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하다 붙잡힌 미 폭격기 승무원들은 생체해부 당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5]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⑭

미국 포로가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죽음을 맞이했는가는 논란거리다. 일본이 저질렀던 생체실험의 희생자들 가운데 조선 독립운동가와 러시아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731부대는 만주 선양(瀋陽, 奉天)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2000명가량의 포로 가운데 일부에게 '세균무기에 백인 특유의 면역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생체실험을 했다(연재 62 참조).

여기까지는 사실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 생체실험으로 연합군 포로가 숨졌는지는 불확실하다. 731부대 본부에서처럼 '마루타'로 여러 독성 실험을 한 뒤 수술 칼로 몸을 가르는 끔찍스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강한 적개심으로 연합군 포로들을 마구 다뤘고,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생체 해부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주 포로수용소는 의혹으로 남았지만, 패전 무렵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포로들을 마구 죽이고, 심지어는 생체 해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을 비롯해, 전쟁 후반부에 잇달았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됐고, 포로로 잡힌 이들에 대한 보복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공습 보복으로 8.15 당일에도 미군 처형

[1945년 6월19일 공습으로 인한 참담한 피해 상황은 서부군사령부 안에 구금된 미군 전폭기 탑승원에 대한 증오로 폭발했다. 공습 다음 날인 6월20일, 사령부의 검도(剣道) 유단자들이 사령부 뒤편의 후쿠오카 시립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8명의 탑승원을 참살했다.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참극이었다](東野利夫, <污名: 九大生体解剖事件の真相>, 文藝春秋, 1979, 67쪽).

윗글의 필자 도노 도시오(東野利夫)는 1945년 후쿠오카 규슈제국대 의과대학의 19살 신입생이었다. 밑에서 곧 살펴보겠지만, 그는 포로로 잡힌 미 B-29 폭격기 승무원 8명이 1945년 5월과 6월에 걸쳐 규슈제국대 의대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되는 참극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도노는 그 날의 끔찍했던 사건을 메모해 두었다가 훗날 <오명>(污名)이란 이름의 책을 펴냈다.

도노에 따르면, 그가 살던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한 큐슈지방에서는 1945년 초여름 포로로 잡힌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을 처형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도노가 두 눈으로 목격한 규슈제국대 의대에서의 생체해부 말고도 1945년 6월 29일에 8명(바로 위에 옮긴, 검도 유단자들의 척살 사건),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8월9일에 8명, 심지어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했던 8월15일 당일에도 17명의 처형이 이뤄졌다. 도노의 글을 보자.

[처형은 8월 9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진 날) 후쿠오카 남쪽 교외의 아부라야마 화장장 옆, 잡목림에서 행해졌다. 처형된 8명 모두 B-24 탑승원이었다. 또 패전한 8월 15일 오후 구금소에 남아 있던 탑승원 17명이 같은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은 B-24 공습에 대한 보복이었다](東野利夫, 67쪽).

▲ 1945년 3월10일 공습 뒤의 도쿄 주거지역. 일본은 잇단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겪었기에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포로를 마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石川光陽

잔혹한 르메이가 부른 적개심과 증오

이미 이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은 엄청난 무차별 공습을 일본에 퍼부었다. 공습의 지휘관은 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소장.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 또는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란 별명을 얻었던 아서 해리스(영국전략폭격기 사령관) 못지않은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한국전쟁 때 미 전략폭격집단(SAC) 총사령관이었던 르메이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밖으로 내몰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연재 40 참조).

르메이의 공습 명령에 따라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도쿄는 물론 나고야,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를 비롯해, B-24 또는 B-29의 폭격을 받은 도시는 67개에 이르렀다. 일본이 얼마만큼 폭격으로 초토화됐는가'는 1945년 8월말 미군 선발대의 모습을 그린 존 다우어(MIT대 명예교수, 역사학)의 책 한 구절이 잘 말해준다.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로 가던 미군 부대원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 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46쪽).

