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말린 미군 장성 "우리가 야만인으로 고발당할 수 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0]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㉑ 드레스덴 공습 下2

미국의 논픽션 작가 에릭 라슨은 제2차 세계대전 초반부에 벌어졌던 독일의 런던 대공습에 초점을 맞춰 <훌륭한 사람들과 악랄한 사람들>(The Splendid and the Vile, 2020)이란 책을 냈다. 이 책 앞머리에서 라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미 폭격이 전쟁의 중요 수단으로 사용됐음을 전하고 있다. 관련 내용 일부를 옮겨 본다(한국 번역본 제목은 원서 제목과는 다르다).

[독일의 비행선들은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공습으로 영국에 폭탄을 떨어뜨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대량살상을 저질렀다. 첫 번째 폭격은 1915년 1월19일 밤이었고, 그 뒤 50회가 넘는 폭격이 뒤를 이었다. 영국의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던 거대한 비행선은 162톤의 폭탄을 떨어드려 55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뒤 폭탄은 점점 더 커지고 더욱 치명적이고 더 정교해졌다](에릭 라슨, <폭격기의 달이 뜨면> 생각의힘, 2021, 17쪽).

커다란 비행선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폭탄을 떨어뜨리던 시절의 전쟁 모습을 지금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무차별 공습으로 비무장 민간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전쟁들이 20세기 들어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민간인 희생자가 전투원보다 더 많은 까닭

제1차 세계대전에선 20세기 과학문명의 산물들이 살상용으로 쓰였다. 전차(탱크)와 전투기가 처음 선을 보였고, 이에 따라 공중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공습이 낯설지 않게 됐다. 화학가스도 무차별로 뿌려졌다. 파괴력이 높은 이런 무기들 탓에 앞서 일어났던 그 어떤 전쟁들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사망자는 군인 800만, 민간인 700만, 부상자 2,200만 추정).

전쟁 당사국들이 남녀 가리지 않는 국가총동원 체제 아래서 총력전(total war)을 펼쳤던 제2차 세계대전에선 적어도 5000만 명, 많게는 7000만 명의 사망자가 생겨났다. 논란이 되는 것은 전란에 휩쓸린 민간인들의 희생 규모다. 제1차 세계대전에선 그래도 전투원 사망자 숫자가 비전투원보다는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상황이 바뀌었다. 비전투원 민간인 사망자가 전투원 사망자보다 훨씬 많이 생겨났다.

연구자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전투원 사망자보다 많다는 데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로저 치커링(조지타운대, 역사학)과 스티그 푀르스터(독일 베른대, 역사학)에 따르면, 전투원 사망자는 1500만 명인데 견주어, 비전투원(민간인) 사망자는 4500만 명으로 3배나 차이가 난다(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 편, <A World at Total War: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3쪽).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 전쟁의 민간인 희생자 상당수는 공습으로 숨졌다. 장거리 폭격으로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B-17, B-29나 영국의 랭커스터 같은 장거리 중폭격기가 나타났고 △소이탄(네이팜탄)과 원자폭탄 등 파괴력이 뛰어난 대량살상무기들이 공습 희생자를 늘리는 데 큰 몫을 했다. 공습이 없었다면 살아남았을 생목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죽음의 비'를 맞고 숨져갔다.

공습이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나타나고 사망자들이 늘어나자, 국제사회는 나름의 공습 규칙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진 않았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앞장 선 끝에 26개국 대표가 모였던 제1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1899)에선 '열기구(balloon)로부터의 발사체 및 폭발물 투하 금지에 관한 협약'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1900년부터 1905년까지 5년 동안만 적용되는 한계를 지녔다.

제2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1907)에서도 '열기구로부터 발사체 및 폭발물 이용금지에 관한 선언'이 채택됐지만, 이 선언도 이름뿐으로 끝났다. 규제 대상이 '일체의 항공무기'가 아닌 열기구뿐이었고, 여기에 서명한 주요국도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그쳤다(미국조차도 뒤에 탈퇴).

