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당해도 결국 이긴다는 소식은 일본에서도 힘이 될 것입니다"

[기고] 아사히글라스에 맞선 한일 노동자 연대투쟁의 기록

"도움? 신세? 우리가, 신세를 졌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신세는 저희가 9년 간 진 걸요.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인사가 오간다. 한쪽은 한국말이 서툴다. 아닌가. 일본 사람인데 한국인과 소통이 가능하니, 한국말을 잘 한다고 해야 하나. 이들은 아사히글라스지회(노동조합)의 싸움에 연대해온 일본 활동가들이다. 지난 15일, 한국을 찾았다.

국경을 넘은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7월, 아사히글라스지회는 일본행을 결정한다. AGC화인테크노코리아(아사히글라스) 본사가 일본에 있었다. 농성 천막을 세운 지 이제 20여 일.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지회에서는 조합원을 한 명밖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낯선 타국에 가는 떨리고 부담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멀리서 와주어서 감동이었습니다. 민동기(조합원) 씨는 많이 어색해했는데요. 솔직히 첫 만남이라 일본 사람들도 긴장을 했습니다. 아사히글라스 츠루미 공장이 카나가와현에 있어 함께 선전전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번에 또 볼 거라 생각하진 못했습니다."(가마타 요시코)

아사히글라스지회는 그 후로 6차례나 일본을 방문한다. 일본 연대자들이 두 번째 만남을 생각하지 못했듯, 이들도 이토록 오래 싸우게 될 줄 몰랐다. 투쟁 10년이 되는 올해, 일본 연대자들이 한국에 방문했다. 아사히글라스지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온 첫 방문이다.

▲ 일본 연대자들이 가져온 붉은 현수막엔 ‘AGC(AGC화인테크노코리아)는 정규 고용! 조합원 22명 전원. 불법 파견 규탄!’이라 새겨져 있다. ⓒ희정

1월 15일 첫날, 만나다

"제 이름은 사토 마사카즈라고 합니다." 한국말이 나오자, 어색한 분위기가 살짝 풀어진다.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과 일본에서 온 이들이 마주 보고 앉았다. 도로를 따라 길게 낸 농성장이라, 줄지어 마주 앉은 모양새다. 사토 씨가 "결의를 다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농성장이다. 수년을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다.

"도로치바 노조가 국철 분할 매각 반대 투쟁을 할 때, 우리 조합원들이 내부 회의를 하며 결의를 다지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투쟁을 하기 전에 다짐과 결의를 하는 자리 같은, 그런 느낌을 농성장 천막에서 받았습니다."

사토 씨는 도로치바(국철치바동력차) 노조의 부위원장이다. 1987년, 일본 정부는 국유철도를 JR 계열사 등 7개 회사에 분할매각했다. 일본 지하철이 이용이 복잡하고 환승 비용 높은 것은, 이때의 민영화 결과이다. 이 민영화에 맞서 싸운 대표적 노조가 도로치바. 물론 보복이 따랐다. 파업에 참가한 40여 명이 해고됐다. 당시 함께 싸웠던 다른 노조까지 합친다면 해고자는 천 명이 넘는다. 복직 싸움이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미즈 쇼지입니다." 시미즈씨는 아사히글라스지회를 지원하기 위한 아사히투쟁지원공투(이하 지원공투)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잘 부탁합니다. 가마타 요시코라고 합니다." 가마타 씨는 도로치바 노조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편의점 노조 소속이기도 하다. 아사히글라스가 일본을 방문한 첫해부터 함께한 이다.

"안녕하세요. 오키야마 요시타다입니다." 요키야마 씨도 국제연대위원회 소속. 한국 민주노총(서울본부)에서 일한 경험도 있어 한국말이 유창하다. 통역을 담당한다.

소개가 길었다만, 실제로 농성장에서는 소개하는 데만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조합원들이 이름을 말하면, 일본 연대자들끼리 발음을 확인하고, 가지고 온 인물 사진과 매치해 몇 번을 확인했다. 가마타 씨는 말했다. "이번 방문의 목표는 조합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것입니다." 모두가 일본에 갈 수 없는지라, 6차례 원정 투쟁이 있었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도, 다들 알았다. 일본 활동가들의 연대가 얼마나 놀라운지. 연대는 아사히글라스지회가 일본에 방문한 며칠로 끝나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해 교류가 멈췄던 시간마저, 일본 활동가들은 자기들끼리 거리에서 아사히글라스 문제를 알리는 선전전을 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이야기를 담은 책 <들꽃, 공단에 피다>도 이들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그 책을 읽고 지원공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미즈 씨는 책을 읽고서야, 한국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싸웠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아사히글라스지회 농성장에서 일본 연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합원들. ⓒ아사히글라스지회

1월 16일 둘째 날, 의자에 들려 끌려 나오다

새벽 6시, 소성리로 향했다. 사드가 배치된 곳. 경북 성주 소성리. 지금도 매일 아침 군수 물자가 올라가는 길을 주민들이 막아 세운다. 장작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7시면 길목 한가운데에 앉는다. 연대하는 사람들도 오기 마련인데, 꾸준히 찾아온 이들 중 아사히글라스지회 조합원들도 있다. 오늘은 일본 연대자들도 함께한다.

