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부대'에서 풀려난 쥐떼, 3만 중국인을 죽였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7]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⑥

731부대가 생체실험으로 가혹행위 끝에 죽인 '마루타'는 3000명쯤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3000명이란 숫자는 어떤 경로로 나온 것이고 정확한 것일까. 소련군에 붙잡힌 일본군 전범들을 다룬 하바롭스크 법정(1949)에서 731부대의 세균제조부장 카와시마 키요시(川島清) 군의소장이 했던 진술이 그 출발점이다(카와시마는 2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일본·소련 외교관계 복원 뒤 풀려났다).

[1949년 소련의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일본 전범재판에서 731부대의 카와시마 키요시는 이렇게 증언했다.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전염성 세균을 맞고 사망한 731부대 죄수들의 수는 1년에 600명을 넘지 않았다." 카와시마는 1941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핑팡 죽음의 공장(731부대)에서 근무했다. 이런 카와시마의 증언에 따라 연구자들은 1년에 600명씩 3000명 정도가 죽음의 공장에서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샐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157쪽).

위의 글을 쓴 미 역사학자 샐던 해리스(1928-2002)도 '마루타 3000명 설'에 의문을 품었다. 해리스는 미국 노동사를 전공한 연구자였다. 1980년대 중국 지린성 창춘(長春)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중국 학생들로부터 듣게 된 얘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들은 얘기는 731부대에서 되풀이됐던 끔찍한 생체실험과 세균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해리스는 2002년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줄곧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다룬 역작 <죽음의 공장>(Factories of Death, 초판 1994, 개정판 2002)을 낸 뒤에 세상을 떴다. 그의 책은 한·중·일 3국에 모두 번역됐다(한국어 번역본은 2005년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으로 초판이 나왔으나 절판됐고, 2010년 <미국의 은폐기록과 일본의 만행>으로 제목이 바뀌어 다시 나왔다).

희생자는 3000명보다 훨씬 많아

해리스의 관심 사항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731부대의 전쟁범죄로 희생됐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앞에서 봤듯이, 731부대 세균부장 카와시마 군의소장은 '세균 실험으로 사망한 죄수는 1년에 600명 미만'이라 했다. 5년쯤 이런 규모로 '마루타'가 희생됐다면, 30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산술적 추정이라는 것이다.

카와시마 군의소장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의 신임을 받았던 최측근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하바롭스크 법정에서 증언할 때 상관인 이시이에게 누가 될 전쟁범죄를 제대로 털어놓길 바라기란 틀린 일이다. '1년에 6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해리스는 실제 희생자 규모에 견주어 3000명은 턱도 없이 적은 숫자라 여긴다. 그는 '3000명이란 숫자는 1941년 이전에 이시이가 죽인 희생자 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1941년 카와시마가 731부대로 배속되기 전에도, 이시이 시로의 지휘 아래 그곳에서는 생체실험이 진행돼 왔었다. 이시이가 생체실험으로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만주로 온 1933년 도고(東鄕)부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리스는 731부대 본부가 자리 잡은 핑팡(平房)뿐 아니라 그 이전에 도고부대가 자리했던 베이인허(北運河)에서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이 이시이의 실험에 제물로 사라졌다'고 본다.

베이인허나 핑팡뿐 아니다. 731부대의 다렌(大連) 출장소와 소련 국경에 가까운 무단강(牧丹江), 린커우(林口), 슨우(孫吳), 하이라루(海拉) 등 4개 지부, 안다(安達)과 하이라루지역의 야외 실험장에서도 생체실험이 이뤄졌다. 731부대 말고도 창춘(관동군 군마방역창,100부대), 베이징(1855부대), 난징(1644부대), 광둥(8604부대), 싱가포르(9420부대) 등 '이시이 기관'에 속하는 모든 조직들은 생체실험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일제가 1945년 패전 무렵에 관련 자료들을 모두 폐기·소각해버렸기에, 전체 희생자 규모를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다. 해리스도 '전체 희생자 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추정할 뿐이다.

