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로를 강제노동 끝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일본군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 ④칸차나부리에서 광복군을 기억하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콰이강의 다리 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훌륭한 시설에 싼 가격, 언제든 강가로 나가 철교를 볼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체크인 후 호기롭게 렌터카 사무실로 가 차를 빌렸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데다 3시간여의 열차 여행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계획된 여정을 수행하기 위해 무리를 하기로 했다. 시내에 있는 박물관들을 둘러보고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의 탐 크라세 역으로 가서 죽음의 철도 구간을 보아야 했다.

계약서 사인을 마치고 차 키를 받아 시동을 걸어 도로로 나갔다. 오른쪽 운전석에 좌측통행 방식은 처음이라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며 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3분여를 달리다가 빡 소리가 나더니 왼쪽 사이드미러가 접히면서 유리 조각이 튀었다. 정차해 살펴보니 길가에 주차해 있던 차와 사이드미러끼리 닿은 모양이었다. 부딪힌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더니 자신의 차를 둘러보고는 크게 이상이 없으니 당신 차나 잘 수리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운전에 자신이 있었던 몸이었지만 접촉사고를 내고 보니 운전할 맛이 떨어졌다. 바로 차를 돌려 렌터카를 반납했다. 지급한 수리비를 아까워하며 렌터카 사무실을 나왔지만 다음날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난 국도를 나는 듯 달릴 때 렌터카를 반납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나름 모범운전자인 나로서는 태국 국도를 다이내믹하게 달리는 차들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픽업트럭의 짐칸을 개조해 손님을 태우는 성태우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갔다. 기사와 흥정 끝에 100바트를 내고 시내로 향했다. 성태우 기사는 우리 일행을 죽음의 철도 박물관 앞에 내려놓고는 시동을 끈 채 관람을 마치면 다시 호텔로 가겠다며 기다렸다. 1인 160바트의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는 포로들이 사용했던 연장이나 소지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전시실 중앙에는 자갈밭 선로 위에서 연합군 포로 두 명이 탈진한 동료를 양쪽에서 부축하는 조형물이 서 있다. 뼈가 앙상히 드러난 몸들, 병색이 완연한 표정들에서 이들의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추측할 수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 박물관 ⓒ박흥수
▲죽음의 철도 박물관 전시실의 포로를 형상화한 조형물 ⓒ박흥수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한 장면을 보자.

"속도전이 시작되었다. 그건 이제 더 이상 휴식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각자에게 할당된 작업량이 계속 많아졌고, 작업시간도 계속 늘어났다. 속도전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건강한 사람과 환자를 구분하기가 모호하던 상황이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을 구분하기가 더 모호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버마 전선에서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내야 했고 그러자면 철도가 필요했다. 철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당장이라도 철도를 운행할 것처럼 선로 부설에 나섰다. 일본군의 필요가 급하면 급할수록 철도 부설에 참여한 노동자들과 포로들의 사정은 나빠졌다.

과거 한국 독립운동사를 공부할 때 광복군이 버마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을 접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만주도 중국도 아닌 버마 전선이었을까? 1943년부터 버마 전선은 동아시아에서 연합군과 일본군의 성패를 가를 요충지였다.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중국 정부는 충칭을 전시수도로 삼아 일본에 맞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충칭으로 옮겨졌고 항일 군사조직 광복군을 창설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3일 후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대일 무장 항전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 오르자 일본군의 전선은 아시아 태평양 전체로 확장된다.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도 중일 전쟁에서의 빠른 승리가 필요했다. 연합군은 중국이 광대한 전선에서 일본군을 괴롭히며 버텨내는 것이 필요했다. 중국군이 일본군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만큼 다른 전선에서 일본군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충칭으로 대규모 군사 물자를 이동시켜 중국군을 지원했다. 이 지원 루트가 이른바 장제스 루트로 버마에서 중국 쿤밍 - 윈난 – 충칭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한 중국 원조를 막아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버마 장악이 반드시 필요했다. 시암-버마 철도는 일본군이 중일 전쟁 승리를 위해서도 동남아시아 재패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인프라였다. 결국 버마 전선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일본군이 첨예한 이해관계를 갖고 대립한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충칭에서는 미국 전략사무국 OSS와 영국군 정보요원들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버마와 인도에 대한 공세가 한 창일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와 ‘한영 군사 상호 협정’을 체결하고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 工作隊)란 이름으로 광복군을 인도에 파견한다. 공작대 광복군 대원들은 인도 델리에서 3개월간의 혹독한 특수전 훈련을 받고 콜카타, 임팔, 만달레이, 랑군 등지의 전선에서 활약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문 ⓒ박흥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의 모습 ⓒ박흥수
▲중국 충칭시에 복원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박흥수

일본군은 태국-버마 철도 속성 건설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포로들을 더 혹독하게 압박했다. 이런 가운데 칸차나부리에서 철도 건설에 투입됐던 에릭 로맥스의 인생은 또 다른 굴곡 속으로 던져진다. 에릭은 1943년 8월 말 자신의 노동이 돌연 종결되었다고 증언한다. 일본군은 수용소 막사 수색 과정에서 라디오와 헤드폰 같은 물건들을 발견했고 철도 노선이 그려진 지도도 손에 넣었다. 에릭 로맥스는 이 사건 관련자 중의 하나로 연행된다.