평화행동 시간, 예배를 보는 사이 경찰의 경고 방송이 들리고 형광 색색의 경찰들이 길가로 나온다. 마을 주민들과 연대자들을 길에서 끌어낼 거라는 신호다. 처음에는 사지를 들어 끌고 나갔는데, 요즘은 행태를 바꾸어 의자째 사람을 들고 간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어 나르는 걸, 일본 사람들도 당해봤을까. 그들에게 경험이 있냐고 물었더니, "산리즈카"라는 이름을 말한다. 산리즈카는 국제공항이 세워진 지역 이름이다. 1960년대 공항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산리즈카 주민들은 반발한다. 도로시바 노조를 비롯해 일본의 시민사회․정치 단체도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반대 투쟁이 거세 공항이 문을 여는 데만 10년 넘게 걸렸다.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 나리타 공항이다.

"오늘 소성리는 산리즈카 투쟁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산리즈카 농민들은 전쟁 직후 황무지를 일궈 논밭으로 만들었다. 그 땅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서 공항을 짓겠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따를 수 없었다. 게다가 하네다 공항이 인근에 있음에도 나리타 공항 건설을 계획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전의 군수기지였던 일본이 군수 물자를 운송할 필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연대자 4명도 예외 없이 길에서 끌려 나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이리 외쳤다.

"마을 길에 미군을 들이지 마라."

"마을 길에 전쟁 물자를 들이지 마라."

전쟁을 위해 작은 마을을 짓밟는 일이 국경을 넘어, 세월을 넘어 계속된다.

"산리즈카는 아직도 투쟁하고 있습니다. 올해 58년째입니다."

시미즈 쇼지 씨가 말한다. 그가 20대였던 시절, 산리즈카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그가 예순이 된 지금도 주민들은 싸운다. 지금껏 보상에 합의하지 않은 농민도 있다. 활주로를 증설할 때마다 싸움이 불거져, 나리타 공항은 제2활주로를 2000년대 초반에야 갖게 된다. 나리타 공황이 야금야금 활주로를 증설하며 규모를 키운 세월 동안, 예순이 된 시미즈 쇼지 씨는 '합동노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한 명이어도 가입할 수 있는 노조입니다." 지역노조를 말한다. 편의점 알바도, 프리랜서도 가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 이들이 처음 한 경험이 있긴 하다. "살아오며 가장 큰 추위였습니다." 사람들이 웃는다. 손발이 얼도록 추운 날이다. 이들이 온 일본 본토 동쪽 지역은 날씨가 온화하다. 노조에서 롱 파카를 준비해서 다행이었다. 겨울 농성이 일상인 이들답게 방한 대비가 철저하다. 일본 연대자 다수가 예순이 넘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팔순 나이다. 소성리 투쟁은 지금 9년째, 이날 평화행동 501차.

"오키나와 미국 기지 반대 투쟁을 할 때도 공사 차량이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와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사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도 노동자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앞서 전쟁에 반대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침략 전쟁을 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국가 안에 있는 노동자로서 한국에 있는 노동자, 주민들과 연대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 소성리의 아침. 평화행동 참가자들을 길가로 끌어내는 모습을 일본 연대자가 촬영하고 있다. ⓒ아사히글라스지회

1월 18일 셋째 날, 외투기업의 면모를 보다

다음날에도 처음 한 경험은 이어진다. 선전전 마치고 농성장에서 먹는 떡국. 폐를 끼치는 일에 엄격한 일본에선 선전전이나 행사를 마치고 음식 대접을 주고받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밥 한 끼라도 먹여 보내야' 하는 한국 정서와는 다르다.

농성장 주방에서 끓인 떡국이 한 그릇씩 돌아간다. "오이시美味しい." 어설픈 일본말을 뱉으니, 가마타 요시코 씨가 진짜 맛있을 때는 '우마이うまい'라고 한다고 알려준다. "떡국, 우마이."

이날 선전전은 AGC화인테크노코리아(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서 진행했다. 첫날 한국 방문 소감을 물었을 때, "조합원들과 일상을 같이 보낼 것에 기대된다"고 했는데. 노조는 아침이면 공장 정문에서 선전전을 한다. 경비실 초소 건물 2층이 불을 밝혔는데, 저곳이 새로 만들어진 정규직 노동조합의 사무실이라고 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조합원들이 정규직으로 회사에 복직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노조라 추측한다.