▲ 1945년 8월19일 소련군에게 항복한 뒤 무장해제하는 관동군. 시베리아로 붙잡혀 간 일본군 60만 포로 가운데 731부대원은 100명쯤이었고 그 가운데 8명이 전범재판을 받았다. ⓒ위키미디어

일본군 물러난 뒤 페스트로 3만 사망

1945년 8월17일 소련군은 핑팡의 731부대를 점령했다. 그에 앞서 일본군들은 최후의 마루타 40명을 독가스로 죽이고 불태웠고, 공병 1개 중대를 동원해 건물을 폭약으로 파괴하고 도망쳤다. 소련군 병사들이 그곳을 접수했을 때는 엄청난 숫자의 쥐떼와 더불어 기니피그, 토끼, 염소, 양 같은 동물들이 무너진 기지 안팎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병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페스트 쥐벼룩을 몸에 지닌 쥐떼였다. 일본군이 도망치면서 731부대 안에 (페스트균 폭탄 개발을 위해) 잡아 두었던 쥐들이 모두 풀려났다. 그로 말미암아 731부대 기지가 있던 핑팡은 물론 가까운 하얼빈 등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았다.

[희생자는 전쟁이 끝난 뒤로도 계속 늘어났다. 1946년, 1947년, 그리고 1948년에도 생체실험 부대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대규모로 전염병이 유행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핑팡과 인근 지역에 페스트가 창궐했으며 하얼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47년 일어난 대규모 페스트는 하얼빈뿐만 아니라 동북부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3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1945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서 페스트 전염병이 창궐한 적은 없었다](샐던 해리스, 158쪽).

페스트뿐 아니다. 일본군이 파놓은 수많은 화학무기 엄폐물 가까이에 살던 중국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731부대는 독가스를 비롯한 화학무기도 개발하려고 각종 실험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 곳곳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에도 CW(화학무기) 비축창고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관동군은 만주 벌판을 거대한 생물·화학 무기 실험장 겸 비축장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 점령 당시의 화학무기 때문에 죽어간 희생자 수는 해마다 2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 후에 중국에서 찾아내어 버려진 CW 무기와 독극물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2001년 4월 중국정부는 중국 동북부에 거의 200만 점이 넘는 화학무기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이런 화학무기들은 심하게 마모되고 녹슬어서 아주 위험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샐던 해리스, 159쪽).

"누구냐 물으면, 죽은 사람 이름을 대자"

▲ 731부대와 가까운 하얼빈 시내를 행진하는 소련군. 731부대를 접수한 소련군 병사들은 페스트균에 오염된 쥐떼를 목격했다. ⓒ주한러시아대사관

731부대는 소련 국경에 가까운 무단강(牧丹江), 린커우(林口), 슨우(孫吳), 하이라루(海拉) 등 4곳에 지부에 두고 있었다. 이들 4개 지부는 소련과의 전쟁이 터질 경우 세균전을 펼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는 일본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지부에 있던 대원 100명쯤이 소련군에 붙잡혔다. 일본군이 급속도로 무너지는 바람에 미처 도망갈 겨를도 없이 포로가 됐고, 관동군 고급장교들과 함께 전범재판에 붙여졌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관동군 71만 병력 가운데 시베리아로 끌려간 포로는 60만 명에 이르렀다. 그 포로 가운데는 아사에다 시게하루(朝枝繁春) 육군 참모가 있었다. 아사에다는 8월10일(일설에는 8월11일) 신징 군용비행장 격납고에서 이시이 시로를 만나 731부대 철수와 관련한 육군 참모총장의 훈령을 직접 전했었다(연재 56 참조).

아사에다는 이시이를 만난 뒤 다른 공작 임무를 펴다가 탈출 기회를 놓치고 붙잡혔다. 소련군은 그를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등 관동군 고급장교들과 함께 하얼빈 부시장 관사에 임시로 가두어 두었다. 그곳에서 아사에다는 앞으로 있을 소련군 심문에서 731부대의 범죄행각을 감추기 위해 입을 맞추려 했다.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일본의 양심적인 의료인들이 낸 자료집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본다.