그 뒤 워싱턴 군축회의(1922)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위원회가 1923년 공전규칙안(Code of Rules of Aerial Warfare)을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조약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이 규칙안 24조에 따르면, 공중폭격은 교전자에게 군사적 이익을 줄 수 있는 군사목표만을 겨냥하도록 했다). 이어 제네바 군축회의(1932-1934)에서 공습에 관한 문제가 토의되었지만, 협정 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이민효, 「공전에 적용될 하버드 국제법 매뉴얼에 관한 연구 1」해양안보포럼 제40호, 2019년 8-9월호 참조). 그러면서 우리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 공습 희생자를 낳았다.

▲ 1943년 7월28일 함부르크 상공의 연합군 폭격기들. 전쟁 후반부에 도심 주거지역을 겨냥한 폭격은 60만에 이르는 독일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다. ⓒ위키미디어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하는 '지역 폭격'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 인간은 삶의 질을 높이고 수명을 늘렸다. 하지만 군사 분야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파괴력과 살상력을 높이는 무기 개발로 이어졌다. 공습과 관련된 군사전략도 인명살상과 파괴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전략 폭격'(strategic bombing)이란 그럴듯한 이름 아래 독일과 일본에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다(독일 140만톤, 일본 82만 톤). 여기서 '전략 폭격'이란 공장과 철도 등 주요 전쟁시설물을 파괴함으로써 적의 전투력과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폭격기들이 조준기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 목표물을 겨냥한다 해도, 하늘 높이 비행을 하며 땅 위 목표물을 제대로 맞히기란 쉽지 않다. 구름이나 비바람 등 기상 악조건도 걸림돌이었다. 공습 목표에서 수백 미터, 심지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 주간 폭격의 경우 대공포 또는 요격기에 걸려 추락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출격을 나갔다가 전사한 영국 공군은 5만5573명으로 사망률이 45%에 이르렀다. 영국 주둔 미국 제8비행단은 2만6000명의 전사자를 냈다(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1081쪽 참조).

그러자 영국군은 주간 폭격에서 야간 폭격으로 공습 방식을 바꾸었다. 1942년 봄 영국에 기지를 마련한 미 제8비행단은 주간 폭격을 주로 맡아 해냈다. 이런 역할 분담은 1943년 1월 초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영미 두 지도자(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가 만났을 때 이뤄졌다. 어둠을 타고 목표지점에 다가가기에 야간 출격은 대공 포화나 전 전투기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군에서 쓰는 용어로 '소모율'(추락 등으로 기지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율)이 낮아졌다.

'폭격기 해리스'가 이끄는 영국군 폭격기사령부는 공습 목표도 '지역 폭격'(area bombing)으로 바꾸었다. 특정 군사 목표물이 아닌 도시 지역 전체를 겨냥해 폭탄을 떨어뜨리는 방식이기에 명중률을 따지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도시 전체를 겨눈 마구잡이 폭격으로 말미암아 비전투원(비무장 민간인) 희생자들을 낳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간인을 겨냥한 공습테러, 테러공습

이 연재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벌이면서 난징(南京) 학살과 더불어 충칭(重慶)을 비롯한 도시들을 마구 폭격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의 마구잡이 공습으로 많은 아시아인들을 죽였고, 그 무렵 중국에 와 있던 외국 특파원들을 통해 그 소식들이 전세계에 알려져 질타를 받았다. 일제는 거꾸로 도쿄대공습을 겪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 두 방을 거푸 맞았다. 이로 말미암아 모두 60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죽었다.

어찌 보면, 히로히토를 비롯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죗값을 돌려받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원폭 투하를 비롯한 공습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공포(terror)로 몰아넣으면서 무차별로 대량 살상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테러 행위다. 공습 테러가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피해 정도의 크기를 피라미드를 그린다면,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는 것이 핵폭탄 공격이다. 공습은 원폭투하보다는 희생자가 적더라도 극한 테러 행위다. 하늘로부터 '죽음의 폭탄 세례'를 받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란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한 가늠하기 어렵다.

독일 드레스덴 공습도 마찬가지다.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그곳으로 피란해 왔던 난민들을 포함한 그곳 시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줄여 잡아도 1만8000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습테러, 또는 테러공습이었다. 베를린과 함부르크, 그리고 드레스덴을 비롯한 도시의 시민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치 히틀러 정권을 지지한 '집단적 죄'이겠지만, 그렇다고 민간인을 겨냥한 무차별 공습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같은 공습을 했더라도 패자는 전쟁범죄자로 내몰리고, 승자는 극단적인 테러공습인 원폭을 포함한 무차별 민간인 살상을 저질렀어도 전범재판을 피해갔다는 점이다.

