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진보'가 잡초 몇 뿌리도 안 뽑는다며 안타까워했던 분이 떠났다

[기고]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을 추모하며

홍세화 선생은 조용한 성품이나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원칙적인 분이었다. 운동에 대해서는 더 분명했다. 운동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늘 확인하려고 했다. 운동은 가치를 지향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생각만이 아니라, 늘 그런 방향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를테면 홍세화 선생이 자주 썼던 어법을 빌리면,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잡초를 없애는 궁리에는 열심이지만, 실제로 다만 몇 뿌리라도 잡초를 뽑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그렇다. 운동하는 사람들, 게다가 제법 이름도 있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패러다임 전환’을 자주 이야기한다. 87년 체제를 종식시키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자는 거다. 문제는 대체로 거기서 맴돌 뿐이다. 운동은 부단 없는 실천이어야 하지만, 대개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실천에는 별 관심조차 없다.

홍세화 선생도 물론 패러다임 전환이니 신자유주의 극복이니 하는 숙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보였고, 현상을 바꿀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진보 인사들과 사뭇 달랐던 것은 작더라도 구체적인 실천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다.

회사를 그만두고 소득이 없을 때는 할 수 없었지만, 책으로 얼마간 돈도 벌고 회사에서 월급도 받을 때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곳에 후원금을 냈다. 다만 1만원이라도 혹시라도 홍세화라는 이름이 도움이 된다면, 또는 홍세화의 마음이 도움이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았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으면 당장 일을 풀어가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자생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정부나 기업이 돈줄을 막아 버리면 지속가능한 운동은 물론, 운동단체와 활동가들의 생존마저 위협받게 된다. 세상에 공돈은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홍세화 선생이 했던 몇가지 실천활동은 운동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운동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웅변과도 같았다.

홍 선생은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을 지낸 김희중 대주교와 함께 [오월걸상위원회] 공동대표였다. 두 분은 모두 1980년 5월 광주에서 참극이 벌어질 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원통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어쩌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을 거다. 학살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몸부림쳤지만, 멀리 떨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것은 응어리가 되었다. 마음의 빚이었다.

두 분만은 아닐 거다. 많은 사람이 광주 5.18에 빚지고 있고 또 기대고 있다. 윤석열 정권 들어 많이 퇴색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광주의 희생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광주 5.18은 유감스럽게도 광주라는 지역과 1980년이라는 시간에 묶어 있었다. 광주에는 5,18을 기억하는 공간과 조형물도 많지만, 광주를 벗어난 어떤 곳도 5.18을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홍세화 선생은 김희중 대주교와 함께 광주 5.18을 전국화하고 현재화하기 위해 나섰다. 바로 '오월걸상' 건립 활동이었다. 부산 롯데백화점 부근에 제1호 걸상을 세운데 이어, 전남 목포역광장(제2호), 서울 명동성당 앞(제3호),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앞(제4호), 경기도청 앞(제5호), 제주 서귀포시청 앞(제6호), 광주광역시 광산문화예술회관 앞(제7호, 제주 4.3을 함께 기억하는 걸상)까지 모두 일곱 곳에 5.18 기념 조형물을 세웠다. 다음 16일에는 국토최북단 강원도 고성군에 제8호 오월걸상을 세울 예정이다.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오월걸상 제막식에서 홍세화 오월걸상 위원회 대표(가운데)와 서양호 중구청장, 이철우 5·18재단 이사장이 걸상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월 걸상'은 1980년 5·18 정신을 기억하고자 일반 시민들을 위해 건립된 조형물이다. ⓒ연합뉴스

보통의 조형물과 달리, 오월걸상은 누구나 앉아서 편히 쉴 수 있게 만들었다. 5.18을 기억하는 걸상이라는 것을 빼고는 전국의 오월걸상은 모두 다른 작가가 다른 방식으로 제작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정형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게다가 보통의 조형물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조형물을 세운 사람이 누군지, 도움을 주거나 돈을 낸 사람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았다. 걸상에는 다만 '오월걸상 1980년 5월 18일 - 27일'이라는 글귀만 새겼다. 기성의 문법에서 벗어나면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아우성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오월걸상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었다. 정부나 기업에게 돈을 구하지도 않았다. 홍세화식 운동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이름을 남기는 식의 헛된 운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묻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운동,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운동이었다.

