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사회학적으로 '세대론'은 자주 사용된다. 최근에는 MZ세대가 대표적이다. 1980~1994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전 세대와 달리 조직과 자신을 분리하고 ‘워라밸’을 지키는 세대로 규정된다.
그런 의문도 든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더 정확히는 자신의 근무조건에 적극 문제제기를 하고, 보장된 휴식시간을 반드시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같은 세대 내에도 부모의 능력과 교육, 성별, 태어난 지역 등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불평등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어떤 동질성'이 같은 세대라고 치부하며 그들을 MZ로 묶어버린다. 이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자칫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은폐 내지는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만난 10명의 도시 속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MZ세대이나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MZ세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도시 속 2030 여성들이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편집자
지난해 2023년의 7월이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가다 니은과 만나기로 한 역에 내렸다. 산업단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고 노동자들이 주거와 소비를 하기 위한 배후 도시가 팽창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여름의 기차역 앞은 그늘이 없었다. 초록색 나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신축 상가 건물들이 역을 둘러싸고 있었다. 원색의 간판들이 상가 외벽에 가득했다. 간판은 식당, 카페, 주점, 헤어샵 같은 것들이었다. 먹고 즐기고 가꾸어야 하니 돈이 돌 것이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아파트 단지가 줄지어 있었다. 공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도로며 인도며 정리가 덜 돼 있었다. 일을 찾아서 돈을 벌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모여들고 떠나가고 흘러가는 사람들이 그려지는, 어딘지 들뜨고 낯선, 그러나 스산한 느낌의 신도시였다. 니은과 만난 카페는 평일 낮이어서인지 한산했다.
니은은 산업단지의 공장에서 일한다. 이 도시에서 멀지 않은 농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사회생활 10년 차, 고등학교 때의 알바까지 치면 10년은 훌쩍 넘었다. 니은은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 뉴스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았다고 했다. 니은이 일하는 회사는 전자제품 부품을 만드는데 코로나 기간 원청회사가 수출에 자질이 생기면서 원청회사에 납품하는 니은의 회사와 같은 중소기업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슷한 업종의 기업들 중에 생산품을 전환한 곳도 있고 이미 문을 닫은 공장도 있었다. 허리까지 다친 니은은 회사에서 언제라도 나가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성' '지원' '노동' 같은 키워드를 검색창에 쳐 보았다. 잘릴 경우 도움을 받을 곳이 있는지 찾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가기를 미루고 있는 허리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니은의 회사는 노동자 수를 서서히 감축해 나가고 노동시간도 줄이면서 대응하고 있었으니 합리적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회사는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수긍하기 어려운 방법을 사용했다. 어떤 방법이 있어서 사용했다기보다 콕 찍어서 문제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닌 방법이었다.
회사가 이들을 자른 것은 맞는데 증거는 남지 않는다. 앉아서 일하던 사람을 서서 일하는 라인으로 보내거나 컴퓨터 일을 하던 사람을 창고로 보내는 동시에 근무일을 줄인다. 회사는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직원의 입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회사가 이긴다. 나가는 사람은 몇 개월 실업급여도 없이 허허벌판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이 되지만 회사는 정부가 주는 보조금이 항상 들어오는 상황이 유지된다. 정부가 중소기업의 경영난을 해소하고 고용을 창출하라고 주는 고용지원금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기업에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수백 명이 나갔고 나간 사람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남았다. 니은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간 사람들이 거의 다 여성이었다는 것이고, 나간 수백 명 중에 한 자리 수의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해고'를 당했는데 그들은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남성 직원에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는 회사 관리자를 보기도 했다. 일은 다 비슷했고 남성 직원들이 하는 일은 니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월화수목금토일 7일 중에 4일만 일을 했고 나중에는 주중에 이틀만 출근을 했다. 3년 전 회사에 입사할 때는 월급을 받는 전일제 노동으로 근로계약서를 썼지만 어느 새 시급제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주야 맞교대를 할 만큼 일이 엄청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250만 원 이상을 받았다. 이제는 200만 원이 안 되는 돈이 들어온다.
