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미국은 어디에 있었나?

[기고] 군사 쿠데타 성공 이틀 후 전두환은 미국 대사관저로 초대됐다

79년 12.12쿠데타를 극화한 영화 <서울의 봄>의 흥행이 요즘 화제이다. 극영화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그닥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대중들 사이에서 한국전쟁 이래 가장 비극적인 겨울밤, 12.12쿠데타에 대해 관심을 일고, 그 주역들이 재조명되는 일은 여하튼 반가운 일이다.

기왕 이렇게 시작된 관심과 재조명이 당시 미국의 정책과 입장까지 확대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이유인즉슨, 서울의 봄의 실패는 미국의 대한국 정책의 실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10.26 박정희 암살 전후와 12.12에 전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입장과 정책을 기밀해제된 외교와 정보 문건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다만, 5.18 광주민주항쟁과 미국은 그 자체가 엄청난 주제이니만큼, 이 글에서는 전개상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따로 다루지 않겠다.

유신 종말을 예측 못한 CIA

유신 체제 6년차, 1978년 말까지도 미국 CIA는 긴급조치라는 포고령에만 의존하는 박정희 정권이 80년대까지 무난히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조사는 6월에 끝냈으나, 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이 공화당을 전체득표율에서 1.1% 앞선 1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에 발행된 "박 대통령과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이라는 문건에서 CIA는 서울에 한정된 대학가의 활동가나 재야 지도자들이 기층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야당은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는 만큼, 재야와 야당이 협력하더라도, 박정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이 한국의 전통에 걸맞다는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물론 이러한 분석에 반대하며, 유신의 종말을 내다본 정보관계자나 국무성 관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재야나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민당이 수월하게 집권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사치품이라는 게 당시 미국 관료와 정보당국의 지배적 믿음이었다.

불과 8개월 만에, 한국인들은 이 분석이 틀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김영삼 총재 하의 보수 야당 신민당이 당사를 YH 여성 노동자들에게 농성 장소로 내줬고, 부산 마산의 시민항쟁 대응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분열은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의 박정희 암살을 재촉했다. 그러나 CIA 분석이 완전히 틀리지만은 않았다. 80년 봄, 광주를 제외한 대도시에서 일반 시민들은 대학생 시위에 대해 냉담하거나, 관조적이었다.

1978년 CIA 보고서는 정확히 8년 후, 1986년 11월, 전두환 집권 말기에 나온 유사한 보고서와 비교된다. "한국: 시한폭탄이 똑딱거리고 있다"라는 제하의 보고서는 당시 동아시아 분석 디렉터가 8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다양한 인사를 만나고 작성한 문건이다.

정치참여 욕구가 중산층 사이에서 늘어나고,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절망감이 하층민을 사로잡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미국의 적극적 역할 없이, 한국의 정치상황이 미국의 이익에 맞게 진행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낙관주의"라고 디렉터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최악의 시나리오인 즉슨, 전두환이 자신의 원하는 헌법으로 개헌하여, 직접 선택한 후임 정부에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1988년 퇴임 후, 정치일정을 계속 배후 조정하려 한다면, 군사쿠데타나 노동자 학생들의 대중봉기 야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이 독자적으로는 권력 분배의 대타협을 이룰 수 없으니, 이러한 이원집권제를 차단하기 위해서, 미국은 여야 대화와 타협을 촉구하며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디렉터는 주장한다. 87년 6월항쟁 전후와 6.29선언을 거쳐 3당합당을 통한 민자당 탄생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6.10 당시, 전두환의 강경 진압 계획 좌절에서부터, 6.29선언, 보수 대타협을 통한 양당정치, 진보의 제도권 배제까지, 한국의 정치 이행기를 스스로의 이익에 맞춰 안착시킨 미국의 적극적 역할을 감지하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전략의 부재

미국에 관한한, 79년 10.26 전야와 87년 6.10 전야의 가장 큰 차이점은 79년에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미국의 대처가 그리 전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보와 소통의 부재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예컨데 80년 5월 23일 광주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성원 미셸 옥센버그는 자신의 상사 즈비그느 브레진스키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이 박정희 암살도, 12.12군사반란도 5.18 광주항쟁도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며, 정보 수집을 강화해야 한다고 뒤늦게 주장한다. 미국이 큰 그림을 갖고 한국의 급변 사태에 대처하고 있지 않으니, 워싱턴과 주한대사관 그리고CIA 한국 지부 사이의 소통도 쌍방향적이라기 보다, 사후 보고, 사후 확인식의 상향식이었고, 상대적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는 실무자들이 미국의 대응을 좌우하게 됐다.

인종주의자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한국전 이후 최고의 격변기에 윌리엄 글라이스틴 같은 자가 최고 실무자인 주한 미대사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이었고, 만주사변과 2차 대전 당시에는 중국의 일본군 수용소 생활까지 한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의 시선으로는 아시아통이런지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인종주의적 인물이었다. 1979년 1월 그는 국무성에 전문을 보내, 국무성의 연례 국제인권보고서의 한국 관련 일부분이 쓸데없이 공격적이라며 수정을 요구한다. 실무자로서 할 수 있는 요구일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부분이 어떻게 수정돼야 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해 8월에 박정희 정권이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해산 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에 대해 미 국무성이 "잔혹한"(brutal)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강경하게 비난하자,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은 글라이스틴을 불러 항의한다. 그 자리에서 글라이스틴은 엉뚱하게 개인 의견이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부 인사들이 파산한 회사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찾는데 도움 주기보다는 이 사건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는 외교관으로 부적절한 하기 짝이 없는 이 발언 전체를 국무성에 보고한다.

