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4번 출구를 향해 가면서 도란도란 팔짱을 끼고 걷는 중년 여성들을 만났다. 모두 뿌리염색까지 꼼꼼히 한 검은 파마머리, 이 여성들의 행선지는 늘 나와 같았다.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가까이 갈수록 대열은 늘어나고, 우리는 언 아스팔트 위에 앉아 팔뚝질을 했다. 혹한의 겨울, 눈이 녹고 길이 마른 걸 그나마 다행으로 삼았다. 참가자 중 일부는 간혹 무릎을 비닐로 감쌌지만, 대부분은 손바닥만 한 핫팩을 비벼 연신 문지를 뿐이었다. 그래서 집회가 끝날 때쯤에는 얼어붙은 삭신에 여기저기서 '아이고'라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게 된 계기는 "NO 연대"라는 포스트잇 때문이었다. 시급 400원을 인상해야 하는 이유를 써 붙인 학내 대자보 한가운데에 청소 노동자들의 가슴을 후벼 파듯 붙은 문구였다. 청소노동자 투쟁에 반대하는 학생들 중 일부가 굳이 찾아가 붙인 것이다. 20대 여성이면 다수가 페미니스트일 텐데, 왜 여성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을 공격하는 것일까? 비슷한 시기 대학가에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이들에 대해 한바탕 논란이 있었는데, 이제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까지 혐오의 대상이 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이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해야겠다고. "우리는 여성 CEO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을 원한다"고 말이다.
실은 일부 여성 집단이 다른 여성 또는 소수자 집단의 권리에 반대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7년에는 대부분이 여성인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역시 대부분이 여성인 예비교원과 교사의 다수가 반대했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입국 때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일부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피난해 온 난민들의 입국을 반대했다.
누군가는 이를 '노노 갈등'이나 '여여 갈등'이라고 비아냥대지만, 사실 생존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계급을 일렬로 부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처절한 '의자놀이'가 강요된 셈이었다.
청소노동자 '탈탈' 털어 십 수억 벌어들이는 원·하청 CEO들
노동자들이 생존에 몸부림치는 사이, 원·하청 기업과 CEO들의 곳간은 쌓여만 간다. 청소노동자들의 원청 '덕성여자대학교'가 대표적이다. 원청인 덕성여대는 2022년 사립대학 적립금 30위로 누적금만 700억 원에 달한다. 김건희 총장은 연봉만 1억 7천만여 원을 받았다. 반면, 400원 인상 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의 시급은 9390원이었다. 식대 12만원에 기타수당 2만~3만원을 더하면 월급은 세전 210만원, 세후 185만원이다. 총장 월급에 비하면 약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총장은 이외에도 수천만 원에 달하는 수당, 판공비 등을 배정받는다.
덕성여대 청소노동자의 월급을 하청업체 CEO와 비교하면 격차는 더 커진다. 경비·청소 전문 기업 하청업체 프로에스콤은 2022년 매출액 약 3200억 원, 영업이익은 53억 원을 냈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21%, 영업이익은 92% 증가한 것이다. 해당 업체는 또 160억 원이 넘는 사내유보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전년에 비해 30억 원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런 프로에스콤에서 CEO 신양주는 주식 38.46%를 소유한 대주주로 2022년 배당금만 약 6억 원을 챙겨갔다. 그는 2019년 한국여성언론협회가 주최한 대한민국을 빛낸 올해 인물 대상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런 그의 회사는 무노동 무임금에 대해선 아주 진심이어서 덕성여대분회 집행부가 시급 400원 인상을 위해 조합 활동으로 아침 선전전을 진행하자 수십만 원을 깎아 지급했다.
그런데 이 같은 격차는 비단 덕성여대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원·하청들은 수많은 대학과 병원과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들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그들의 연봉과 배당금과 사내유보금을 쌓는다. 덕분에 청소 노동자들은 월평균 187만 3000원, 실수령액 기준 175만 7500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더구나 대부분이 여성인 청소 노동자들은 ‘반찬값’을 벌어 밥을 먹지만, 집에서는 시부모에 남편에 자식과 손주까지 모두 제 손으로 돌보는 여성들이다. 전후 태어나 갖은 일을 했을 이들은 현재도 최임 일자리부터 황혼육아를 위해 새벽 별 보기 운동을 여태껏 하고 있다.
