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더럼과 시리아, 그리고 올드 오크 펍

[영화, 시대를 넘다] 사회주의자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수업

늙고 때론 고집불통일 만큼 완고하며 오소독스(orthodox)하지만 더할 나위없이 존경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주의자 영화감독 켄 로치가 자신의 유작이 될 만한 영화를 찍었다. 지난 해 칸에서 공개했으며, 우리 부산영화제 때도 상영됐고, 그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곧 국내에 개봉된다.(1월17일) 한국 제목은 <나의 올드 오크>이지만 원래 제목은 그냥 <더 올드 오크>이다. 켄 로치는 1936년생이고 우리 나이로 88세이다. 이제 그만 찍을 때가 됐다. 그는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 무던히 애를 써왔고 그만하면 할 만큼 한 셈이다. 켄 로치는 부쩍 지쳤다고 말해 왔다. 놀랍게도 영화를 그만 찍고 싶다고도 해 왔다. 그 같은 심경은 이번 영화 <나의 올드 오크>에서 주인공 TJ, 곧 토미 조 밸런타인(데이브 터너)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TJ는 자신의 레스토랑 안쪽 식당이 누전으로 엉망이 되자 좌절에 빠진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만든 마을의 건달 친구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깡패 놈들은 내가 이민자들에게 좀 잘해줬다고, 갈 곳 잃은 사람들, 못 먹는 애들에게 먹을 것과 입던 것, 쓰던 것들을 조금 나눠줬다고 결국 내 술집 문을 닫게 만들고 있어. 이런 게 내가 40년을 해왔던 일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평생을 잘되려고 했는데 근처에도 못 갔어. 이제 이 나라엔 증오와 거짓과 부패만이 판을 쳐. 나는 이제 그만 할래. 더 이상은 못하겠어."

TJ가 말하는 '깡패 놈들'은 켄 로치 감독이 생각할 때 정치인들, 자본가들이다. 영화 속 '올드 오크 펍'은 켄 로치에게는 영화관을 상징하는 셈이다. TJ가 올드 오크 펍을 통해 마을에서 어떻게든 평화롭게 살아 내려고 노력한 것처럼 켄 로치도 영화를 통해 어떻게든 세상의 이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런데 켄 로치의 판단으로는 그 근처에도 못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봐 오며 성장한 세대들, 영화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켄 로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미 그 '근처'는 지났으며 때론 어려운 지점과 난국을 헤쳐 나갔고 그래서 결국 세상과 시대를 넘어 가곤 했다. 켄 로치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할 수 있게 격려하며, 결국 해내게 만들었다. 켄 로치는 그같은 선생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감독이다. 세계의 모든 영화인들이 그의 노고를 떠받들고 찬양하며, 존경을 바치는 이유이다.

▲ 영화 <나의 올드 오크>(켄 로치 감독, 2023) 스틸컷. ⓒ영화사 진진

▲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영화사 진진

<나의 올드 오크>의 배경은 잉글랜드 북동부 더럼(Derham)이라는 곳이다.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는 맨체스터를 기점으로 공업 도시들이 많고 특히 더럼과 뉴캐슬 지역은 과거 탄광 지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처 정부 시절 약 1000개의 탄광 중 상당 수의 것을 채산성을 이유로 폐쇄시킴으로써 이렇다 할 사회보장책 없이 광부노동자들 대다수가 실직과 하층계급으로 내몰리게 된 곳이다. 동북부 상당수가 쇠락하고 빈궁하며 슬럼화된 지역이 된 이유이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이후 40년 동안 이곳의 정치사회경제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를 보여 준다. 주민들은, 이런 상황인데 거기에 덧붙여서 시리아 이민자들까지 들어 와서 자신들의 복지 문제를 침해하고, 싸구려 노동으로 노동권도 빼앗고, 무엇보다 (자신들처럼 약하고 착한 사람들을) 툭하면 인종차별주의자로 내몰리게 만든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소리친다. 우리 국민이 먼저이다! 소아성애자 외국인들은 꺼져라!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들 동네의 오랜 보금자리인 오래된 참나무 펍에 이들을 들이지 말라며 주인공이자 이 펍의 주인인 TJ에게 시비를 건다.