"우리는 막사를 등진 채 꼬박 12시간을 서 있었다." 강렬한 태양의 열기, 땀내에 성가시게 구는 파리와 모기떼들, 가렵고 따끔거리는 피부, 빛 반사로 인한 고통스러운 눈부심, 타들어가는 목마름이 죽음의 공포와 함께 에릭 로맥스를 괴롭혔다.

"스미스 소령이 맨 앞으로 끌려 나갔다. 교도관들이 머리 위로 팔을 높이 올리라고 소리쳤다. 허수아비처럼 야윈 몸과 가느다란 팔이 가련할 정도로 애처로워 보였다....덩치 큰 일본인 병장이 자세를 취하더니 소 등처럼 희어진 스미스의 등짝을 곡괭이자루로 후려쳤다. 스미스는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하지만 일본인 병장은 그를 밟고 발로 차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또다시 세게 가격했다. 뒤이어 여러 명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무리 머리 위로 곡괭이 자루가 오르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급소를 정통으로 맞았는지 신음 섞인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급기야 스미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굳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그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뻗을 때까지 40분 정도 걸렸던 걸로 짐작한다…이번에는 내 막역한 친구 모튼 맥케이가 앞으로 불려나갔다. 나는 그 다음 차례였다"

수용소에서 살인적인 매질을 당한 에릭 로맥스는 부러진 양팔에 대나무 부목을 대고 일본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된다. 독일의 게슈타포와 비슷한 역할로 악명이 높은 캠페이타이(일본군 헌병대)는 에릭을 헌병대 칸차나부리 본부로 이송했다. 헌병대 안쪽 담장에는 토끼장으로 불리는 대나무로 엮은 우리가 있었고 그 안에 포로들을 가뒀다. 전체 길이와 높이는 각각 150cm, 가로 세로 70cm미터 정도의 문이 달린 틀이었고 지붕은 구이용 철판처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감방은 오후가 되면 찜통 그 자체였다. 열기를 머금은, 사방이 꽉 막힌 상자나 다름없었다. 크고 사나운 불개미가 내 몸 위로 기어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다리나 등에 떨어진 곤충들을 떨어낼 수도 없었다."

에릭 로맥스는 켐페이타이의 취조를 받기 시작했다. 조사를 맡은 헌병 하사관은 병사 하나를 통역으로 앞세워 로맥스를 다그쳤다. "얼마나 오래 매를 맞았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하사관이 날 때리다가 돌연 멈추고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스 파이프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고작 몇십 센티미터 거리에서 물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파이프를 내 코와 입에 갖다 댔다. 물은 내 기관지와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폐와 위장까지 가득 채웠다…"

지속되는 매질과 물고문으로 만신창이 몸이 된 상태에서 방콕으로 이송된 에릭 로맥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싱가포르 우트럼 로드, 창이 감옥을 전전하다가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에릭 로맥스의 몸과 달리 마음은 치유되지 못한 채 악몽에 시달렸다. 영웅 서사를 숭배하는 국가나 군 당국도 포로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릭 로맥스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당했던 고통의 내막을 알고 싶어졌다. 자신을 고문한 자들에 대해서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속도 이름도 전후 행적도 모르는 상태에서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가운데 영국 전쟁포로연합회 동료들의 도움으로 칸차나부리에서 자선 활동을 하는 전직 일본군 출신 나가세 다카시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받게 된다. 나가세는 콰이강의 다리에서 연합군 포로였던 사람들과 ‘화해’의 만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나가세가 바로 에릭 로맥스를 심문할 때 통역으로 일한 일본군 병사였다. 에릭 로맥스는 나가세의 활동에 회의를 넘어 역겨움을 느꼈다. 화해의 만남은 대외홍보용 사기행각이라고 생각했다.

