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국가' 미국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2023 평화통일시민강좌] ⑤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3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2023 평화통일시민강좌는 한반도 평화체제, 한미동맹, 북한의 건축과 경제 및 기후위기 대응, 전쟁국가 미국, 미일동맹의 역사를 3월 18일부터 11월 18일까지 신촌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10월 21일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이 진행한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근대 세계질서는 유럽 사람들이 만들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착취하면서 만든 자본주의 시대가 지금까지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1839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에 무릎을 꿇으면서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들이 있었다. 길게 보면 500년, 짧게 보면 200년 만에 서방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가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된 1991년 말부터 '탈냉전' 시대가 시작되었다. 탈냉전은 세계화의 시대였다.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모든 사람이 이제 '탈냉전'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탈냉전의 시대는 세계화의 시대였다. 탈냉전 시대의 종말과 함께 탈세계화의 시대가 오고, 미국 중심의 단일 패권 시대에서 다극화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다. 미국 주도 서방 중심의 착취적인 세계 경제 질서가 평등한 경제 질서로 바뀌어 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의 세계화의 시대에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나라가 남한과 중국, 독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1997년 IMF 위기로 위기를 맞았으나 이후 미국과 중국 경제가 협력하는 이른바 '세계화'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계화는 이제 끝이 났다. 세계화를 갑자기 끝나게 만든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10월 7일부터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다. 물론 미국 패권 쇠락의 시작은 2001년 9.11부터라 할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결과로 미국 패권 쇠락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 ⓒ평화통일시민행동

군사주의 국가 미국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미국을 "역사상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라 불렀고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전쟁광"이라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예일대 교수였던 폴 케네디가 1987년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을 냈다. 폴 케네디는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고 했다.

1607년 영국인이 버지니아에 상륙했던 그 순간부터 미국은 제국이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유럽이 세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군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포르투갈의 인도양 항로 발견,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엄청난 부를 얻은 이후에는 전쟁을 잘했기 때문에 유럽이 잘살게 되었다고 했다. 유럽은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300년 동안 죽도록 전쟁만 했기 때문에 전쟁기술이 발달 되어 있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 자본주의 자체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된 상품을 팔아먹을 식민지가 필요하다. 1776년 독립을 한 미국은 1861년부터 4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이 전쟁으로 60만 명의 전사자가 생겼다.

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2차 산업혁명으로 철도, 전기, 내연기관 생산이 발달하면서 미국의 경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1890년대가 되자 도저히 국내 시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1893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미국은 1898년 스페인 전쟁으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차지했다. 1898년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팽창하고 패권을 만들어갔다.

미국 대외팽창의 고상한 명분

미국의 대외팽창은 일종의 '미국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다. 1823년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세력권이며 유럽은 간섭하지 말 것을 선언한 '먼로 독트린'이 나왔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지면서 1820년대부터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했다. 미국이 중남미의 독립한 나라들에 영국과 프랑스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고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먼로 독트린'이다.

미국이 독립했을 때는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 13개의 주가 있었다. 1803년 나폴레옹이 전쟁자금이 부족해지자 루이지애나 땅을 미국에 팔았다. 미국은 뉴올리언스부터 북쪽까지 지금 미국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을 1500만 달러에 샀다.

1845년 미국은 멕시코 전쟁을 일으켜 현재 미국 서부의 땅을 빼앗았다.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는 모두 스페인식 지명이다. 미국은 멕시코 전쟁을 하면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미국은 신으로부터 인류에게 자유를 선사하기 위한 소명을 갖고 태어났으며 미국의 땅이 넓어지면 그만큼 자유가 넓어진다고 생각했다.

1899년 미국 이데올로기 중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나온다. 바로 '문호개방'이다. 역사적으로 1870년부터 1914년까지를 '제국의 시대'라 부른다. 제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달하게 되자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다. 영국의 식민지는 지구의 4분의 1에 달했다.

미국은 중국을 노렸다. 미국이 말하는 자유는 상업의 자유, 기업의 자유, 경제의 자유였다. 그 당시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을 차지하면 미국이 1893년부터 겪고 있는 공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작은 나라가 청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에 승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자국 예산의 3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내고 대만과 산동반도까지 차지했다. 그전까지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통상은 했을지언정 영토를 내주지는 않았다. 일본이 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독일, 러시아, 프랑스가 삼국간섭으로 산동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빼앗았고 이후 절치부심하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을 합병할 수 있었다.