79년 12월 14일: 전두환 생애의 최고의 날

글라이스틴의 월권과, 무지와 경솔함은 12.12 이후에 더더욱 드러난다.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을 처음 대면한 날짜는 79년 12월 14일, 12.12 이틀 후였다. "서울의 봄"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는 12.12 성공 자축 사진이 촬영된 그날이었다. 시기가 지나치게 빨랐다면, 만남의 장소는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였으니, 더더욱 적절하지 못했다. 미국 대사가 쿠데타 성공 이틀 만에 쿠데타 괴수를 그의 사택으로 초대했다. 시기와 장소를 김대중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 최고의 정치지도자 김대중이 미대사관저에 최초로 공식 초대는 87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 파티 때였다.

대사관저 초대가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외교행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잘 이해했던 것은 외교관 글라이스틴이 아니라, 미국에서 심리전을 공부한 정치군인 전두환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전투복을 차려입고, 40여명의 경호군인들을 야전트럭에 싣고 나타났다. 오후에는 쿠데타 성공 파티하고, 기념사진도 찍고, 저녁에는 미국대사를 만나는 12월14일은 전두환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였으리라.

아무리 언론 검열이 엄혹한 계엄상황이라지만, 무장 경호 인력을 실은 트럭이 연합통신과 한국일보 사옥 건너편 하이브하우스 앞에서 주차하자, 미국대사가 전두환을 만났다는 소식은 장안의 힘 있고 정보 빠른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전파된 듯하다. 당시 주한 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은 다음날부터 미국이 전두환을 차기 권력자로 점지했냐는 전화를 수많은 언론인들과 관료들에게 받아야 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런 선전 효과 이외에도, 12.14 만남은 전두환에게는 실질적 소득을 가져다 준다. 전두환과 면담 직후, 글라이스틴은 12.12를 쿠데타로 공개적으로 칭하는 것을 중지해줄 것을 요구한다. 기존 정부 조직이 여전히 작동 중이고, 사전 계획이 없었으니, 고전적 의미의 쿠데타일 수는 없다는 전두환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쿠데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게 글라이스틴의 논리였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서울의 봄

전두환의 미국 커넥션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전두환과 대사의 직접 면담에 반대하며, 글라이스틴에게 실무단계의 접촉부터 할 것을 권했다. 위컴은 12월 14일 이후에도 글라이스틴과 적절하지 못한 만남을 두고 옥신각신했던 것 같다. 그 후 두 차례의 전문을 통해 그 만남이 필요했다고 국무성에 구구절절 변명을 했다. 글라이스틴의 요청을 받아 12.14 만남을 주선한 자는 당시 CIA 서울지부장이었던 로버트 브르스터였다. 12.12 직후 브르스터는 위컴에게 "전두환이 유일한 대안이며, 미국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더라도 그와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81년 암으로 사망한 브르스터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어, 그와 전두환이 언제부터 교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2.12 이후 전두환은 그가 한국의 군부를 장악했다는 것을 미국에 각인하고 싶어했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위해 절실한 과정이었다. 79년 12월 20일자 "남한의 불안정 상황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란 CIA 보고서는 남한 정치 혼란을 틈탄 북한 침공의 가능성을 50대50으로 봤다. 50의 침공 가능성을 충족하는 조건은 남한 군부의 분열과 시위와 폭동 같은 사회소요의 동시 발생이었다. 미국 정보당국은 6.25 구세대와 베트남전 참전 신세대, 비정규와 정규육사의 갈등을 조절하거나 봉합하는게 아니라, 강한 세력이 다른 군벌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여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것을 충족해 준 것이 전두환과 신군부였다. 80년 3월 이후의 CIA보고서는 전두환의 군통제권 장악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위컴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12.12 직후부터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 미국 장성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인편을 통해 보내기도 했다. 이들 중 화답한 장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위컴의 선임자이자 전두환의 편지를 받은 존 윌리엄 베시와 전두환의 관계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두환의 회고록에 의하면, 베시와 그의 첫 만남은 전두환이 1사단 사단장이었던 78년. 그의 부대가 발견한 제3땅굴을 시찰하러 왔을 때 이뤄졌다고 한다.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리차드 알렌을 전두환에게 소개해준 것도 베시였다고,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말한다.

그러나 북한 기록을 보면, 베시와 전두환은 1970년경,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교분을 쌓았다고도 한다. 베시는 합참부의장 자격으로 80년 5월23일, 전두환의 광주 무력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백악관 정책검토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가 거기서 무슨 발언을 했는지는 전해지는 바 없다.

글을 맺으며

나는 이 글에서 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 집권까지, 미국의 대한 정책이 다분히 즉흥적이며, 전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할 능력도 경험도 없는 한국을 공산주의 위협에서 보호하려면 권위적 통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이 불가결이라는 미국의 인종주의와 냉전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이러한 제국의 편견과 논리에 대한 성공적 도전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민주주의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미국에게 증명해 왔다. 우리의 모든 뜻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미국도 독재의 잔재들도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를 만들었다. 새로운 한미관계를 정립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를 한단계 높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시대와 그후 민주화 이행기 미국의 역할을 꾸준히 연구하고 교훈을 되새김질해야 한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서울의 봄

(지난 5-6년은 정보와 데이터를 갈망하는 한미 관계사 덕후와 연구자들에게는 감격시대였다. 다음의 사이트가 개설되고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도 다음의 사이트의 자료들을 참고했다.

위키리크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00407_e.html

CIA 정보공개(FOIA) 사이트 https://www.cia.gov/readingroom/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필자 소개 : 설갑수는 뉴욕에 살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급진적 글을 쓰려고 취재하고 연구한다. 미국의 노동 관련 뉴스 매체 <Labor Notes>와 세계적 진보 간행물 <Jacobin>의 빈번한 기고자이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Gwangju Diary"의 공동번역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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