주인공 TJ는 마을의 오랜 친구 찰리와도 사이가 벌어진다. 그는 오히려 시리아에서 온 어린 여성 야라(에블라 마리)에게 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 둘은 상이한 경험을 했지만 세상이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깝게 서있음을 같이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노련한 사회주의자 켄 로치는 세상의 문제가 더 크고, 더 깊게 씨줄날줄로 연결돼 있음을 영화의 줄거리로 요약하되 단 한줄의 대사로 그것을 제시하는 놀라운 식견을 보여준다. 더럼의 옛 광부들의 문제와 시리아 난민의 문제,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의 70년 철통의 잔혹한 독재 탄압 정치, 그로 인한 중동 사태가 어떻게 잉들랜드 북동부 지역으로까지 퍼져 왔는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하여, 켄 로치는 <나의 올드 오크>를 통해 말한다. 더럼의 문제를 풀면 시리아 난민의 해법이 보일 것이고 시리아 독재 정권이 문제를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하려 애쓰면 더럼 광부의 생존권 문제, 이 지역의 부동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그런데 여기 더럼도 집값 문제야 말로 주민들을 가장 부글거리게 만드는 요소중 하나이다.) 이건 같은 문제이지 다른 문제가 아님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연결점을 잘 찾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분쟁만이 난무하고 있음을 그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TJ는 어떤 면에서 자신을 '배신'한 오랜 친구 찰리를 찾아 가 이렇게 말한다. "삶이 힘들 때 우리는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내놓은 영화인 만큼 켄 로치는 영화 곳곳에 자신의 낙관 같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어록을 박아 넣었다. 이념적 대사와 에피소드를 자연스럽게 매칭시키며 서사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감독은, 켄 로치 외에 그닥 뛰어난 인물은 없다. 켄 로치는 이번 영화에서 자신이 가진 오랜 기량을 마음껏 구사해 낸다.

▲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와 사진작가가 꿈인 소녀 야라. ⓒ영화사 진진

예컨대 이번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TJ와 야라의 동질화 작업을 위한 에피소드를 몇 개로 나뉘어 병치시킨다. TJ는 4년 여전부터 애지중지해 온 강아지 마라를 잃는다. 그 슬픔을 달래러 온 야라와 그녀의 어머니는 시리아 식 음식으로 그의 슬픔을 달래 주려 한다. 슬플 때는 먹어야 한다면서. 야라의 재단사 아버지가 시리아에서 결국 샤비하(독재자 알 아사드의 친위 민병대) 손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TJ가 처음 하는 일 역시 음식을 들고 그녀에게 찾아가는 것이다. TJ와 야라는 과거 탄광 노동자들의 가르침, 곧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의 가치를 실천하려 한다. 인간에겐 이념과 빵 모두가 중요하다. 켄 로치는 과거 자신의 영화 <빵과 장미>(2002)의 테마를 다시 한번 되새겨 준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어쩌면 그 연장선에 있는 영화이다.

▲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영화사 진진

켄 로치는 늘 직설적이지만 이번엔 더욱 쉽고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희망은 고통을 주고 역설적이게도 절망은 종종 강한 의지를 우리에게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용감한 희망이지 비겁한 절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정신분석학과 자본주의 사회학은 늘 분명한 정의를 내리는 데 주저하지만 사회주의는, 정통 사회주의는, 세상은 항상 희망적이라 말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가 안타까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정통 사회주의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거나 매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나 거기나, 잉글랜드나 한국이나, 세상은 그 어디나 같은 문제의 질곡에서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셈이다.

켄 로치는 증오와 거짓 부패의 시대에 맞서 용기와 연대 저항을 보여주라고 부추긴다. 그의 부추김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건 늘 그래 왔다.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슈크란(땡큐의 시리아 어) 미스터 밸런타인. 슈크란 켄 로치.

▲ 영화 <나의 올드 오크>(켄 로치 감독, 2023)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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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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