전쟁 말기에 미군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자 일본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컸다. 미군 포로를 때려죽이거나 생체해부하는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들이 일본 본토에서 벌어졌다.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에서 B-29기 승무원 8명이 생체해부를 당하는 참극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다.

일본의 패망이 불을 보듯 뻔한 때였던 1945년 5월5일, 마리아나 기지로부터 출격해 폭격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B-29 폭격기 1대가 후쿠오카 남쪽 시골마을(오이타현 구즈미 남부의 산간 촌락)에 떨어졌다. 19살 난 학병이 몰던 전투기로부터 가미가제(神風)식 공격을 받고난 뒤였다. 탑승자 11명은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현지인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끝내 승무원 1명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1명은 자경단의 총에 맞아 숨졌다.

나머지 9명은 일본 육군 서부군사령부로 끌려갔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펼쳐질 경우,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역 방어가 서부군사령부에 맡겨진 임무였다. 그 무렵 일본군은 일반 연합군 포로와 B-시리즈(B-19, B-24, b-25, B-29) 전폭기 탑승원 포로를 따로 다루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이들을 데려가 심문했다. 군사 정보를 캐기 위해서였다.

도쿄 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비밀 전문이 미군 전폭기 포로들의 운명을 갈랐다. '포로로 잡힌 탑승원들 모두를 도쿄로 보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정보의 가치가 있는 기장만 도쿄로 보내라. 나머지는 군사령부에서 적절히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기장 마빈 왓킨스 중위만 도쿄로 압송돼 갔고 나머지 8명은 서부사령부 감방에 갇혔다.

"우릴 무차별 폭격했으니 죽어할 놈들이다"

서부군사령부(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육군 중장)는 군사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B-29기 승무원들을 '전쟁범죄자'로 몰아 죽이려 했다. 그럴 경우 총살이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규슈의대 출신으로 서부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코모리 타카시 군의관이 규슈제국대 의대 관계자들과 상의 끝에 '의학 쪽에서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5월17일부터 6월3일 사이에 B-29기 승무원들은 2명, 2명, 1명, 3명씩 나뉘어 모두 4회에 걸쳐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로 끌려갔다. 건강진단을 받는 줄 알고 수술대에 누운 미군은 마취 주사를 맞은 뒤 깨어나지 못했다. 미군 포로를 의대까지 끌고 온 일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로들의 피가 뽑혀 나가고 대체혈액 실험용 바닷물이 주사기 바늘을 통해 들어갔다(그 무렵 규슈제대 의사들은 대체혈액을 개발해달라는 일본 군부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마취로 의식을 잃은 미군 포로의 배에 해부칼이 닿았고, 폐와 심장, 간을 비롯한 신체기관이 하나둘씩 떼어내졌다. 그 끔찍한 생체실험과 해부에 앞장섰던 일본 의사는 규슈의대 출신의 코모리 군의와 이시야마 후쿠지로(石山福二郞) 교수, 2명이었다. 의대 신입생 도노는 수술대 바로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4회에 걸친 생체해부 가운데 2회를 목격했다.

도노에 따르면, 해부를 이끌었던 이시야마는 '젊고 유능했던 의대교수'였다고 한다. 이시야마는 겁에 질린 채 해부실 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심장을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 가까이에서 생체해부를 지켜보던 일본군 장교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은 우리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란 말이다."

(참고로,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폭격기 승무원을 처형한 첫기록은 1942년 4월18일 둘리툴 편대의 일본 폭격 때였다. 제임스 둘리툴 중령이 이끈 16대의 B-25 경폭격기 편대가 도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폭격했다. 연료 부족으로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승무원 8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일본으로 압송된 뒤 '민간 주거지역을 폭격한 전쟁범죄자'로 재판 받은 끝에 3명이 처형됐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의 보복으로 일본을 타격했다는 선전 효과를 내세웠고, 둘리툴 중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켰다.)