오월걸상은 일 년에 한두 개쯤 되는 조형물을 만드는 활동이라 큰돈이 들지 않았지만, 장발장은행은 달랐다.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인 가난한 시민에게 돈을 꿔주기 위해 만들었다. 빌려줄 돈을 만드는 일부터, 빌려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화답하는 일까지 번거로운 일이 많았다. 장발장은행은 그저 사람의 말과 마음만 믿고 무담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홍세화 선생이 스스로 택한 마지막 직함 '장발장은행장'이었다. 돈도 없는 사람이 은행장까지 하게 되었다며 웃으면 말하곤 하면서도 선생은 장발장은행 일에 열심이었다. 후원자를 모으는 일부터, 장발장은행을 왜 만들었고, 하려는 일이 뭔지를 설명하는 일까지 모두 열심이었다.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21년 한 해 동안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힌 사람은 2만1000명 남짓이었다. 죗값을 치르는 게 맞겠지만,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19년에나 감옥에 갇혀야 하는 과잉형벌은 <레미제라블> 같은 소설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엄연했다.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잘못을 저질렀거나 범죄라고 부르기도 부족한 기초질서 위반행위를 했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벌금을 내지 못했다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국가형벌권 행사가 최소한의 공정과 상식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5월부터 대통령 노릇을 했던 2022년에는 2만5000여명으로 늘었다가, 온전히 윤석열 정권 시절이던 2023년에는 무려 5만여명으로 두 배나 늘었다.

위험한 범죄자거나 죄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오로지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는 사람이 매년 5만 명이나 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가난히 죄가 되고, 마침내 가난이 감옥에 갇혀야 할 까닭이 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홍세화 선생은 이런 상황을 확인하고는 두 가지 축으로 인권투쟁을 진행했다. 하나는 벌금제 자체를 개혁하는 거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이 그렇게 하듯, 벌금도 재산과 소득에 비례해서 맞춤하게 내자는 거다. 지금은 소득과 재산을 따지지 않고 똑같은 액수의 벌금을 내게 한다. 부자에게는 유리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불리한 제도다.

법이 공평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홍세화식 운동은 법이 어떻게 해야 공평한지를 고민하고 가난한 시민만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에게 꼭 필요한 제도를 설계하면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해나가자는 거다. 핀란드의 경우 192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재산·소득 비례 벌금제'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운동 목표일뿐이다. 송구하게도 홍 선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평한 형벌을 위한 제도 개혁은 그저 숙제로 남아 있다.

운동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운동을 통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고, 운동의 성과가 어떤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하면서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곧 그만큼 각박하고 살기 힘든 사회이기에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홍세화 선생은 법과 제도의 개혁에만 골몰하지 않았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제도 개혁을 이뤄내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당장의 고통과 연대라도 해보자는 게 장발장은행 설립으로 이어졌다. 연대의 방법은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거다. 은행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담아 장발장은행은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원칙으로 정했다. 신용평가 따위는 하지 않고, 돈이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따져보기로 했다. 어린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나 아빠, 어르신을 혼자서 부양해야 하는 경우는 우선적으로 장발장은행의 대출 대상자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감옥을 경험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물론 사회 전체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홍세화 선생이 생각하는 운동은 이런 점에서 '고통과의 연대'이기도 했다.