루스벨트, "도시를 공습하지 말자"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들어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바로 그 날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민간인이나 요새화되지 않은 (방어능력이 없는) 도시를 공습으로 공격하지 말도록 하자"(스벤 린드크비스트, <폭격의 역사>, 한겨레신문, 2003, 180쪽). 루스벨트의 이런 제안은 군사목표물에 대한 '정밀 폭격'(precision bombing)으로 공습을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드레스덴공습을 다룬 첫 글(연재 47)에서도 봤듯이, 영국이나 독일의 전쟁지도부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엔 (적국의 군사시설물을 겨냥하며 공습을 하면서) 주거지역에 대한 공습은 삼갔다. 공습으로 민간인을 죽고 다치게 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더불어 적의 보복 공습 등 반작용이 더 클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독일의 지도자들은 루스벨트의 제안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쟁 당사자들은 모두 (루스벨트의 제안에) 동의했다. (처칠의 전임자인)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이미 독일지역 전략폭격을 준비 중이던 영국 공군에게 '정당한 군사목표'에 제한된 폭격을 수행할 것을 지시했고, 독일의 히틀러 또한 독일군이 군사 목표물에 대한 정밀폭격만을 수행할 것이며, 영국 민간지역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발표했다](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33쪽).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민간 주거지역에 대한 '지역 폭격'을 삼가자는 루스베트의 제안은 옳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원칙은 곧장 깨졌다. 1940년 8월24일 밤 런던 외곽의 군사 목표물을 폭격하려던 독일 폭격기가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비롯해 도시지역의 민간인 주거지를 오폭하는 일들이 벌어지자, 서로간의 보복폭격이 벌어지면서 루스벨트의 위 제안은 없던 일이 됐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는 '우린 군사목표물에 대한 정밀 폭격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민간인 주거지역을 폭격하는 일들이 잦았다. 드레스덴 공습 때도 그랬다. 먼저 두 차례에 걸친 영국 공군의 야간 공습이 있은 다음날 아침 미 육군항공대(USAAF)의 B-17 중폭격기 527대가 잇달아 폭격에 나섰을 때 (드레스덴 상공에 덮인 화염과 연기 때문에 군사목표물을 찾지 못했기에) 그냥 도심 지역에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갔다.

▲ 영미 연합군의 잇단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된 드레스덴 시가지. ⓒ위키미디어

"정밀폭격이 정치·군사 측면에서 더 이롭다"

미 육군항공대(USAFF) 제8항공군이 영국에 기지를 마련한 것은 일본의 진주만공습(1941년 12월7일)을 받은 지 3개월쯤 뒤인 1942년 봄이었다. 영국 주둔 미군 폭격기사령관 아이라 이커 중장은 영국 공군(RAF) 폭격기사령관 아서 해리스로부터 매우 정중하고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해리스는 이커 사령관과 호흡을 맞춰 독일의 도시 주거지들을 박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커는 '폭격기 해리스'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군사 시설물을 겨누는 정밀 폭격 원칙을 지키려 했다.

미 육군 제20항공군 사령관으로 (1947년 미 공군이 독립적으로 꾸려지기 전) 미 공군력의 최상급 지휘자였던 헨리 아놀드 장군(최종계급은 원수)도 처음엔 '군사적 목표물에 대한 고(高)고도 정밀 폭격이 우리의 방침'이라 밝히면서, '도시를 겨냥한 소이탄 공격은 군사 목표물만을 공격한다는 우리 방침에 어긋난다'고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런 아놀드 장군의 정밀 폭격 방침을 지지했다. 영국의 해리스가 고집하던 (도시 주거지역을 겨눈) '지역 폭격' 공습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폭격기 해리스'의 명령 아래 야간 출격으로 독일 도시들을 마구 폭격했던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 폭격기와는 달리, 미 B-17 폭격기들은 주간 '정밀 폭격'을 집중함으로써 (위 루스벨트의 제안에 발 맞춰) 민간인의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줄이려 했다. 미국이 '정밀 폭격'을 고집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은 정밀폭격이 지역폭격보다 (전쟁범죄라는 비난을 안 받고 적의 전투의지와 보복심리를 자극하지 않기에)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훨씬 더 이롭다고 보았다. 또한 소이탄을 사용한 대량파괴는 우둔한 짓이며, 적국 산업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 타격을 가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김태우, 38쪽).