▲ 1945년 규슈제국대 의대 구내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로 죽은 미 B-29 폭격기 승무원들. 사진 속 11명 가운데 2명은 격추 당시에 죽고, 기장은 도쿄로 압송돼가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위키미디어

5명 교수형, 4명 종신형

의대 해부실에서 미군포로가 생체해부된 사건이 쉬쉬 하며 비밀에 붙여지긴 어려웠다. 도쿄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법무국 수사관들은 사라진 미군 승무원들의 행방을 캤다. 서부군사령부는 처음엔 "그들은 히로시마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뒤 핵폭탄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둘러댔다. 어설픈 거짓말은 들통 나기 마련이었다. 5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B-29기 승무원들이 의과대학에서 생체해부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관련자들은 붙잡혔고, 1948년 8월27일 요코하마(横浜)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전쟁범죄 현장을 목격했던 의대 신입생 도노도 GHQ의 조사를 받은 뒤 법정 증언대에 섰다. 주범 가운데 규슈대 출신 군의관 코모리는 이미 미군 공습으로 죽었고,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코하마로 이송되기 앞서 스스로 목을 맸다.

요코하마 군사재판 검찰관은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야만성'이라고 피고들을 꾸짖었다. 서부군사령부 소속 2명(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사토 요시나오 대좌)과 규슈의대 교수진 3명(토리스 타로 조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모리 요시오 강사)이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다른 4명에게 종신형이 내려졌지만, 이들은 1950년대에 일본 정부의 감형과 사면 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의대 신입생으로 끔찍했던 범죄행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도노는 산부인과 개업의로 지내면서 그날의 엄청난 충격을 잊지 못하고 내내 힘들게 살았다. 34년 뒤 <오명>(污名)이란 책 앞머리에 그는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적었다. 특히 '전쟁 말기의 분위기와 혼란은 의사들을 미치게 했다'고도 썼다(도노는 책을 낸 다음 해인 1980년, 도쿄로 끌려가는 바람에 혼자 살아남았던 기장 마빈 왓킨스를 찾아가 사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2021년 타계).

여기서 짚어볼 점 하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비롯된 피해를 떠올린다면,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체해부가 이해나 용서가 될까. 어려운 일이다. 미군의 공습 그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했지만, 보복심리나 적개심이 그런 잔혹행위를 합리화할 수 없다. 어떤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마구잡이 포로 학살, 더구나 생체해부란 용서 받지 못할 전쟁범죄다.

전쟁범죄 반성 없는 일본의사회

이렇듯 전쟁의 광기 속에 인간성을 저버린 자들이 곳곳에서 피를 흩뿌리는 가운데 일본은 8.15 패망을 맞이했다. 일본 의사 모임인 일본의사회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비롯해 지난날 일본 의사가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사과의 뜻을 나타냈을까.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규슈제국대학 의대에서 벌어진 미 B-29기 승무원 생체해부에 대해서 사죄와 더불어 용서를 빌었을까. 아니다. 침묵으로 지내왔다.

일본 의학계의 그런 분위기 아래 731부대 출신자들도 사죄와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전쟁 중에 생체실험을 거듭하면서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따거나, 생체실험으로 갈고닦은 혈액의 동결·건조 기술로 혈액은행을 세워 한반도 전쟁특수를 틈타 떼돈을 벌기도 했다.

일본 의사 모두가 줄곧 과거사 문제에 나 몰라라 하며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사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비인도적 전쟁범죄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소속인 다케우치 지이치, 하라 후미오 두 의사는 오사카 개업의 6200명이 모여 만든 오사카보험의협회 출신의 평화운동가들이다. 이 두 사람의 글은 일본의사회에 비판적이다.

[지금까지 일본의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더구나 국가정책에 따라 일본군과 일본기업들이 강제동원한 '종군위안부'와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일본정부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일본 각 지역의 의사회도 마찬가지다](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99쪽).

▲ 만주 하얼빈 남쪽 핑팡 옛 731부대 터에 자리한 ‘731부대 죄증진열관’.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이 ‘마루타’들을 생체실험한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김재명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

731부대 군의관들이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아 전쟁범죄 처벌을 비껴간 것과는 달리, 독일에선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으로 처벌이 있었다. 지난 연재 51과 52에서 살펴봤듯이, 1947년 8월19일 나치 의사들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로 처벌을 받았다(7명 교수형, 9명 장기 징역형).