정문 앞부터 농성장까지, 사람들이 띠 잇기를 하듯 피켓을 들고 선다. 수십 미터 길이 메워질 정도로 참가자가 많다. 구미 지역 제조업체인 KEC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이하 한국옵티칼) 노동조합 사람들이 다수였다.

무슨 우연인지. KEC도, 한국옵티칼도, 아사히글라스도 한국에 온 외투기업이다. 반도체 공장인 KEC는 한국도시바에서 출발했고, 한국옵티칼은 닛토덴코의 한국 자회사이다. 닛토덴코는 테이프 접착제부터 디스플레이 액정 편광판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다.

닛토덴코는 한국 공장에 화재가 나자 "연 매출 4000억 원의 공장을 포기하고 화재보험금 1300억 원만 챙겨 먹튀를 하려"한다. 평택에도 닛토덴코의 자회사(한국니토옵티칼)가 있기에, 노동자들은 무책임한 폐업이 아닌 고용승계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구미 한국옵티칼 공장 옥상에 지금, 2명의 여성 노동자가 농성 중이다. 11일째다(1월 18일 기준).

공업도시라 불리는 도시가 그렇듯, 구미시는 외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 외국자본을 얼마나 유치했는지가 지자체장의 성과로 매겨졌다. 구미시에는 외투 기업을 위해 신설한 공단(구미국가산업4단지)이 따로 있을 정도다. 2004년, 이곳에 일본 기업 아사히글라스가 들어와, 10만 평 부지를 50년간 무상 임대를 약속받았다. 5년간 세금 전액 면제는 덤이다.

"50년 동안 무상 임대가 사실입니까? 다른 외국 기업들도 다 그런 혜택을 받습니까?"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묻는다. 사실이다. 모든 것을 면제받아 세운 수익은, 배당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아사히글라스에 송금됐다.

"일본 본사는 일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선전전이 끝나고 이어진 간담회에서 가마타 씨가 말했다. 일본 연대자들이 아사히글라스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할 때마다 부딪히는 벽이다.

"우리는 일본 노동자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일본 기업이 하는 행동에 대해 일본 노동자로서 항의해서, 이 싸움을 지원하고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 말에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이 덧붙인다.

"일본 기업의 불법 행위를 통제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 역시 문제가 있는 거지요."

불법은 힘의 공조 속에 이뤄진다. 한쪽에서는 규제를 없애고, 제재가 사라진 '자유구역'에서 불법이 만들어진다. 묵인하는 권력이 있다. 그 대가는 주식 배당금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넘나든다.

▲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서 진행한 선전전. 일본 연대자들이 가장 경험하고 싶어한 일정이라고 했다. ⓒ시야

신세 지는 일이 연대인가

간담회를 마무리할 즈음, 한 조합원(안진석)이 이런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하고 싶던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우리 문제로 선전전이나 집회를 준비할 때, 아사히지회도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일본분들이 오랫동안 함께 해주시는 게 저희에게 큰 힘이 되고,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합원 하나 없는 일본 땅에서 자신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선전전이 열린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후에는 고마웠고, 미안했고, 저들은 우리보다 더 큰 시야를 품고 있는가 보다 했다고 한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막 방문한 일본 연대자들은 이리 인사했다. 3박 4일을 의탁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서로가 신세를 졌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의 승리가 일본 노동자에게도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아져서, 함께 행동하고 뭉쳐 조직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해고를 당해도 결국 이긴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일본에서도 힘이 될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줄 겁니다."

불타버린 한국옵티칼 공장 건물을 둘러본 도로치바 부위원장 사토 씨는, 마지막날 열린 문화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공장에서 난 화재는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라 회사 책임입니다. 화재 관리와 예방을 하지 않은 회사의 책임입니다. 자기 책임인 화재가 나자,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기업은 단 한 번도, 심지어 한국옵티칼처럼 회사 문을 닫고 나가려 할 때도 고개 숙여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정작 폐를 끼치고 신세를 지는 것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기업이다.

노동자가 일한 대가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세상이다. 일본을 비롯해 국제 사회를 횡단하는 화폐와 자본도 일하는 사람이 만들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이도 노동자다. 이 세상은 일하는 사람의 노동에 신세 지고 있다. 서로가 노동으로 지고 있는 신세를 이해하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먼 타국의 승리가 내가 발 딛고 선 곳의 희망이 되기에, 아사히글라스의 22명 전원 복직을, 한국옵티칼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산리즈카 공항 반대 투쟁의 승리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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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기록노동자다. 저서로는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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