서양 강국들이 중국을 찢어 나눠 갖는 것을 보며 미국도 이에 동참하기로 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을 빼앗고 하와이도 차지하면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을 마련했다.

1899년과 1900년, 미국의 국무장관 존 헤이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 문호개방과 관련하여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면서 공평하게 무역을 하자고 제안하는 문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에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문호개방과 관련하여 천명만 했지 강요하지는 못했다.

미국을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만들어준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4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에 무기와 전쟁자금을 대줬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도 영국과 프랑스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1917년 독일은 서쪽에서는 프랑스와, 동쪽에서는 러시아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스위스에 망명해있던 레닌 등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봉인열차'에 태워 러시아에 들여보냈다. 그때 러시아는 황제는 이미 쫓겨난 상태이고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세력인 케렌스키 정부가 들어선 상태였다.

'봉인열차'는 독일과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케렌스키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너무 지쳐 있었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을 일으켜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모든 전쟁을 끝내고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겠다며 시작한 1차 세계대전은 실제로는 모든 전쟁을 시작한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끝났다. 미국은 1917년 4월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 결정을 했고 군대가 유럽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1918년 5월이었다. 미국은 6개월 정도 전쟁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19년 베르사유 평화조약을 맺으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과 승자 없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전쟁을 없애기 위해 국제연맹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당시 일본도 승전국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참여하며 새로운 평화조약에 인종적 차별조항을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영국과 미국이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 내용은 들어가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빌려준 전쟁자금을 받으려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 미국에 대한 채무를 갚고자 했다.

사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4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15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이 중 절반을 잃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청구한 배상금 330억 달러는 애초에 프랑스가 요구했던 액수의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독일이 예상했던 액수의 2배였다.

하지만 독일은 자신을 패전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자마자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봉쇄했고 그때 굶어 죽은 독일인이 7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독일 영토 내에서는 전쟁하지 않았다. 미국이 참전했고 윌슨의 발표도 있었으므로 독일은 공정한 평화를 예상하며 '전쟁 종료'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영국 재무성의 수석대표단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평화조약 체결 이후 1919년 말에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을 냈다. 케인스는 전쟁배상금은 독일이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해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며 결국 막대한 배상금 요구는 유럽 경제의 파탄 등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했다.

독일은 미국에서 달러를 빌려 전쟁배상금을 냈다. 그 과정에서 1921년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했고 1929년에는 대공황이 세계를 휩쓸었다. 독일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억울했고 가난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게 되고 파시즘의 길을 걷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은 'GOOD WAR'

2차 세계대전으로 유엔, IMF,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만들어지고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로 되었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패권은 완성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국방비가 4배로 늘어났고, 전쟁 직후 2년간 무기 생산은 7배로 늘었으며, 유럽에는 나토라는 군사동맹이 형성됐고, 아시아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미국의 대소련 군사기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4년 4월부터 2년간 미 상원 특별조사위에서 1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의 기업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했는지 조사하였다. 이른바 '죽음의 상인' 위원회다. 미군 200만 명이 참전하고 12만 명이 사망한 1차 세계대전에서 JP모건, 뒤퐁, US 스틸, 록펠러 등의 회사가 평상시보다 10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때 미국에서는 반전여론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 책임이 대단히 애매하다. 공식적으로는 독일에 책임을 묻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몽유병처럼 영국과 독일이 전쟁으로 끌려들어 갔다고 하고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영국이 작심하고 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나치나 일본의 전쟁범죄가 너무나도 잔인했기 때문에 책임이 분명했고 미국은 이런 잔인한 국가들을 쓰러트리는데 대단한 기여를 한 승전국이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대공황을 벗어나게 되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good war'라 부른다.