월급 200만 원, 니은의 생활은 어떨까. 50만 원 월세를 살다 청년전세대출을 받아 전세로 옮겼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이자가 적을 때였다. 타지에서 오는 구직자들이 많은 지역이라 전세 수요는 많은데 정부 전세대출 요건에 부합하는 전세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주택소유주들의 대출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니은도 정부대출제도가 아닌 인터넷은행 청년전세대출을 받아야 했다. 대출 초기보다 이자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월급의 10%가 넘는 돈을 이자로 내고 집에 계신 부모님과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에게 용돈을 보냈다. 다행히 남동생이 취업을 해서 용돈은 부모님에게만 드린다. 적금을 붓고 싶지만 아직 여유가 안 된다. 니은의 경제생활은 식비 통신비 보험료 공과금이 빡빡하게 기록되어 있는 스마트폰 가계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전세대출 제도의 사각지대와 고향 가족의 사정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니은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방학에는 읍내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았다. 야간 알바가 끝나면 새벽 첫차를 타고 집에 가야 했지만 대학교에 갈 등록금을 모으고 싶었다. 편의점 알바로 등록금은 모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들인 남동생의 대학교 학비만 지원할 수 있다고 했고 니은도 수긍했다. 중학교 때까지 남성들이 밥을 먹고 난 자리에서 여성들이 밥을 먹던 가족들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여자 혼자서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모아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었다.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집에서 버스로 출퇴근할 수 있는 도시들의 미용실에 몇 해 동안 다녔다.
공장에 오기 전 니은의 직업은 헤어디자이너였던 것이다. 더 성장하는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큰 도시로 나왔다. 대도시의 헤어샵은 산업규모가 큰 만큼 약탈적이고 경쟁적이었다. 일도 재미가 있었고 감각도 소질도 있었던 니은은 헤어샵 원장이 요구하는 매출액을 늘 달성했다. 매출액은 원장의 실적으로 자주 둔갑했다. 매달 니은이 만든 매출액의 72%를 샵에서 가져간다는 것도 문제였다. 니은은 28%를 받았다. 프리랜서 계약서에 적혀있는 대로였다. 니은 스스로 도장을 찍었지만 '프리'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노예계약에 가깝구나 하는 회의감이 더 많았다. 의상, 구두도 착장 기준이 있었고 고객응대도 자율적으로 할 수 없었다. 주 6일 근무에 하루 쉬는 날도 예약이 들어오면 나가야 했고,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을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헤어용품 판매, 정기이용권 판매 압박도 부담이었다. 헤어샵의 매출에서 디자이너가 판매하는 정기이용권은 비중이 크다. 정기이용권을 선불로 구매한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디자이너에게 계속 머리를 맡기고 싶어한다. 내 스타일을 잘 아는 디자이너 대신 낯선 디자이너가 내 머리를 손질한다면 고객은 헤어샵에 환불을 요구할 수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던 때 헤어샵을 찾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줄어들면서 매출이 바닥을 찍었다. 디자이너들이 받아 갈 급여가 거의 안 나왔다. 헤어샵 원장과 헤어샵 체인의 소유주는 고객이 선불로 지불한 이용권을 구실로 디자이너들을 잡았다. 디자이너가 나가려면 고객이 환불을 요구할 금액을 물어내야 했다. 선불권의 조건에 특정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된다는 문구가 있지만 샵의 입장에서 고객이 환불을 요구할 때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액의 선불 이용권이 자신 앞으로 달려 있을 때 디자이너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돈을 물어주고 나오거나, 돈을 물어주기를 거부하고 나오거나, 코로나가 지나갈 때까지 헤어샵에 버티면서 기약없는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돈을 물어주기를 거부하고 나오는 것은 이론으로는 가능해도 현실에서는 두려운 일이다. 업계가 좁다고 으르는 원장과 사장의 위협을 이겨내야 한다. 위협은 물리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었다.
