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쟁 이후 처음 이스라엘 "정책 변화" 언급…라파 진격 막을까

이스라엘, 즉각 구호 통로 추가 개방…미국 무기 지원 중지 여부 관건

미국인을 포함한 구호단체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IDF) 공격으로 숨진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 보호를 촉구하며 가자지구 전쟁 발발 뒤 처음으로 이스라엘 지원에 조건을 내걸었다. 다만 이스라엘이 달성해야 할 구체적 조건과 무기 지원 제한 등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4일(이하 현지시간) 미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에서 "인도주의 활동가들에 대한 공격과 전반적인 인도주의적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며 "이스라엘이 민간인 피해, 인도주의적 고통, 구호 활동가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주목할 만한 조치들을 발표하고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통화에서 "가자지구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즉각적 행동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못박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가자지구 전쟁 발발 뒤 이스라엘 지원에 조건을 내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통화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보호하고 인도적 상황을 개선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선 즉각적 휴전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관련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보고 싶어 하는 변화 중엔 "인도적 지원의 극적인 증가, (구호품 반입 통로인) 추가 검문소 개방, 민간인에 대한 폭력 감소"가 포함된다며 미국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조치를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하고 "구현"하는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그쪽(이스라엘)에서 변화가 없다면 우리 쪽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정책에 이스라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 지원이 포함돼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정책에 관해 이스라엘 쪽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엄포에 이스라엘 쪽은 즉각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 통로를 추가로 열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바이든 대통령과 통화 뒤 이스라엘 총리실이 5일 오전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 북부로 연결되는 에레즈 검문소 재개방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에레즈 검문소 개방은 지난해 10월7일 가자지구 전쟁 발발 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한 이래 처음이다. 현재 육상 인도적 지원 통로로 가자지구 남부 라파 검문소와 케렘 샬롬 검문소만 열려 있는 상태로 이곳을 통과한 구호 트럭의 가자지구 북부 도달이 이스라엘의 검문, 치안 악화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인도주의 물품 수송을 위해 에레즈 검문소에서 북쪽으로 30km 가량 떨어진 지중해와 접한 이스라엘 서부 아슈도드 항구를 임시 개방할 예정이다. 또 기존에 개방한 케렘 샬롬 검문소를 통한 요르단으로부터의 구호품 전달 규모도 늘릴 방침이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번 구호 증가는 인도적 위기를 방지할 것"이라며 "이는 전투 지속을 보장하고 전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백악관은 즉시 "환영"했다. 에이드리엔 왓슨 NSC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의 통화 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가 발표한 조치들을 환영한다"며 "가자지구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무고한 민간인 및 구호 활동가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포함해 이스라엘의 이러한 조치와 다른 조치에 관한 즉각적 행동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통해 결정될 것"이라고 재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일 국제구호단체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7명이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된 뒤 "분노"를 표명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수사를 강화했다. 사망한 활동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미국인, 영국인 등 비팔레스타인인들이었다. 미 존스홉킨스대 중동 전문가 로라 블루멘펠트는 <로이터> 통신에 이스라엘군의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공격은 바이든 대통령을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게 한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평가했다.

지난 2일 대선 경합주인 위스콘신주 민주당 예비선거(프라이머리)에서 바이든 정부의 가자지구 정책에 항의하는 '지지후보 없음' 표가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전 대통령의 표차의 2배에 달하는 등 11월 대선을 앞두고 항의 민심이 확산하는 것도 이번 이스라엘에 대한 조건부 지원 발언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민주당 내부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의 가자지구 정책 변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최측근인 크리스 쿤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4일 미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피난민이 몰려 있는 가자지구 남부 라파 전면 침공과 이스라엘에 대한 조건부 지원을 연결시켰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가 이스라엘군에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 대한 대규모 진격 명령을 내리고 1천 파운드짜리 폭탄을 투하하고 대대를 보내 하마스를 쫓고 민간인이나 인도적 활동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조건부 지원에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 잰 샤코우스키 민주당 하원의원과 짐 맥거번 민주당 하원의원이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사망과 관련한 조사가 완료되고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책임을 질 때까지 이스라엘에 공격용 무기 이전을 보류해야 한다고 백악관에 촉구하는 서한을 회람 중이라고 보도했다. 서한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민간인 피해를 충분히 완화하지 못할 경우에도 무기 이전을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관건은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 지원 제한까지 고려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워싱턴포스트>는 4일 바이든 정부가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폭격 발생 당일에도 이스라엘에 500파운드(약 227kg) MK82 폭탄 1000개 이상과 소구경 폭탄 1000개를 포함한 약 2000개의 폭탄 이전을 승인했다고 세 명의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으로 바이든 대통령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고 보면서도 무기 이전 보류까지 나아갈지에 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 싱크탱크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 데니스 로스 고문은 "바이든 대통령이 사실상 인도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군사적) 지원을 조건부로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은 미 MS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라파 침공을 "레드 라인"으로 설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아이언 돔(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없앨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차단하는 레드라인은 없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공격 무기 이전 중단은 열어 놓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로이터>에 따르면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의 마이크 싱 국장은 조건부 무기 이전이 "의회에서 거센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고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나 다른 이란 대리 세력들의 공격에 이스라엘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며 미국이 안보리 결의안 협상 수준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조나단 파니코프 전 미 국가정보국 중동 담당 부국장도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고가 무기 판매를 중지하거나 유엔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저버리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하진 않을 것으로 봤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이 더 작은 군사 품목에 조건을 내걸거나 서안지구 극단주의 유대인 정착민에 대한 추가 조치를 취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조건부 지원을 천명하며 이스라엘에 어느 정도 수준의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민간인 보호와 인도적 지원 확대, 라파 침공 반대, 즉각 휴전을 촉구해 왔다. 해당 조건을 모두 달성하는 것을 요구할지 아니면 에레즈 검문소 개방 등 네타냐후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과 통화 뒤 즉시 취한 일부 조치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현 상황을 유지할지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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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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