▲ 1951년 9월 8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미국의 전후 구상과 중국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전후 구상에서 한 가지 틀어진 것이 있다. 바로 중국이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연합국이 최초로 약속한 1943년 카이로 회담에 미국의 루스벨트는 영국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장제스를 참가시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장제스의 중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였고 국공내전도 국민당이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미국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이 전후 세계를 이끌어 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미국의 전후 세계질서 구상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미국은 중국 대신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의 파트너로 삼기로 한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의 독립은 그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중국 공산세력의 확장이었다. 1954년 봄 베트남의 호찌민 세력이 식민세력인 프랑스를 물리쳤고, 이어 열린 제네바평화회의에서 향후 2년 내 총선을 통한 남북 베트남의 통일 방안이 수립됐지만 미국은 총선 실시를 거부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세력의 베트남 통일을 막으려 한 것이다.

이후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본격화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막강하다는 미국이 전쟁에서 패했다.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미국의 군사력이 쓸모없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을 9.11테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베트남 전쟁 시기 테트(구정 대공세)라고 보고 싶다. 1968년 1월 말, 구정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들이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를 공격했고 군사적으로만 보면 베트콩들이 완패했다.

하지만 미국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전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정 대공세가 그 믿음을 깨뜨렸다. 결국 1968년 3월 존슨 대통령이 재선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마스의 이번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음을 알리고 앙숙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서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논의하게 만들고 이라크 등 아랍권은 물론 세계 대부분에서의 대규모 시위도 촉발시켰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구정 대공세에 버금간다 생각한다.

중국의 국공내전이 끝나고 1950년 1월 영국은 모택동 정부를 승인했다. 미국의 애치슨은 중국 시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장제스만 없으면 공산 중국과 수교를 하려고 했다. 한국전쟁으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됐다.

미국은 케네디 행정부 때부터 공산 중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를 실천한 것은 닉슨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실패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2차 대전 직후 빨갱이 때려잡기, 즉 매카시즘의 선봉장이었던 닉슨은 자신이 중국에 가면 아무도 자신을 빨갱이라 하지 못할 것이라 장담했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 화해하고 소련과 군비축소에 합의했다. 1972년부터 미국 내에서는 냉전은 끝났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와의 공존에 절대 반대하는 네오콘 세력이 등장했다. 네오콘은 공산주의와 화해나 협력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대중동정책과 이란혁명

미국은 1945년부터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날 때까지 동아시아에서만 전쟁을 했다. 그런데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란은 중동지역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나라다(1908년). 그 석유를 영국이 대부분 차지했다(1913년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 창립).

1951년 모사데크 총리가 석유를 국유화할 것을 선언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석유회사들이 안 내주고 3년간 대치를 한다. 결국 1953년 CIA가 들어가 모사데크를 날려버리고 팔레비 왕조를 복귀시킨다. CIA 최초의 비밀공작에 의한 외국 정부 전복이었다.

1970년까지 중동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영국은 재정 악화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1970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미국의 대외 군사적 직접 개입을 피하려고 했고 징병제도 모병제로 바꾼 상황이었다.

미국은 중동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지만 중동지역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3분의 2가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닉슨은 1972년 소련방문 후 돌아오는 길에 이란의 팔레비 국왕을 만나 중동의 안정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란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대리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란에 온갖 첨단 무기들을 팔았다.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세계 5대 강국으로 만들겠다며 엄청난 군사비를 지출했다.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을 기념한다며 나라 재정을 흥청망청 썼고 결국 이란 민중들이 1978년 11월 반정부시위를 일으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지, 이슬람 혁명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해외 망명 중이던 팔레비 왕은 미국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카터 대통령은 반대했지만 록펠러 등 미국 내 팔레비 친구이자 금권 세력들은 키신저, 브레진스키 등을 앞세워 그의 입국을 관철시켰다. 1953년 테헤란 미 대사관에 본부를 둔 CIA의 모사데크 축출 공작을 지켜봤던 이란 이슬람 세력은 이를 미국의 반혁명 음모로 파악했다.

1979년 11월 미 대사관을 점거한 이슬람 세력은 외교관 50여 명을 444일 동안 인질로 삼아 미국과 대치했고, 결국 이 인질극의 여파로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고 네오콘 세력이 지원하는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당선과 함께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화, 탈규제, 부자 감세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무렵(1979년 12월 25일)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아프간의 공산주의 정부가 이슬람 세력에 밀려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정부 때부터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이슬람 세력을 우군으로 활용해 왔다. 무신론자를 싫어했던 이슬람 세력을 세속주의 혹은 좌파 민족주의와 싸우도록 전략을 만든 것은 애초에 영국이었다.