"이시이부대(731부대)에 대해선 반드시 조사가 진행될 텐데, 사실이 발각되면 국제문제가 됩니다. 나아가 폐하께도...(누가 됩니다). 따라서 그 부대는 육군성 의무국 관리 아래 있어 참모본부와 관동군사령부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고 합시다. 다만 전혀 모른다고 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될 테니, 들어본 적은 있다 하고, 누구에게 들었냐고 따져 물으면 태평양전선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대는 것으로 합시다."(15년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73쪽)

한 약삭빠른 일본군 참모가 잔꾀를 낸다고 냈지만, 떠오르는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진상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소련 심문관들은 그렇게 어리숙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세균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관련 정보를 얻어내려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잇단 대질 심문 끝에 전쟁범죄의 진상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소련은 앞날의 세균전에 대비한 두툼한 문서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10~25년 강제노동형 복역 중 1956년 풀려나

1949년 12월 25~29일 사이에 하바롭스크에서 '소련 최고 소비에트 주석단'(재판장 체얼트코프, 소련군 소장)의 주재 아래 전범재판이 열렸다. 피고석에 선 자들은 관동군 지도부 4명, 731부대원 8명 등 12명이었다. 이들은 본 재판에 넘겨지기에 앞서 12월 12~25일 사이에 예심을 거쳤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관동군 고급지휘관들이고, 다른 하나는 731부대원들이었다.

관동군 출신 피고는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강제노동형 25년), △군의부장 가지쓰카 류지(梶塚隆二, 군의중장, 강제노동형 25년), △수의부장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隆篤, 수의 중장, 강제노동형 25년) △제5군 군의부장 사토 슌지(佐藤俊二, 군의소장, 강제노동형 25년) 비롯한 4명이었다.

731부대에 속했던 피고는 △세균제조부장 카와시마 기요시(川島清, 군의소장, 강제노동형 20년), △세균제조과장 가라사와 도미오(柄沢十三夫, 군의소좌, 강제노동형 20년), △같은 세균제조과장 니시 도시히데(西俊英, 군의소좌, 강제노동형 20년), △하이라우 지부장 오노우에 마사오(尾上正男, 군의소좌, 강제노동형 20년) △무단강 지부장 히라자쿠라 젠사쿠(平桜全作, 군의소좌, 강제노동형 10년) △연구원 미토모 가즈오(三友一男, 수의중위, 강제노동형 15년) △위생병 2명(강제노동형 2년, 3년) 등 8명이었다.

이들 피고들에게 걸린 혐의는 세균무기를 준비하고 실제로 사용한 죄였다. 731부대 간부들이 '마루타' 생체실험과 세균무기 개발과 살포를 부인 또는 축소하려 애를 써도 헛수고였다. 일반 전쟁포로로 붙잡힌 731부대원들이 법정 증인으로 나와 그들의 끔찍했던 생체실험 등 죄악상을 털어놓았다.

▲ 1956년 중국 선양에서 일본군 전범들을 피고석에 세운 특별군사법정. 731부대와 관련해 기소된 전범자는 11명이었다. ⓒ하얼빈 731부대 죄증진열관

"731의 목적은 전염병 재앙 일으키는 것"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1881-1965)도 처음엔 버텼으나 결국은 입을 열었다. 그는 1945년 봄 육군성으로부터 '세균무기를 증산하라'는 통지를 받았고 패전 직전까지 731부대의 세균전 준비를 지휘했다고 밝혔다(연재 55 참조).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731연구소장 진청민(金成民)은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의 검찰 쪽 '법정 의학검사위원회'가 내린 결론을 이렇게 옮겼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세균무기를 연구·제조하고 세균무기의 사용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제조된 세균무기의 사용은 군대를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부녀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주민들의 생명 안전도 위협했다. 가축 살상뿐만 아니라 곡식을 훼멸시키기도 했다. 세균무기를 연구·제조한 목적은 전염병 재앙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흑룡강 인민출판사, 2008. 900쪽).

하바롭스크 법정의 피고들은 △특수부대를 설립하고 세균전을 준비 실시한 혐의 △산 사람을 상대로 흉악무도한 생체실험을 실시한 혐의 △몽골인민공화국과 중국 침략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한 혐의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 12명은 교정노동수용소에 갇혔다. 단기 징역형을 받은 위생병 2명은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고, 나머지는 1956년 일본-소련 사이의 외교관계가 트이면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련, 비밀리에 일본인 3000명 처형

총살형이든 교수형이든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들이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생체실험으로 사람들을 고문해 끝내는 죽음에 이르도록 했던 끔찍한 죄의 무게에 견주면, 더구나 그 희생자의 고통과 유족들의 원통함을 떠올린다면, 무겁게 매겨진 판결이라 볼 수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공개재판에서의 얘기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이 열리기에 앞서 비밀 처형이 대규모로 이뤄졌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1945년 8월8일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 다음날 벌어졌던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로 관동군은 금세 궤멸되면서 60만 넘는 포로가 생겼다. 그 가운데 3000명이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은밀하게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형된 개개인들에게 나름의 전쟁범죄 혐의가 따라붙었겠지만, 노일전쟁(1904)과 할힌골전투(노몬한전투, 1939) 등을 거치며 쌓여온 적개심과 보복심리도 조금은 작용했을 것이다. 존 다워(MIT 명예교수, 역사학)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책(Embracing Defeat, 1999)에서 관련 내용을 보자.