731부대 일본 의사나 나치 의사가 저질렀던 생체실험은 끔찍한 전쟁범죄임에 틀림없다. 논란은 그 무렵의 국제사회에서 의사가 지켜야 할 윤리나 도덕적 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서 나치 의사들은 '인체실험을 정당 또는 불법이라 가름하는 보편적 윤리기준이 국제사회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전시독일법에 따른 정당한 행위였다'고 우겼다.

이 재판의 검찰 쪽 의학 전문가로 미국의사협회에서 파견한 앤드류 아이비(1942-43년 미국생리학회 회장)는 반론을 폈다. "인체실험에 대한 규칙은 지금까지의 관습, 사회적 관례, 그리고 위료행위의 윤리에 의해 충분히 확립돼 왔다"고 반박했다. 의료윤리를 둘러싼 법정 공방 뒤 재판부는 나치 의사들의 뻔뻔한 주장을 일축하면서 나름의 의료윤리 기준을 판결문 뒤에 붙여 내놓았다. 그 문건은 앤드류 아이비가 중심이 돼 만든 것으로, 오늘날 흔히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이라 일컬어진다.

모두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이 강령은 의사가 어떤 의료윤리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첫머리는 인체실험 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 강조했다. 731부대의 '마루타'처럼 특이급(特移扱)이란 형태로 강제로 끌고 와 '처음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 실험'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의 주요 내용을 보자.

[△연구는 불필요한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해를 피해야 하고 △어떠한 실험도 사망이나 불구가 생길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는 경우엔 (연구진 자신도 피실험자로 참여하는 경우를 빼고는) 해선 안 되며 △(사람보다는) 동물 실험을 먼저 해야 하고 △상해와 장애 또는 죽음으로부터 피실험자를 지킬 수 있도록 적절한 준비와 설비가 마련돼야 하며 △실험을 계속하면 피실험자에게 상해나 불구, 또는 사망을 부른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실험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일본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731부대와 의사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4, 100-101쪽 참조).

이 강령에 비추어 731부대 의사들의 행태를 보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는 물으나 마나다. 그들의 악마적 행태는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다. 동물 실험을 건너뛰고 바로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생체 실험으로 죽게 했다. 한 마디로 731부대에선 뉘른베르크 강령 그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피실험자를 온각 가학적인 방법으로 괴롭히다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 731부대 의사들은 '조직적 전쟁범죄의 공범자'들이었다.

독일의 '어정쩡한 비(非)나치화'

독일의 경우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을 거치긴 했지만, 전쟁범죄자로 처벌된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많던 나치 의사들은 법적 심판을 비껴갔다. 패전 뒤 독일에선 대학이든 병원이든 지난날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던 나치당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독일 쾰른에 가까운 작은 도시 본에서는 의사 112명 가운데 102명이 나치 당원이었다.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이들의 의사 면허를 빼앗는다면 의료체계가 무너질 테니, 탈(脫)나치화를 밀어붙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연재 33 참조).

그런 이유로 서독 초대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독교민주연합(약칭 기민련, CDU) 정권은 적극적으로 탈나치화를 추진하지 않았다. 때마침 동서냉전의 바람이 불었다. 의료계 뿐 아니라 학계나 다른 분야에서도 탈나치는 멈췄다. 나치를 지지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교수들이 대학에 곧 복직했다. 이를 가리켜 탈나치화가 아닌, '어정쩡한 비(非)나치화'라 일컬어진다.