1920년대 이집트에 무슬림 형제단이 설립됐을 때 영국은 은밀히 지원했다. 하마스는 1930년대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설립됐다가 1987년 팔레스타인의 1차 인티파다(봉기) 이후 하마스로 바뀐 조직인데, 하마스의 성장을 도운 것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였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1980년 1월 카터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중동지역은 미국의 핵심적 국익이 걸린 지역으로 이 지역 방어를 위해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처할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란에서는 군사쿠데타로 호메이니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실패했고, 아프간에서는 아랍의 이슬람 전사들을 활용해 성공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간 소련은 아프간에서 이슬람 반군 세력에 맞서 힘든 전쟁을 벌여야 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비밀공작이라 불리는 '오퍼레이션 사이클론'을 통해 아프간에서 소련을 패배시켰다. 미국이 돈과 무기를, 사우디가 돈과 정보를 대주고 파키스탄이 이슬람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들을 무자헤딘이라 불렀다.

이 이슬람 사람들은 아프간 사람들이 아닌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 출신들로 10만 명에 달했다. 소련은 10년 동안 아프간에서 피 흘리고 깨지다가 고르바초프가 아프간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은 소련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레이건은 1983년 무자헤딘을 백악관에 불러 '자유의 전사'라고 치켜세워주었다. 소련이 물러나고 무주공산이 된 아프간은 탈레반이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미국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만들고자 했고 너무나 낭비적인 핵 군비 경쟁을 중단하고자 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정보산업의 발전으로 기술혁신을 이루었지만 소련은 7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석유 가격의 폭락과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결국 1991년 망했다.

미국은 이를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최종적 승리로 간주했고, '역사의 종언'이라 부르며 인류가 실험한 여러 사회체제 중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완벽하다고 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체제는 존립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네오콘이 등장했고 폴 월포위츠는 1992년 3월 세계 어떤 지역에서든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흑자로 만들어 놓게 되자 90년대의 미국은 뭐하나 부족한 것 없는 풍요롭고 강력하고 완벽한 국가였다.

새로운 진주만, 9.11테러

그러나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다. 4대의 비행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펜타곤 등을 공격했다. 범인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고 그 주모자가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그는 '빈라덴'이라는 사우디 최대 건설회사 집안의 자식이었고, 1980년대에는 미국과 사우디 등에서 아프간에서 소련에 맞서 싸울 이슬람 전사들을 모집했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쟁(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격퇴) 당시 이라크가 사우디까지 노릴 것이라며 사우디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사우디에는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지역으로 무슬림들은 이교도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걸프전쟁 이후 계속해서 사우디에서의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9.11테러는 이러한 미군 철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은 이를 재앙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국 패권 강화의 기회로 여겼다. 1997년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가 만들어진다. 이 단체의 선언문에는 인류문화의 종점인 자유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확대시키기 위한 군사행동에 '새로운 진주만'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1930년대 강력한 반전 정서가 지배했던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것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외 군사개입을 위해서는 진주만과 같은 충격적 사건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미국 네오콘은 9.11테러를 '새로운 진주만'으로 봤다.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의 교수이며 과정신학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은 '새로운 진주만'(국내에는 <맨해튼의 진주만>으로 번역됨)이라는 저서에서 9.11테러를 미국 정보기관이 사전에 알았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 권력자이자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목표는 중동의 맹주 이라크와 이란을 제거하고 세계 에너지자원의 보고인 중동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2001년 10월에 아프간을, 2003년 3월에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브라운 대학의 왓슨 연구소에서 발표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이 전쟁을 위해 쏟아부었거나, 지출해야 할 비용(부상 군인들의 치료비 및 연금 등)이 최소 8조 430억 달러(약 9413조 원)에 달한다고 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450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2001년 이후 미국의 군사적 모험은 20여 년 만에 실패로 드러났다.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파괴는 할 수 있을지언정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국을 혼돈의 제국(Empire of Chaos)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끝났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1929년의 대공황보다 더욱 심각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과 유럽은 엄청난 돈을 퍼부어서 대형 금융기관만 살려줬다. 미국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못 갚아 집을 잃은 사람이 940만 명에 달했지만 이 사람들에 대한 구제는 거의 없었다.