[만주 731부대와 연관된 일본인 12명을 피고로 하여 1949년 12월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재판의사록은 1950년에 영어로 번역됐다(535쪽 분량). 그 내용을 보면 소련이 비밀리에 최대 3000명의 일본인을 전범으로 처형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민음사, 2009, 583쪽).

존 다우어에 따르면, 일본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재판(도쿄, 하바롭스크)을 분석한 1978년 소련의 연구결과물에도 3000명의 일본 전범자들이 소련에서 처형됐다는 내용이 들어있다(L.N. Smiron과 E.B.Zaitsev가 함께 쓴 소련어 원서의 일본어 번역판 <東京裁判>(大月書店, 1980, 517쪽. 존 다우어, 814쪽 주석 참고).

선양(瀋陽) 전범재판, 731부대 관련 11명 단죄

중국에서는 1956년 일본군의 세균전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가 이뤄졌다. 중일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11년 만에 뒤늦게 전범재판이 열린 데엔 여러 사정이 있었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로도 중국은 이른바 국공(國共)내전으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할 때까지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에 맞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내전 승리 뒤로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안팎의 적대적인 환경 아래 있었다. 그렇기에 전범재판을 열 여유가 없었다.

1956년 무렵 랴오닝성 푸순 전범관리소에는 1000명가량의 전쟁포로들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있던 이들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21일 열차에 태워져 중국으로 넘겨졌다. 참고로, 1950년 당시 푸순감옥의 일본인 수감자는 982명이었다. 구성은 일반군인 667명, 헌병 116명, 특수경찰 155명, 행정인력 44명. 이들 가운데 장군은 35명이었다(푸순전범관리소박물관 소개 웹사이트 참조).

1956년은 일·소 국교회복에 즈음해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던 전범들이 모두 풀려나던 해다. 중국도 그에 맞춰 일본 전범 가운데 45명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기소 면제 형식으로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풀려난 수감자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를 만들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반전평화운동을 벌였다(중귀련에 대해선 김효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서해문집, 2020 참조 바람).

1956년 6∼7월 사이에 열린 랴오닝성 선양(瀋陽) 특별군사법원(재판장 자첸, 중국군 군법소장)에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검찰원 검찰관이 731부대와 관련해 기소된 전범자는 1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731부대 소속으로 소련 국경 가까운 린커우(林口)에 배치된 162지대장이었던 사카키바라 히데오(榊原秀夫, 군의소좌도 있었다.

▲ 소련 국경 가까운 린커우(林口) 162지대장이었던 사카키바라 히데오(榊原秀夫, 군의소좌)가 중국인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그는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하얼빈 731부대 죄증진열관

"세균무기 썼다면, 소련군 대량 살상하고도 남았다"

중국 중앙기록보관소는 지난 2014년 7월10일 사카키바라가 자신의 전쟁범죄를 고백한 친필 공술서를 공개했다. 1908년생인 그는 1936년 군의관으로 만주에 파견돼 '악마의 의사' 이시이 시로의 부하가 됐다. 소련군을 피해 재빨리 도망쳐 나온 뒤 중국인민해방군에 들어갔지만, 나중에 죄상이 드러나 만주 푸순전범관리소에 갇혔다.

푸순에서 그가 남긴 공술서에는 1945년 4월 헤이룽장(黑龍江)성 안다(安達)현의 야외 실험장에서 탄저균이 든 도자기 폭탄으로 생체실험을 했던 상황이 쓰여 있다. 이시이 시로가 731부대장으로 돌아온 한 달 뒤의 일이다.

