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된 한중관계로 미래를 대비하는 씨앗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한중관계는 유구한 역사처럼 냉탕과 온탕을 반복해왔다. 전근대 한중관계를 논하기 앞서, 근대 이후 한중관계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한중관계의 온도가 급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한국전쟁 이후 차갑게 식었던 한중관계는 1992년 8월 27일 한중 국교 수립을 계기로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한중 국교수립은 국내 기업에게 중국이라는 큰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아, 롯데 등 국내 대기업의 성공 신화와 더불어 관련 산업뿐만 아니라 중국어 교육도 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한중관계의 온탕은 오래가지 않아 점차 식어갔다. 가령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알려지면서 국내에 반중 감정이 고조되었다.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의 고대사를 중국의 지방정부로 치부하여 전 국민의 공분을 샀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이 출범하기도 하였다.
한중관계 경색을 더욱 심화시킨 사건은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에 대한 반발로 시행된 중국의 한한령이었다. 중국의 한한령이 본격화됨에 따라 삼성, 현대 등 국내 주요 기업은 중국내 사업이 어려워졌고, 롯데는 사실상 철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중국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중국 관련 산업도 축소되었으며, 대중국 전문가를 양성하는 초석인 중국어 교육 열기도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중국어 관련 학원은 물론, 상당수 대학은 중국 관련 학과를 통폐합 하거나 규모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온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시장 논리에 따른 대중국(對中國) 전문가를 양성의 소홀은 여러 우려 점을 자아낸다.
조선, 경색된 한중관계 속에서도 지속한 중국어 교육과 대중국 외교관 양성 시도
경색된 한중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과거에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조선은 오랜 기간 중국(명, 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조선 역시 5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였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중국)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외교적 단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명나라 건국자 주원장은 조선이 역성혁명을 통해 세워졌다는 점에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따라서 조선의 건국을 쉽게 용인하지 않았고, 심지어 조선 사신의 입국까지 금지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조선은 중국과의 지속적인 단절을 선택하지 않고, 향후 외교 관계 개선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그 대표적 노력이 바로 1393(태조 2년) 조선의 사역원 건립과 대중국(對中國) 전문가 양성이었다.
조선은 사역원에 크게 4가지 학문 분과(한학, 몽학, 외학, 여진학)를 개설해 전문 외교관(역관)을 양성하였다. 사역원에 입학하는 학생(생도)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었으며, 총 정원은 80명 정도였다. 사역원은 중국 전문가만을 양성하는 기관은 아니었으나, 분과 가운데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학(漢學)의 정원이 약 35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교수진 역시 네 명 중 세 명이 한학 담당, 나머지 한 명이 몽학담당이었는데, 이후에는 이 한 명 마저 한학 교수로 전환되었다.
즉, 사역원의 인력구조와 학생 비중은 조선이 경색된 한중관계 개선을 위해 대중(對中) 외교를 담당할 외교관(역관) 양성에 상당한 노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사역원의 중국어 교육 방법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 난이도가 더욱 높아져,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제2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유년기부터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유년기 외국어 교육은 현대 사회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도 장차 외교관(역관)이 될 학생들을 어릴 때부터 선발해 교육하는 조기교육 제도가 시행되었다. 조선은 어린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정확한 중국어 발음을 익히도록 전문 교재를 편찬·배포하였다.
조선은 현지에 어학연수를 보내기도 했다.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가 다소 회복된 이후에도 명은 조선의 공식적인 유학생 파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1433년(세종 15) 조선 조정은 인재를 명에 파견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명 선덕제가 이를 거절하면서 세종의 조기교육 및 현지 어학연수 계획은 모두 무산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러한 불리한 대외 환경에도 불구하고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 양성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즉, 공식적인 유학생 파견은 무산되었지만, 학생(생도)들을 사행단(명나라에 보내는 정기적 사절단)에 포함시켜 짧은 기간이나마 현지에서 어학연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외국어를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기교육을 실시하고, 현지 경험과 학습 과정에서 원어민과 유사한 발음을 구사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외국어 교육 방법은 조선시대에도 유사하게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가 늘지 않는 사례를 살펴보면, 대다수는 외국에서도 모국어를 주로 사용하며 기존 모국어 중심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주된 문제였다. 조선 조정 역시 사역원 학생(생도)들이 오랜 기간 중국어를 학습했음에도 제대로 된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원내 모국어 사용 금지라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였다. 즉,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중국어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기술에 그치지 않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와 사람을 아우르는 문화를 배우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언어 구사를 위해서는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언어는 사회의 문화 변화에 맞춰 함께 변화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언어와 문화를 떼어놓기 어렵다. 현대 외국어 교육에서도 일상용어를 배우는 텍스트 속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조선의 사역원 역시 원어민을 채용하여 회화를 강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의 경서와 역사서를 함께 강독하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한중관계가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는 가운데서도 중국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사역원 설립과 대중국(對中國) 전문가 양성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외교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분야이며, 현대 사회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한중관계가 경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미래를 위한 대비를 등한시하면, 향후 새로운 대외적 변수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부족해질 수 있다.
본고에서 소개한 조선의 선례를 귀감 삼아, 우리도 중국에 대한 혐오와 갈등 조장만이 능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국익에 기반한 외교적 대응 방안을 고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향후에도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분야의 대중국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양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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