▲칸차나부리 전쟁 묘지 ⓒ박흥수
▲헬파이어 패스 기념관에 전시된 일본군의 포로 학대 장면을 묘사한 그림 - 에릭 로맥스가 경험한 사건의 삽화로 써도 무방할 정도다.ⓒ박흥수

전후 칸차나부리에서의 나가세 활동은 일본에도 알려졌다. 1989년 8월 15일자 <재팬 타임즈>에는 나가세의 기사가 실렸다. 철로 변 비참한 무덤과 유해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여생을 철로를 건설하다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데 바치겠다고 결심한 나가세는 종전 직후 연합군의 전몰자 묘지 수색작업에도 합류하게 됐다고 기사는 밝히고 있었다. 전후 18년이 지나 일본의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자 나가세는 칸차나부리로 돌아가 생존한 아시아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벌였다. 또 콰이 강의 다리 인근에 사찰을 건립하고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에릭 로맥스는 나가세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나가세가 쓴 책 <십자가와 호랑이>의 한 대목을 보자. "아내와 나는 하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화환을 내려놓고 묵념을 올렸다. 그때 나는 내 몸이 사방으로 노란 빛줄기를 내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더니 이내 몸 전체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래 바로 이런 거야! 용서받는다는 것이.’ 나는 그 느낌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에릭 로맥스는 이 용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수기에 밝히고 있다. "신은 그를 용서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 영화 밀양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마침내 에릭 로맥스는 나가세와 만나게 된다. 자신을 고문하는데 가담했던 나가세에게 복수를 다짐했건만 에릭은 담담하게 나가세를 용서한다. 에릭 로맥스의 자서전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2014년 개봉되는데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만이 주연한 <레일웨이 맨>이다. 감독은 자서전의 내용과 다르게 에릭이 몰래 칸차나부리로 나가세를 찾아가게 한다. 영화에서는 에릭이 나가세가 옛 헌병대를 재현한 곳에 있는 대나무 우리 속에 나가세를 가두고 다그친다. 감독은 영화에서나마 에릭이 나가세에게 울분을 토하게 만든다.

나가세는 C5631호 증기기관차가 야스쿠니에 전시되는 것을 반대했고 생애 내내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평생을 따라다녔던 과거의 악몽을 단숨에 뿌리치지 못한다. 에릭이 나가세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나가세는 좋은 일본인이었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거나 더 나아가 일본이 저지른 악행은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는 현실이다.

칸차나부리에는 JETHA 전쟁박물관이라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콰이강의 다리 바로 옆과 도시 남쪽 쾌야이 강과 쾌노이 강이 만나는 곳이다. 이 중 옛 포로 구금소를 재활용해 1977년 만들어진 남쪽 박물관은 사찰의 주지 스님이 설립했다고 나온다. 나가세가 칸차나부리에 사찰을 만들었다고 하니 JETHA 전쟁박물관은 나가세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JETHA란 이름은 칸차나부리에서 철도 건설에 나섰던 나라들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일본, 영국, 태국, 네덜란드, 미국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명칭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 박물관 이름만 봐서는 5개 나라가 사이좋게 철도를 부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물관에는 철도 부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전시되어 있기는 하나 박물관 이름에서부터 역사가 희석되는 느낌이다.

▲콰이강의 다리 옆 JETHA 전쟁 박물관 입구 모습 - 친근한 일본군 병사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박흥수
▲22살 젤킨스 병사의 묘비 ⓒ박흥수

죽음의 철도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책을 한 권 사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앞은 칸차나부리 전쟁 묘지이다. 철도 노선 곳곳에 퍼져 있는 공동묘지 중에 가장 크고 정비도 잘 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철도 건설 기간 중 숨진 6982명의 전쟁 포로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 신원이 확인된 6858개의 묘비에는 저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남긴 글이 적혀있다. 묘지 정문으로 들어서면 잔디밭 위로 중앙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무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쏟아지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묘비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묘지에는 30대 후반의 병사들도 있었지만 주로 20살 언저리의 젊은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22살 소총수 젠킨스의 묘에는 "그 목소리와 상냥함 그리고 함께 했던 행복한 날들을 그리워할 거야, 엄마랑 모두가" 23살 캔들러 일병의 묘비에는 "너무 사랑하고 너무 사랑했어, 너무너무 보고 싶다."라고 쓰여 있다. 묘비에 적힌 글을 읽을 때마다 무엇인가 울컥하고 숙연해지는 마음이었다. 전쟁 불사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 묘비에 쓰인 글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시 성태우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죽음의 철도 박물관에 전시됐던 사진을 보니 호텔이 있던 자리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부대와 포로수용소 막사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었다. 전쟁포로들이 지친 발걸음을 옮겼을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다음 방문지인 호텔 앞 JETHA 전쟁박물관 앞에 섰을 때 헛웃음이 나왔다. JETHA 전쟁박물관 입구에 세워놓은 일본군 입간판 때문이었다. 포로들을 강제 노동 끝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일본군의 모습을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역사 왜곡을 넘어서 사실을 형해와 시키고 있다. 관광객들이 예쁘장한 일본군과 기념 촬영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인가? 박물관측의 빈약한 역사 인식에 어이가 없었다.

▲시암-버마 철도 개념도 ⓒ프레시안(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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