사모펀드가 이 사람들의 집을 사서 가격을 계속 끌어올렸고 금융자본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였다. 여기에 유럽의 금융자본도 동참했고 그 결과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IMF의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의 혜택은 국민이 아닌 금융기관에 갔다. 금융기관들은 살아남았지만 국민은 소비할 여력이 없어졌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의 어떤 제도권 학자나 언론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기득권 계층은 밑바닥 정서를 읽는 데 실패한 것이다.

1992년 대선 때 로스 페로라는 억만장자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8%를 득표했다. 당시 로스 페로는 제조업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을 반대하며 러스트 벨트에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은 당시 캐나다와 멕시코(NAFTA), 중국으로 제조업을 내보내고 있었다. 국내 제조업은 위축되고 중하층 남성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들었다. 트럼프의 당선도 러스트 벨트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10월 11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플로리다 팜 비치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헛돈 쓰는 미국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이자 보스턴 대학교수인 앤드루 바세비치는 미국의 군사주의를 비판하며 계속 헛돈을 쓰고 있고 반성도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미국은 2021년 8월 아프간에서의 철수 이후 불과 6개월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실제로는 석유, 금융 등 거대 자본의 해외 진출을 위해 전쟁을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 사망자는 군대보다는 PMC(Private Military Company, 민간군사기업)에서 더 많이 발생했다.

전사자 중에 3분의 1은 군인이고 3분의 2는 용병이다. 전쟁의 참혹함, 전쟁 피해의 실상이 피부에 직접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미국인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공산주의는 싹부터 잘라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씨앗이 뿌려졌다.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이후 러시아 내 외교문서를 뒤져보니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고 있던 중동지역을 전쟁이 끝나면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나눠 가지기로 한 비밀협약이 있었다. 레닌은 이를 폭로했고 이것이 미국의 1930년대 '죽음의 상인' 청문회의 단초가 되었다.

레닌이 전쟁반대와 민족자결을 주장하니 윌슨이 14개 조의 민족자결을 발표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자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이 러시아에 군대를 보내 혁명 러시아 공산군과 싸웠다. 영국 총리 처칠은 당시 "공산주의는 요람에 있을 때 제거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미국은 소련을 인정하지 않다가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이후 히틀러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1933년에 소련을 인정했다.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자신들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승리의 80%는 소련군에 있다.

서부전선보다 동부전선에 10배나 많은 독일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의 미군 전사자는 40만 명이 안 되지만 소련은 2500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차 부대 지휘관이었던 조지S.패튼은 차제에 소련도 공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의 거짓 약속과 배신

1987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중거리핵전력조약을 맺어 핵무기를 감축하기로 한다. 또한 미국은 1990년 2월 독일이 통일되어도 나토는 동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약속을 뒤집었다. 고르바초프는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 공동의 집을 짓자고 했지만 미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와서 인디언들과 400년 동안 싸웠는데 이 기간에 약속했다가 어긴 것이 400차례나 된다.

1990년대 러시아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2차 세계대전 때보다 피해가 더욱 컸다. 올리가르히라고 예전 공산당 간부 했던 사람들이 국영기업을 불하받아 막대한 부를 차지했다. 옐친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의회에서 이를 문제 삼아 1993년 9월 옐친을 탄핵하자 옐친은 10월 탱크를 동원하여 의회를 포격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옐친은 1991년 8월 공산당의 쿠데타를 막아낸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지만 이후에는 미국의 충실한 하수인에 불과했다.

