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당' 참여 없이도 사회운동은 지속돼야 한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사회운동의 정치를 시작하자] ①

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이 등장했습니다. 사회운동의 일부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연합하는 광경을 마주하며 사회운동의 일원을 자처하는 우리는 참담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윤 축적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사회적 힘과 정치적 전망을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합니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취지의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알리고, 더욱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하기를 기대하며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네 편의 글을 싣습니다.

세대적 특징인지, 특별한 기대를 받지 않는 둘째로 자란 탓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 열중하기를 경계한다. 푹 빠지지 말 것, 욕심내지 말 것, 푹 빠지거나 욕심나더라도 그것을 티내지 말 것. 적당하게 쿨(cool)한 마음가짐은 '있어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실패로 인한 낙차를 줄이기 위한 생존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운동도 그렇게 시작했다. 내가 가난해지기를 두려워하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난의 개수를 줄이는 것, 이 합리적인 일을 안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특별한 사건도 포부도 없이 시작한 활동이 돌아보니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시작했던 마음은 한 삼 년쯤 일단 해볼까에 불과했는데 웬걸, 쿨하지 못하게도 나는 이 일이 꽤 좋아졌다.

좋아하는 만큼 잘하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변명을 해보자면, 일단 우리는 매우 적다. 한 발만 나가도 '아직도 운동이 있어?'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 변화를 맹렬하게 원하고, 실천에도 나서는 사람은 아주 한 줌, 그 중에서도 나와 미래를 공유하고, 바로 오늘 어깨 걸 수 있는 사람은 더 작은 한 줌에 불과하다. 미래를 바꿀 당찬 계획과 포부를 그렸다가 갑자기 생긴 사건 사고에 휘말려 계획과 무관한 한해를 보내는 일은 자주 일어나고, 중요한 싸움은 언제나 아무것도 준비 되지 않았을 때 터진다. 열심히 싸워서 몇 가지 제도를 얻어내면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자주 후퇴한다. 선명히 보이는 적보다 진절머리가 나는 일은 곁에서 일어난다. 협력해야 하는 사람들과 의견이 충돌하고, 연대가 필요한 곳에 적의가 자랄 때마다 때려치울 꿈을 꾼다. 해야 하는 일은 넘쳐나는데 우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겨우 이런 내가 운동을 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란다. 이런 마음 한 조각 없는 활동가가 어디 있으랴. 진지할수록 어렵고, 이상이 드높을수록 초라하게 실패하는 것. 나는 내 운동이 그렇게 멈출까 두렵다.

조용히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

이 난관의 기저에는 전망의 부재가 있다. 무엇에 반대할지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어떤 세상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것에는 서툴다. 기술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세상을 몽땅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우리의 역량을 아니까, 우리의 주장이 처리되는 방식과 수용되는 수준을 아니까. 그걸 넘어서는 것은 허황된 말이 아닐까 두려웠다. 매일 열심히 살아도 세상을 바꾸는 꿈은 옹색해져만 갔다.

그러다보니 해야 하는 운동보다는 할 수 있는 일에 익숙해졌다. 선거 때마다 정책 질의서를 만들고 토론회와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 운동에 동참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이들이 연합할 공간을 조직하는 일은 쉽게 포기하거나 서툴렀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운동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그 운동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적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내가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와 비교해보더라도 '사회운동'이라는 큰 블록은 점차 작아지고 있다. 여기엔 몇 가지 영향이 있다. 먼저 지난 20년간 사회운동이 정부나 여의도 정치의 하위 파트너로 스스로 영역과 역량을 내어줬다. 이념과 대중운동은 힘을 잃고, 의제와 마이크를 쥔 몇몇 전문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회운동에서 훈련받은 활동가와 전문가들은 정치적 기회구조가 열릴 때마다 주류 정치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진입했고, 거버넌스는 그 등용문이 되었다.

한편 새로운 사회운동이 꾸준히 등장했으나 이들 운동은 각자 존재할 뿐, 공동의 사회운동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반전평화, 반빈곤 등 사회운동의 여러 사상적 자원이 종합되고 갱신되기보다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하고 거리를 지켰다. 상호 개입하는 논쟁과 실천을 방기하고 않고 멈춰선 운동은 하나의 지도를 꾸리지 못한 채 각자의 싸움을 이어갔다.

80년대 만들어진 운동의 역량이 꾸준히 줄어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위기는 특징적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수준이 엄혹한데 이에 맞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은 경험이 없는 개인들은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을 향한 각자의 경주에 몰입하고, 극심해지는 위기 속에 새로운 연대가 움트는 것이 아니라 성별·국적·종교와 같은 차이를 두고 복잡한 대립이 벌어진다. 이러한 때에 운동의 책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두터운 사회운동이 만드는 정치를 향해

2024년 2월 개최된 <체제전환운동 포럼>을 준비하며 주거권 활동가들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에서 미국 한 협동조합 운동의 사례에 관해 접했다. 이 협동조합은 흑인 비율이 높고 가난한 지역에 있었는데, 자신들의 힘으로 의원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회 입성 자체가 자신들의 목표가 될 수 없다며 "정부(government)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통치(govern)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정치적 주체가 되어 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진짜 승리라는 이들의 말은 각 정당의 이합집산에만 모든 공적 논의가 집중된 지금의 한국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부조리와 억압, 모순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부당한 일에 처한 사람과 함께 싸우며 체제에 맞서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중요한 목표이지만, 개별적 운동의 나열이 세상을 바꾸는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실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세상을 바꿀만한 크기의 힘이다. 이는 당연히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힘, 즉 체제의 힘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세력이 되고자 결심하지 않고는 이 힘을 조직할 전망도 가질 수 없다.

이런 고민을 이어온 활동가들이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제안했다. 정치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 문제인지 규정한다는데 있다. 체제전환운동은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문제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관계를 넘어 젠더, 인종, 생태 전반을 수탈하는 체제로서의 총체다. 이에 맞선 각각의 사회운동이 체제전환이라는 전망으로 더 뾰족하게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연합을 도모하려 한다. 그 시작점이 3월 23일 열리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다.

체제전환운동의 동료가 되어 운동, 잘 해보자

실로 혼란한 시대가 아닌가. 사회운동 일각이 나서 보수양당과의 연대를 호소하는 지금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사회운동의 독자적 전망은 소실되었고, 전체 사회운동의 조망 아래 자신의 운동과 역할을 배치하는 일은 희귀해졌다. 우리는 왜소해지지 않도록 서로를 연결하고, 변혁적 사회운동의 불씨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확인할 기회가 필요하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가 그려내려는 미래는 바로 그 연합의 질서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준비하며 나는 부쩍 운동을 더 잘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곳곳에서 싸우는 동료들에 대한 신뢰와 '체제전환'이라는 안경을 통해 보는 더 큰 변화에 대한 전망이 있다면 우리 운동도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체제전환운동의 일부로 스스로를 호명하고 세상을 바꿀 동지가 되어보자는 것. 좀 부담스럽고 막막한 말이라는 것 안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 가장 빠르다. 이제는 사회운동의 정치를 시작할 때, 다 같이 체제전환에 푹 빠져보자.

▲15일 국회에서 열린 비례연합정당 관련 정책연대를 위한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왼쪽부터), 박주민 의원, 새진보연합 오준호 정책본부장, 진보당 정태흥 정책위원장이 손을 맞잡은 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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