니은은 선택의 자유라고 하기 어려운 이 세 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택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헤어디자이너의 예속성은 복잡한 데가 있어 보였다. 노동이 행해지는 헤어샵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의 특성, 경력에 따른 위계, 고객과의 관계, 헤어샵 경영구조의 특성, 관련 사업의 이권이 섞여 있다. 말단에는 견습, 스탭들이 있겠지만 고된 훈련과정을 거쳐 디자이너가 되어도 이윤 구조의 상위에 자리 잡지는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생산의 최전선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에 가깝지만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지위를 쉽게 놓아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스스로 놓았다기보다 이미 공고한 구조 안에서 생존해야 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남의 노동에 빨대를 꽂는 일이 어떤 산업이든 분야를 안 가리고 일어난다. 여튼 니은은 지금 공장에 있다.
공장으로 와서 니은이 제일 좋은 것은 말을 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비쪽 엔지니어로 들어갔다. 헤어디자이너 7년 경력의 니은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같은 부서의 남성 직원이 니은을 불러서는 자신은 '여자와 일 못한다'고 하기 전까지는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무거운 물체도 잘 든 것은 물론 말 한번 붙이지 않고 일했는데 무슨 날벼락인가. 니은이 회사에 신고하자 회사는 니은에게 부서를 옮겨주겠다고 했다.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각서도 니은이 써야 했다. 물류를 옮기는 부서로 옮겨진 니은은 허리를 삐끗하는 사고를 당했다. 디스크가 터져도 산재는 안 하는 회사였다. 회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옮겨준다고 했다. 니은은 여성만 있는 부서로 보내달라고 했다. 방진복을 입고 부품을 하나씩 확인하고 다음 공정으로 내보내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마음이 평온해졌다. 주간 근무 4일, 2일 휴무, 야간근무 4일의 구인 공고에 나온 루틴대로 일한 것은 처음 2개월이 다였다. 코로나가 깊어지는 시기 일이 불규칙해지더니 서명 용지가 돌기 시작했다. 니은은 알지 못하는 근로자대표가 등장해 벌이는 일이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에 동의하고 그만큼 급여도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식간에 몇백 명이 서명을 했다. 니은은 하지 않았다. 직급이 있고 급여가 좀 나은 곳에는 남성 직원들이 남았다.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 쉴 틈 없이 잔손이 가는 일에는 여성 직원들이 남았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고용노동부에 전화를 해 봤지만 조건이 안 된다는 답만 했다. 회사 사정으로 휴업을 하고 기본급의 70%가 깎인 상태가 3개월 이상 지속되면 자진 퇴사를 해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어떤 비법인지 휴업일은 개인 연차 차감이 되어 있었다. 실업급여 조건을 묘하게 벗어나게 되어 있었다. 니은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고용노동부는 '회사에 잘 얘기해 보라'고도 했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도록 설계된 회사의 구조조정 방식은 결국 니은을 계속 회사에 매여있게 했다.
헤어샵에서도 계약서를 썼었고 공장에서도 계약서를 썼었다. 근로계약이든 프리랜서 계약이든 계약서는 니은을 지켜주지 못했다. 밥상을 자주 엎던 아버지지만 머리를 다듬어드릴 때를 헤아려서 집에 간다. 넘어져서 다친 아버지는 거동이 어렵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몸이 자꾸 아프다. 집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직업을 개척했고 능력 있는 헤어디자이너도 됐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다. 헤어 일이 여전히 좋아 손이 굳을까 봐 걱정이지만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장에서 다친 허리는 끌어안고 있다가 나중에 정형외과에 갔다. 도수치료라는 것을 받으라고 권유해서 해보니 한 번에 12만 원이 나왔다. 지금 월급으로는 불가능했다.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받은 100만 원의 절반을 니은은 부모님의 병원비로 부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돈으로 니은은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다. 한의원에 갈 수 있어서 좋다, 고 니은은 거듭 말했다. 다만 불안하다. '쉬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회사가 언제까지 어려울지가 걱정이다.
* 이 연재는 2023년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한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만난 여성들, 노동건강연대가 활동하면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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