장발장은행을 만들던 2015년 2월. 우리들의 홍세화 선생을 은행장으로 모시자는 결의 말고는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다. 늘 그렇듯, 돈도 없었고 장발장은행 업무를 감당할 인력도 없었다. 겨우 구체적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돈 1000만 원만 모이면 바로 대출을 시작해보자는 소박한 생각을 했다. 다행이 우리 사회에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것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9년 동안 23억 원 정도를 융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감옥행을 막을 수 있었다. 정부와 기업에서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도 꽤 있었지만, 홍세화식 운동은 그런 돈은 정중히 사양하는 원칙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도 꽤 큰 상금이 걸린 상을 주겠다는 고마운 제안을 받았지만, 고심 끝에 사양했다. 상금으로 받은 돈을 장발장은행이 쓰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운동은 늘 그런 실용주의와 원칙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필요로 했다. 기회가 있었지만 여러 번 큰돈을 사양했다. 운동의 자존심, 운동의 정체성을 지키며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장발장은행 대출을 해주지 못한 적은 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마치 화수분처럼 돈이 떨어지면, 누군가는 그만큼 채워주는 것 같았다.

장발장은행은 시작부터 하루빨리 문을 닫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재산·소득 비례 벌금제'를 도입하고, 감옥행 대신 사회봉사제도를 활용하면 장발장은행 문을 닫을 수 있으니, 빨리 문을 닫게 해달라고 정부와 의회에 호소했다. 우리도 장발장은행을 십년 가까이 운영하게 될지 몰랐다. 민주진보세력이 의회에서 다수당인 적도 많았고, 심지어 '재산·소득 비례 벌금제'에다 '장발장은행 지원'까지 공약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도 했지만, 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좌절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꾸준한 실천도 멈추지 않았다.

▲ 장발장은행 홍세화 은행장이 2015년 당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장발장은행 주최로 열린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받고도 벌금을 낼 돈이 없어 교도소를 선택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담보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은행이다. ⓒ연합뉴

홍세화 선생은 마지막까지 노동당 고문이었고 예전엔 진보신당 대표도 지낸 다분히 원칙적인 진보운동가였지만, 이재명 경기도지사 시절엔 '경기도 인권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비상근 무보수로 일했으니, 오해 없길 바란다.) 소속 정당이 다르고, 지향하는 이념이 다르더라도 인권당사자, 인권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선 얼마든지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실용주의적 면모도 적지 않았다. 이런 면모는 무엇을 위한 이념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려는 진보정당인지를 되묻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을 거다.

홍세화 선생은 인권연대의 가장 든든한 회원이었다. 인권연대의 크고 작은 행사에 빠지지 않았고, 각종 강좌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보통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의 근사한 발언엔 익숙하지만, 여럿 중의 하나로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게 고작인 역할에 곁을 내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홍 선생은 달랐다. 운동의 기본인 "학습하고 조직한다"는 원칙을 일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임이나 강좌 다음에 이어지는 뒤풀이에도 빠지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후배들의 우스갯소리나 묵묵히 듣고 있는 모습은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옆에 있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하는 마음이 담긴 웅변처럼 보였다.

지난 11월 동료들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를 거쳐 속초까지 오가는 늦가을 여행은 홍세화 선생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지난해 5월에는 제주 출장도 함께 했다. 모시고 놀러 다닌 적도 많고, 기껏해야 평양냉면 수준이지만 이런저런 맛집을 찾아다닌 적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받았던 사랑과 성원도 크기만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고도 치열한 운동가였던 홍세화 선생을 개인적인 추억이나 소회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선생을 보내드리는 이 순간, 문득 기독교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예수는 마태오 복음 5장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同態復讐)를 넘어서라고 주문한다. 사실 동태복수도 인권보장과 정의실현을 위해 필요할 때도 많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에게 천백배의 복수를 하겠다며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그저 동태복수에서만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하지만 예수는 훨씬 더 나간다. 예수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며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며 폭력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단지 폭력을 포기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 믿어 천국가자는 주술만 요란할 뿐, 예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나 교역자 중에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세화 선생은 예수를 좋아했지만,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누군가 다만 몇 걸음이라도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내치지 않았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았다. 특히 무언가 달라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약자나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귀한 분을 잃었다.

▲ 홍세화 선생.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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