1999년 3월 미국과 나토는 유엔의 승인도 없이 세르비아를 78일 동안 공습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형제국가이자 유고슬라비아의 중추국가였다. 미국은 세르비아 공습으로 유고슬라비아를 다 찢어놓았다. 미국은 미국과는 다른 사회, 경제, 정치 체제를 없애버리고자 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 관리제도라는 아주 특이한 사회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스탈린과도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이 세르비아 공습을 시작할 때 당시 러시아 총리였던 프리마코프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회항시켰다. 프리마코프는 그 후 러시아, 중국, 인도와 힘을 합쳐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그 후부터 러시아는 사르마트나 킨잘과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소련 해체 이후 8년간 미국과 나토를 믿었던 러시아는 이때부터 미국의 속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쫓아낸 마이단 혁명이 있었던 2014년 2월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아주 유사하다.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강대국이 나타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대륙 동쪽과 서쪽에 있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를 마개로 써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한국을 아주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것처럼 우크라이나도 그렇게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다. 우크라이나는 냉전 종식 당시 인구가 5000만에 달했지만 지금은 3000만이 안 된다. 국내총생산(GDP)은 반 토막이 났다. 유럽의 가정부는 대부분 우크라이나 여성들이다.

러시아의 목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안보위협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과 크림은 러시아계 사람들이 많으니 러시아로 편입하고 오데사도 러시아로 편입시키고 나머지 지역은 완충지대로 두려고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역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푸틴 스스로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가 러시아인데 왜 우리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려고 하겠냐고 했다.

안전장치의 파괴와 러시아가 느끼는 안보위협

1972년 미국과 소련 간에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몇 가지 장치가 있었다.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등이다. 미사일 방어망(MD)을 만들면 선제 타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미사일 방어망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미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을 2002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2019년 미국은 중거리핵전력을 탈퇴했다. 또한 미국은 핵도 없는 이란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MD를 배치했다. 만약 우크라이나에 MD가 배치되면 5~7분 사이에 미사일이 모스크바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핵균형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2014년 야누코비치를 쫓아냈을 때 푸틴은 크림을 병합했다. 러시아는 크림은 원래 자신의 영토라 생각했다. 크림반도는 1783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 때 터키한테 뺏은 곳이며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부동항이었다.

그런데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 사람이었다. 19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 300주년을 맞이하여 흐루쇼프가 선물로 우크라이나에 크림반도의 행정권을 줬다. 러시아는 2014년 이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는 흑해에서 군사활동의 자유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의 군사력을 키워줘서 2022년 2월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는 터키와 맞먹는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50~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더 싸울 사람이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전쟁을 지속하는 이유는 경제제재를 하면 러시아가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6000억 달러인데 미국은 경제제재로 그중에 절반을 동결시켜 버렸다. 그리고 국제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러시아를 배제했고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입을 금지했다.

미국은 이렇게 하면 러시아 경제가 무너질 줄 알았지만 아직까지 러시아는 건재하다. 유럽에서 경제 상황이 제일 좋은 나라가 러시아다. 러시아는 2014년부터 경제제재에 대비해왔다, 러시아는 달러패권에서 벗어나 자립적 경제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었고 미국의 제재가 이를 촉진해줬다.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는 루블이나 위안화나 루피로 결제를 한다. 결국 달러가 없어도 되는 상황을 미국이 만들어줬다. 중국과 러시아는 달러 중심의 국제무역체제에서 벗어나 별도의 국제통화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를 더욱 앞당겨버렸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전쟁

영국은 1915년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 지역에 독립국 건설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1917년 11월 2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 수립에 동의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했다. 석유가 나는 중동지역을 차지하고 싶었던 영국은 유대인들을 대리인으로 삼고자 했다. 원래 미국은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했으나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편에 서게 된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항했고 전쟁의 결과 다 쫓겨났다.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가자지구, 골란고원을 다 차지했고 유엔은 이스라엘이 철수하라는 결의안을 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유엔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미국 뜻대로 되지 않자 미국은 전략을 바꾸어 '중동지역의 민주화'를 내걸었다. 그때 이스라엘이 반대했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하기로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직접 참관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집권하게 된 것이다. 하마스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다.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서안지구는 파타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2007년부터 가자지구에 6m 장벽을 쌓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만들었다. 가자는 폭이 8km, 길이가 40km인 좁은 땅으로 230만 명이 갇혀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칼로리를 계산하여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을 집어넣고 있다. 세계 최대의 노천감옥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6년을 살아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라는 저항운동으로 지금까지 6000명이 죽었다.