위 글 속의 '정치적 측면'이란 도심 지역폭격을 함으로써 적국의 전투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보복 폭격을 낳은 악순환을 가리킨다. 도심지역 민간인 대량 희생을 낳기 마련인 공습은 나아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이 따르는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

루스벨트, "독일을 거칠게 대해야 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전쟁 후반부에 이르러 생겨난 미군 지휘부의 태도 변화다. 처음엔 '군사 시설물에 대한 주간 정밀 폭격' 원칙을 지키려 했지만, △1944년 한 해 동안 폭격기 2,400대를 잃는 등 주간 포격에 따른 손실이 쌓여가고 △베를린을 향한 서유럽전선의 상황이 쉽게 풀리지 않자, 정밀 폭격 원칙이 깨져 갔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한 달 넘게 끌었던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로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사에서 '벌지 전투'로도 널리 알려진 아르덴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기습적 공세는 사실상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이었다. 독일군 작전명 '라인강을 수호하라'(Wacht am Rhein)에 따라 기습작전을 펼친 초반엔 독일군이 제법 전과를 거두며 기세를 올렸다. 미군 포로와 사상자가 많이 생기자, 미 공군사령관 아놀드 장군은 물론, 루스벨트 대통령도 마음이 급해졌다. 대규모 폭격으로 반격에 나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전쟁지휘부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 이전부터 독일을 무차별 폭격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미 전폭기들도 그런 방침을 따라왔다. 아라이 신이치(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의 글에서 1944년 8월에 나왔던 루스벨트의 유명한 '독일인 거세' 발언을 보자.

"우리는 독일을 거칠게 대해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치스에 대해서가 아니라 독일인에 대해서다. 우리가 독일인을 거세하든지, 아니면 과거에 하던 대로 계속하려는 사람들이 (전쟁 물자를) 재생산을 할 수 없도록 그들을 (거칠게) 취급(공격)하든지 해야 한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어문학사, 2015, 124-125쪽).

루스벨트가 유럽 주둔 미군 지휘부에게 던진 메시지를 짧게 줄이자면 '결과를 내라'는 것이었다. 바로 같은 무렵인 1944년 8월 영국의 '폭격기 해리스'가 베를린을 집중 폭격해 도심가를 폐허로 만들어 사기를 꺾겠다는 '천둥 작전'(Thunder Clap)을 내놓았다. 영국 주둔 미 제8항공군 지휘부는 그 작전에 동참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베를린 시민들을 학살하는 비인도적 폭격임이 누가 봐도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 1945년 2월의 엄청난 공습을 용케 견뎌낸 드레스덴 ‘군주들의 행렬’ 벽화. 높이 8m, 길이 102 미터로 역대 군주들의 기마행진이 타일 위에 그려졌다. ⓒ김재명)

아이젠하워, "전쟁 빨리 끝내려면 테러라도 하겠다"

군사 목표물에 대한 '정밀 폭격'을 신념처럼 지닌 스파츠 유럽주둔 공군사령관은 '천둥 작전'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유럽원정군사령관 아이젠하워의 생각은 달랐다.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독일을 좀 더 거세게 몰아붙여 종전을 앞당기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아이젠하워는) "나는 지금까지 늘 미 전략공군에 정밀한 목표를 공격하라고 주장해왔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것에도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면 테러 공격이라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칼 스파츠 장군은 제8공군사령관 제임스 둘리툴 장군에게 "우리는 이제 제한된 군사목표를 공격하는 계획을 버리고 도시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한다"고 통보했다](아라이 신이치, 127쪽).