물론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의 사정은 그 연령대 여성들과 유사하다. 2021년 60세 이상 여성 월 임금총액은 198만 6000원으로 최저임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같은 연령대 남성 노동자 월 임금총액에 비교하면 반토막이다. 더구나 60세 이상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79.5%(전체 평균 71.3%)이다. 고령자 1인당 진료비 본인부담금은 약 110만 원(2020년 기준)인데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도 유사한 비용을 쓴다.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그러니까, 덕성여대 학생들과 가까운 것은 총장이 아니라 여성 청소노동자들임이 분명하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의 34.3%가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덕성여대 학생 일부가 아무리 총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학생 대부분의 계급적 지위는 청소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 내 계급 격차가 심화해 왔으며, 그것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전 사회적인 가부장제에 맞서 시작된 페미니즘 대중화에도 불구 쉼 없이 지속됐다. 이를테면, 가부장제 아래에서도 지배층에 진입하는 '우먼파워' 여성의 수는 늘어났다. 예컨대 여성장관 비율은 27.8%, 공공 및 민간사업장의 여성관리자 비율은 20.9%, 4급 이상 일반직 국가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17.8%, 변호사 중 여성 비율은 27.8% 등으로 의사결정 직위에 오르는 여성들의 비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기층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숨 가쁘게 후퇴했다. 2012년 이인영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08~2012년 국세청의 과세대상 남녀 근로자 소득백분위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같은 기간 여성 상위 10%의 소득은 11.5% 증가했지만, 하위 10%는 –6.5%로 감소했다. 2012년 여성 상위 1%의 평균 급여는 1억 4,228만 원이었으며, 하위 1%는 873만 원으로 16배의 차이가 났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 이제는 여성 2명 중 1명꼴로 나타나며, 또 대개 최저임금을 받는다. 직장 내 성폭력도 계급적 위계와 직결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 25.8%가 직장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비정규직인 여성 노동자의 경우엔 29.5%로 그 비율이 늘어났다.
구조적인 여성 노동자 저임금에 맞서기, '여성파업'
그래서 우리는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의 시급 400원 인상을 '페미니즘' 이슈로 보고 투쟁을 조직하기로 했다. 그것도 용감하게, 여성억압에 맞서 노동을 중단하는 '여성파업'이란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이지 '파이낸셜 페미니스트' 따위가 아닐 테니 말이다.
3.8 국제 여성의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의 시급 400원 인상 투쟁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자가 현장에서 직접 여성파업의 주체로 나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조직해 나가자는 목표를 내걸었다. 저임금은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구조적인 문제이자, 여성이 주로 일하는 직종인 보건·사회·복지 서비스업,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역시 전형적인 저임금 부문이라는 점에서 이는 성차별적인 임금격차와 생존권 침해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났고 여성파업이 이 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성 살해에 거대한 '니 우나 메노스 운동(#NiUnaMenos,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이 벌어졌다. 2016년 폴란드에서도 사실상 모든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헌법재판소 판결에 위력적인 검은 시위가 일어났다. 2018년 아일랜드에서도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국민투표를 이끌어 내 임신중지 합법화를 쟁취했다.
미국에서는 2017년 미투운동과 함께 맥도날드 노동자들이 성희롱 반대 파업을 진행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반대를 걸고 여성행진도 벌어졌다. 급기야 2018년 3월 8일에는 국제 여성파업이 70여 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2시간 부분파업에 530만 명이 참여했고 열차 300편이 취소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2018년 브라질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자이르 보우소나로 극우정권에 반대하는 엘레낭(#EleNão, '그는 아니야')이라는 이름의 여성 시위가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도 여성 살해 규탄 운동이 확산했다.
2019년 칠레에서는 지하철 요금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와 함께 성폭력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됐고, 2020년 멕시코에서는 '여성 없는 하루' 파업이 일어났다. 2020년 2월 미얀마에서는 의료와 봉제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군부 쿠데타에 맞선 민중봉기의 원동력이 됐으며, 같은 해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고용불안을 심화하는 '옴니버스법'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2021년에도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여성파업과 시위가 아르헨티나와 폴란드,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다. 2023년에도 스위스와 아이슬란드에서 여성파업이 수십,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벌어졌다.
하지만 덕성여대에서 실제로 여성파업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학교 측은 3.8 여성의 날 직전, 투쟁 이 시작된 지 약 1년 만에 '시급 400원 인상'안에 합의했다. 수십 개 단체가 여성파업 공동주최를 선언하고, 또 언론이 앞 다퉈 이를 보도하고, 720여 명이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졸업생들이 집결해 총장을 규탄하는 가운데 이뤄진 일이었다. 그만큼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기획된 여성파업운동은 한국에서의 가능성과 공감대를 확인한 계기였다.
당시 여성파업운동에 함께 한 단체들은 이제 다시 2024년 3.8 국제 여성의 날 여성파업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난 11월 1일 출범한 3.8여성파업조직위원회에는 승급 성차별로 악명 높은 KEC, 해체 위기를 겪고 있는 사회서비스원, 현재도 노동조건을 문제로 싸우고 있는 톨게이트, 코로나 시기 부당하게 해고한 세종호텔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 현장의 여성 노동자들과 여성, 노동, 인권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해외 여성파업에 비하면,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현재가 보잘것없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1975년 처음 여성파업이 일어난 아아슬란드에서도 파업의 시작은 소수의 단체에서 비롯됐다. 이제 우리 역시 여성파업을 준비하자. 우리 역시 여성파업으로 잃을 것은, 여성 노동자를 쥐어짜고 굴욕하고 살해하는 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세상의 사슬뿐이다.
※2024년 3.8여성파업조직위원회 참가 신청 : https://bit.ly/2024womenstr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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