가 가장 사회적 지체그룹으로 치부되지만, 우리가 가진 민중 영성에 기초한 새로운 믿음을 회복한다면 막힌 사회운동을 뚫어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다 보니 3시간 30분이나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 몇 시간 보내고 심야버스로 인천으로 돌아오면서도 마음이 충만하다. 강의를 통해 얻은 새로운 통찰력이 내 개인과 일하는 예수회, 나아가 한국진보정치의 새로운 비전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영철 마을대학협동조합전국연합회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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