▲ 10월 9일(현지시각)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을 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의 생활방식은 제국, 팔레스타인의 생활방식은 저항

미국의 생활방식이 제국이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저항이다. 동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성지이다. 그리고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영토에 있다. 이슬람 사원인 알아크사 사원을 최근 유대교가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도 하마스가 공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을 맺어 '두 국가' 안을 맺었지만 협정을 맺었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2년 뒤 암살당하고 하마스의 테러로 오슬로 협정은 이행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1979년 카터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교를 맺었다. 미국이 이집트를 매수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의 군사지원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가 이스라엘과 이집트다. 계속 몇백억 달러씩 지원을 해주고 있다. 옆에 있는 요르단은 1994년에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고 재작년 아브라함 협정으로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통 조상이다.

최근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지역에서 수장과도 같은 나라이다. 수교가 되면 팔레스타인은 완전히 고립되는 상황에서 하마스는 10월 7일, 팔레스타인은 살아있음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미국은 벌거벗은 임금님

10월 16일 러시아가 즉각 휴전과 인도적 구호 및 평화협상을 하자는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지만 하마스를 규탄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그 뒤 브라질이 하마스에 대한 규탄내용까지 넣어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냈지만 미국이 유일하게 반대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불리한 모든 유엔 결의안은 미국이 언제나 반대했다. 많은 사람이 미국을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한다. 자신이 다 벗은 줄을 모른다. 즉 세계가 미국의 실체를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전 세계 여론이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 그동안 미국이 군사력으로 억지로 끌고 왔지만 2010년부터 이미 미국의 세기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5월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가 미국의 기득권 보수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60%가 다극시대라고 답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만 해도 국채가 9조 달러였는데 지금은 33조 달러에 이른다. 연간 이자만 6천억 달러를 내고 있다. 달러는 여전히 기축통화이자 안전자산이기 때문에 국제무역에서 달러가 제일 많이 유통되기는 하나 최근 10년간 세계적으로 외환거래에서 달러 비중이 72%에서 50%로 줄어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를 제재하면서 러시아가 자립하게 만드니 달러 비중이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미국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은 독일이 지난 100년 동안 세 번째로 미국에 진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지금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성장의 큰 동력 중의 하나가 러시아의 값싼 가스와 석유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모두 끊겼다.

지난 겨울 독일 정부가 연료비 보조금으로 쓴 돈이 2800억 유로다. 우리 돈으로 400조 원이다. 유럽연합의 경제 기관차였던 독일은 지금 자살하고 있다.

최근 슬로바키아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는 당이 집권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대놓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EU의 지원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했으며 폴란드에서는 최근 총선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던 제1당이 졌다.

몇 달 전 러시아 연구소에서 유럽국가들의 국민을 상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이 누구한테 있다고 생각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국민은 미국이 2, 나토가 2, 러시아가 1의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유럽 국민은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이러한 인식이 있는가이다. 1876년 조선이 개항되었을 때, 조선의 지배계층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중국 주도의 경제 질서에서 유럽 주도의 경제 질서로 변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를 펼쳤던 일본이 패하고 미국과 소련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도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소련 해체와 동유럽 몰락 이후 냉전이 해체되는 과정이 있었지만 남북은 화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의 탈탈냉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894-1975년을 동아시아 80년 전쟁의 시대라고 하는데, 전반부(1894-1945년)는 일본이, 후반부(1950-1975년)는 미국이 전쟁의 주요 행위자였다. 중요한 것은 두 차례 전쟁의 시대를 연 출발점이 바로 한반도였다는 점이다. 청일전쟁과 6.25전쟁이 그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청일전쟁을 불러왔고, 청일전쟁은 50년에 걸친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이 좌우 대립에 이어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미국/남한/일본과 북한/중국/소련의 국제전을 초래했고 이어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6.25전쟁은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남북 간 체제 대결은 결코 전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6.25전쟁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한국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 예상된다. 2021년 IMF는 미중간 경제전쟁 발생 시 가장 큰 피해를 볼 국가로 한국을 꼽았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전쟁 가능성이 큰 곳으로 동중국해, 대만, 남중국해, 한반도를 꼽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그야말로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집권층은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