"야외실험장에서 25~30m 간격으로 묻혀 있는 기둥에 중국 민간인 4명을 묶었다. 경폭격기 한 대가 연습장 상공 150m 고도에서 도자기 폭탄을 투하했다. 나는 보호복을 입고 500~600m 거리에서 이 참혹한 광경을 봤다. 도자기 폭탄에는 무서운 살상력을 지닌 탄저균이 들어 있었다. 호흡기에 침투하면 폐에 탄저병이 생겨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는 매우 잔인한 범죄이고, 나 역시 이 범죄에 가담했다." (<인민일보> 2014년 7월11일, 11면)

사카키바라는 자신의 162지대에서 장티푸스균과 A형 파라티푸스균을 배양했고, 그 균들이 든 시험관들을 731부대 1부 독성 검사반으로 보냈다. 그 균들은 731부대 1부가 보관하던 균종의 표준 독성에 딱 들어맞았다. 사카키바라는 1945년 3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중국 농민들이 쓰는 우물 안에 세균이 든 시험관을 던져 넣어 민간인 4명을 죽였다고 털어놓았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1945년 8월 라디오를 통해 소련군과의 전쟁 소식을 들었다. 즉시 차량 출동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본부의 철수 명령에 따라) 지부에서 사육하던 동물은 말을 제외한 쥐, 흰쥐, 해리, 토끼, 벼룩, 세균 모두를 731부대로 이송했다. 지대의 모든 건물에 볏짚을 넣고 휘발유를 충분히 뿌린 뒤 트럭과 모든 실험 장비도 함께 소각했다. 세균전을 준비했던 모든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인민일보> 2014년 7월11일, 11면)

사카키바라의 공술서에 따르면, 당시 731부대가 갖고 있던 세균무기들을 중국·소련 국경 지역에 살포했다면, '소련군을 대량 살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소 양국의 일반 국민을 살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기습으로 철수를 서두르는 바람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사카키바라는 징역 13년을 언도받았다).

피고인들의 다수는 항일 투사들을 731부대로 '특이급'(特移扱, 특별수송)했던 관동군 헌병대 지휘관들이었다. 사이토 요시오(斎藤美夫, 헌병대사령부 경무부장, 소장), 시무라 유키오(志村行雄, 하이라얼 헌병대장, 중좌), 우쓰기 다케오(宇津木孟雄, 자무쓰 헌병대장, 중좌), 요시후사 도라오(吉房虎雄, 다렌 헌병대장, 중좌), 기무라 미쓰아키(木村光明, 청더 헌병대 특고과장, 소좌) 등이었다.

중국 특별군사법정에서의 판결은 엄중했다. 사이토 소장에겐 징역 20년, 사상범을 다루는 특고(특고) 헌병이었던 기무라 소좌에겐 징역 16년, 나머지 헌병 장교들에겐 징역 12~15년의 중형이 내려졌다. 이들이 '특이급'해 '마루타'로 숨져간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그런 형벌이 결코 무겁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만주 푸순전범관리소에 갇혀 있던 일본 전범들은 1964년 4월 마지막 전범 3명의 석방을 끝으로 모두 풀려났다).

소련과 중국은 731 전범 처벌, 미국은 실익 챙겨

731부대의 일부 대원들은 소련과 중국에서 전범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악마의 의사'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과 핵심 간부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이 도쿄 전범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체포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의 지침을 받은 조지프 키넌(도쿄전범재판 수석검사)은 이시이 체포는커녕 그를 감싸주었다.

소련은 이시이를 비롯한 731부대의 간부들을 붙잡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법적 정의보다 실익을 챙기려 했다. 731부대의 세균전 정보가 국가안보 차원에서 매우 가치가 크며, 이시이 일당을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이롭다고 여겼다. 실리 추구는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 실현보다 늘 앞서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가 소련군에 붙잡혔다면 하바롭스크 법정 피고석에 섰을까. 소련도 미국처럼 그의 사면 또는 감형을 조건으로 거래를 하면서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려 했을까. 소련도 세균전에 관심이 컸던 만큼 '더러운 거래'를 마다하지 않았을 듯하다.

교활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이시이는 미국이 세균전 정보를 탐낸다는 사실을 곧 알아챘다. 미국은 4차에 걸쳐 잇달아 조사관들을 파견했다. 이시이는 조사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다. 막판엔 그의 전쟁범죄를 없던 일로 덮어주는 '사면 보증서'를 문서로 요구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다음 주엔 이 '더러운 거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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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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