1945월 2월 드레스덴 공습을 비롯한 독일 도시들을 겨눈 폭격은 그런 분위기 아래 이뤄졌다. 여기엔 미군 폭격기의 노든(norden) 조준장치가 신통치 않은 점도 작용했다. 노든은 미국의 맑은 하늘에선 뛰어난 성능을 보였지만, 독일의 구름 낀 하늘에선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군사적 목표물을 찾지 못한 B-17 승무원들은 싣고 간 폭탄을 도시 어디에든 마구 떨어뜨리고 기지로 돌아가곤 했다.

미군 B-17 폭격기는 머스탱을 비롯한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았다. 1944년 3월 장거리 항속 기능을 지닌 중전투기인 P-51 머스탱이 신예 호위기로 유럽 하늘에 나타나자, 가뜩이나 연료 부족에 허덕이던 독일 공군은 맥을 쓰지 못했다.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각기 1,000기가 넘는 폭격기를 주간과 야간 교대로 운용하면서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다.

미군 장성, "야만인으로 고발당할 수 있다"

드레스덴 공습 바로 뒤인 1945년 2월 22~23일 미 공군은 '클라리온 계획'에 따라 독일을 공습했다.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수송시설을 부수고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로 사람들을 죽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관련 시설물들을 겨냥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일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었다. 공습에 나서기 앞서, 일부 미군 지휘관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미 제8공군의 아이러 이커 중장은 클라리온 계획은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공격이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가 야만인으로 보일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작전을 지휘하는 칼 스파츠 중장에게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보통 시민을 대상으로 전략폭격기를 투입한 것 때문에 우리가 고발당할 수 없다'며 폭격 중지를 요청했다](아라이 신이치, 125쪽).

아이러 이커 장군으로부터 폭격 중지를 요청받은 칼 스파츠 사령관도 앞서 살펴봤듯이 영국 주둔 초기만 해도 영국군 '폭격기 해리스'의 지역폭격 제안을 못 마땅하게 여겼었다. 1943년 무렵의 상황을 다룬 글을 보자.

[칼 스파츠는 1943년 영국의 (다시 말해서 폭격기 해리스의 독일) 지역폭격 참여 권유에 대해 분명히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반드시 제기될 '흙탕물'을 뒤집어 쓰기 싫다고 했다. 스파츠는 개인적으로도 전후 제기될 국제법적 혹은 정치적 심판이 두려웠던 것이다](로날드 베일리, <유럽항공전> 한국일보타임라이프,1982, 188쪽).

위의 두 인용문을 보면, 미군 폭격기사령부의 지휘관들은 영국의 해리스 사령관과는 달리 (군사목표물에 대한 정밀 포격이 아닌)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지역 폭격이 전쟁 끝난 뒤에 전쟁범죄 단죄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기 싫다'는 것은 최고 전시지도자 대신에 일선 지휘관이 공습 행위로 말미암아 전쟁범죄자로 기소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문제의 '클라리온 계획'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 연합국이 전쟁의 승자였기에 고발은 없었다. 영국의 해리스나 미국의 스파츠, 이들의 윗선인 영국의 처칠이나 미국의 루스벨트, 아이젠하워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의 전쟁사가 존 키건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독일의 패전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마구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역사로부터 고발당한다는 것은 전쟁범죄 혐의로 실형을 받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벌이 아닐까 싶다.

글이 길어져 공습의 문제를 다음 주에 한 번 더 다루려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력을 사용하면서 군사 목표물을 겨냥한 정밀폭격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선전해왔다. 하지만 전쟁 후반부에 독일과 일본의 도시들을 마구 폭격함으로써 사실상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미국이 (독일 도시들을 겨냥한 지역 폭격을 고집했던) '폭격기 해리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전쟁사가들의 비판적 글을 길잡이 삼아 이 부분을 좀 더 짚어보려 한다.

또한 다음 주 글에선 영미 연합군의 독일 공습이 효과가 있었나를 따져본 미 전략폭격조사단(USSBS)의 보고서를 짧게나마 살펴볼 참이다. 도시 주거지역에 대한 폭격에 비판적인 USSBS 평가보고서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미 연합군의 공습이 1945년 독일의 전반적인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오히려 공습으로 말미암아 '적국의 저항 의지를 증가시켰다'고 지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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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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