돌이켜 보면, 나치 독일정권 아래서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목소리를 낸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극히 소수의 의사만이 그들의 기독교적 양심 또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소극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많은 의사들이 나치 정권의 잘못된 우생학 정책에 따라 장애인 단종수술이나 안락사, 강제수용소 학살을 실무적으로 거들었다. 패전 뒤 (소수이긴 했지만) 나치 히틀러 정권이 추진했던 제3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조차 있었다(이는 마치 일본의 극우들이 대동아공영권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 731부대가 1945년 8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칠 무렵 폭약으로 파괴된 보일러실. 거대한 굴뚝 2개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김재명

전쟁범죄 책임 부인해온 독일 의사들

지난 주 글에서 소개한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평론가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쓴 책<戦争と罪責>(岩波書店, 1998)에는 패전 뒤 독일의 의사들이 지녔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8월에 걸쳐,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이 열릴 무렵, 그 재판의 성격을 독일 의사들에게 해설하기 위한 책자가 만들어졌다. <인간 경시의 독재>(Das Diktat der Menschenverachtung)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노다에 따르면, 그 책을 공동 편집한 알렉산더 미처리히와 프레트 밀케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의사들은 그들의 공격적인 진리 추구와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지점에 섰을 때, 처음으로 공인된 살육자이자 공적으로 임명된 고문관리가 되었다. 지난날의 끔찍한 행위가 지금 조용히 법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재판관의 판결이 어떤 것이든, 23명의 피고만을 죄인으로 보고 그들을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보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죄를 끌어들여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제대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 시대에 사악함이 승리했다고 해서, 우리 존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131-132쪽).

위 글의 요점은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 의사들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공범자로서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독의 많은 의사들은 이런 지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노다의 글을 보자.

[미처리히가 쓴 서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논점을 간결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서독의 의사 집단도 역시 이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일 힘(뜻)이 없었다. 이 서문은 베를린대학 교수들에 의해 삭제되었고, 미처리히는 격렬한 인신공격을 받았다](노다 마사야키, 133쪽).

이는 독일의사회뿐 아니라, 나름의 엘리트 의식을 지닌 의사집단의 집단적 완고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한때는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던 많은 독일인들이 패전 뒤 그랬던 것처럼, 독일 의사들도 스스로를 '나치 정권의 희생자'로 여기는 집단적 자기 합리화에 기울어 있었다.

베를린 의사회,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독일의사회가 오늘날처럼 나치의 과거사와 전쟁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열린 모습을 보인 것은 198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을 찾아가 비에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때(1970년 12월7일)보다도 한참을 지난 시점이다.

베를린 의사회가 잘못된 과거사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종전 40년도 더 지난 1988년이 되어서였다. 성명서를 통해 "베를린 의사회는 과거의 짐을 지겠다. 우리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면서 지난날 나치 독일에서 의사가 했던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나치 전쟁범죄의 협력자 또는 공모자) 역할을 돌아보고,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에 따라 독일의사회도 달라졌다. 1989년 '인간의 가치-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의학'이란 주제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나치즘과 의학이 사악한 동맹을 맺었던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이렇듯 독일의사회는 뒤늦게나마 사죄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견주어 일본의사회는 어떠한가. 전후 80년이 지나도록 지난날 침략전쟁 속에서 일본 의학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따져보려 들지 않는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료인들이 반성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집단의 힘으로 이를 눌러왔다. 필요에 따라선 겉치레로 '히포크라테스'니 '생명 윤리'를 말하겠지만, 집단적인 반성을 슬그머니 건너뛰고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아예 잊기로 한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껏 여러 회에 걸쳐 일본 731부대의 악행과 그 뒤 상황을 살펴봤다. 세균무기를 만든답시고 731부대가 저질렀던 악행은 전쟁범죄사에서 매우 끔찍하고 특이한 엽기적 전쟁범죄였다. 그들이 저질렀던 '인도에 어긋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우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로 꼽힌다. 이 범죄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악마의 의사'들은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들의 죄의식마저 깔끔하게 지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진정한 면죄부를 얻는 길이다.

4차에 걸쳐 세균전 전문 조사관을 파견한 미국은 731부대 간부들로부터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챙겼다. 1947년 가을에 그 '더러운 거래'가 마무리됐다. 3년 뒤 터진 한반도 전쟁에서 미국은 세균전을 폈다는 의혹을 받는다. 다음 주 글에선 독자들과 함께 그 문제를 들여다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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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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