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 교사'의 교훈이 고작 체벌의 부활인가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체벌 포기 못하는 교육부

체벌은 한국에 학교와 공교육 제도가 존재한 이래로 늘 학교 안에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겉으로 드러난 양상이나 경향이 조금 달라졌을지언정 "교사의 판단에 따라 학생에게 벌을 줄 수 있다"라는 전제는 변한 적이 없다. 2020년 이후 여러 지역의 학생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봐도,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역에서조차 체벌을 경험했다는 학생의 응답은 10% 내외로 존재한다. 심지어 현재는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교사가 혼자 판단해서 학생을 벌 줄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그리고 그에 따르는 귀책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학생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체벌이든, 벌점 스티커를 칠판에 부과하여 창피를 주는 경우이든, 많은 경우들은 교사가 인격적으로 악랄한 사람이라서, 학생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어서 일어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그것이 교육이라고 믿고, 본인이 학생을 위한다고 의심하지 않으며 이런 일들을 행한다. 교사가 특별히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모이는 직군일 리는 없다.

교사 한 명이 다수의 학생을 통제해야 한다는 상황,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학생들에 대한 고려 없이 설계된 교과과정, 내용에 대한 이해나 활용보다는 평가와 경쟁 위주인 입시 등 학교는 의도적으로 체벌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이 또한 이유 없이 어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가장 저비용으로 국가와 사회의 기준에 맞는 고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집단적, 통제적, 경쟁적 교육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은 수의 교사가 많은 수의 학생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고통을 주겠다"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고 손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가 굴러가기 위한 전제는, 교사가 언제나 학생보다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고, 이런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멘탈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을 통제해야 한다는 기조에 동의하며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벌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나는 학생이었던 시기, 이런 방식으로 노동하고 싶어 하지 않는 교사들, 혹은 하려 했으나 실패한 교사들을 꽤나 많이 봐 왔다. 체벌이 대놓고 만연하던 시기였지만, 학교에는 분명히 학생을 때릴 수 있는 교사와 그럴 만한 위치를 점하지 못한 교사가 나뉘어 있었다. 수업이나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카리스마 있고, 체구가 크고, 험악한 말투나 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중년의 남성 교사들은 대개 학생을 때릴 수 있는 축에 속했다. 이에 반해, 저연차 여성인 교사가 비슷한 권위를 가지기는 훨씬 어려웠다. 여자인 교사가 학생들을 체벌의 '효과'를 누리려면 나이가 지긋하거나, 유난히 깐깐하고 매서운 태도가 필요했다. 교사가 담당하는 과목이 입시 주요 과목인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서도 학교 안에서의 영향력에는 확 차이가 났다.

물론 권위를 잘 못 세우는 교사들이 체벌을 안 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체벌을 학생들이 무서워했냐고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학생들은 그저 기분이 더럽지만 교사니까 견뎌준다는 반응을 보였고, 해당 교사의 수업에 집중하지 않거나, 지시 사항을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한두 명이 아니라, 반 전체가, 학년 전체가 그랬다. '교실'은 빠르게 붕괴했다. 학생들이 떠들 때마다 교사는 소리치고, 매를 휘둘렀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권위 있는 체벌'이 교육적이었냐고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권위 있는 체벌'은 학생들이 힘의 논리를 빠르게 학습할 수 있는 표본 같은 것이었다. 그 감각으로 학생들은 개별 학생보다야 권한이 있지만 반 전체가 거부하면 힘을 잃는 교사들을 알아보고 구분지었다. 단순히 교사는 학생을 때릴 수 있다는 개념보다, 학교 안에서 서로의 위치, 강약 관계는 훨씬 복잡다단하다. 체벌을 경험한 학생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굽혀야 할 강자에게 굽히고, 그렇지 않아도 될 약자를 구분하고 짓누르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에서 열린 '50만 교원 총궐기 추모 집회'에서 지난 7월 숨진 서이초 교사의 대학원 동기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간접체벌과 체벌 대체재에 집착하는 이주호 장관

지난 8월 말 발표된 교육부의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이하 학생생활지도 고시)는 '물리적 제지'라는 단어로 학생에 대한 교사의 물리력 행사를 국가가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긴급한 경우'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구체적이지 못하고 임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긴급성의 정도 또한 교사의 판단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훈육의 일종으로 '과제 부과'를 할 수 있다고도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소위 '깜지쓰기'라든지 힘든 동작을 반복하라고 지시한다든지 하는 체벌을 허용하는 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신체적 고통을 주는 벌을 경험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와 함께, 학교에서 권위를 능숙하게 세우지 못하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살아남기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법적 권한, 직무적 권한을 고시나 매뉴얼에 적어 배포한다 해도, 실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현장에서 겪어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항목을 통제하고, 더 많은 권한을 가지라는 것은, 더 많은 갈등상황에 직면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놓고 때리는 체벌이 만연했던 시기에는 학생들을 때렸던 교사들은 요즘 회자되는 이른바 '교권 실추'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아니다(교권이라는 개념과 교권이 실추되었다는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세간에서 묘사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자면). 그들은 고시 없이도 알아서 학생들을 통제해 왔고, 학생생활지도 고시가 이들 손에 쥐어졌을 때는 이를 근거로 학생인권 침해가 더욱 만연해질 것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어떤 권한이 정부 정책으로 발표된다고 해도, 학교 안에서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교사들은 이를 휘두를 수 없다. 교사들이 노력하여 학교 안에서 권위를 획득하고 이를 휘둘러 학생을 통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국가는 교사들에게 학생인권을 침해할 것을 업무 내용으로 주문해서는 안 된다.

2011년, 도구와 손발을 이용한 체벌을 금지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제정되어 법적으론 체벌이 일부 금지되었다. 2015년에 '아동복지법'도 개정되어, 아동에 대한 체벌 금지가 명시되었다. 이때 교육계는 체벌을 금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논의했어야 한다. 폭력은 교육이 아니고, 아동·청소년도 마땅히 신체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인간이며 맞아도 될 짓은 없다는 것, 고통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은 야만임을 명확히 했어야 했다. 무작위로 모인 여러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학교라는 공간이 인권침해적 처벌 없이도 모두가 안전하게, 상호존중하며 생활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목소리를 모으고, 토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어야 한다. 시행령을 만든 교육부는 앞장서서 학교 내 자치와 교사-학생 간의 평등한 소통을 위한 지원에 나섰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신, 교육부는 손이나 도구를 이용한 체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간접체벌'이라는 개념을 학교 안에 밀어넣었다. 손발, 도구를 이용한 체벌이든 단체 기합이나 무리한 자세 및 동작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든 체벌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몸에 고통을 느끼고 수치와 굴욕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데, 간접체벌이라는 단어 하나에 후자는 면벌부를 얻었다.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하고 교사-학생 간에 다른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간접체벌 허용 시행령'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체벌 없는 학교, 소통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시도는 모두 교사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그렇게 독박교실 시대가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오롯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한 반 20~30명 학생들의 다름을 살피고, 의견을 조율하고, 욕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허용되는 폭력'으로 도망치거나, '교육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회의하게 되었다. 물론 현재에도 학생인권을 보장하고 평등하게 소통하며 교사의 일을 계속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도 시스템의 유기적 지원 없이 개인의 역량으로 해낼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명확함에 고통스러워 한다.

2011년 당시에도 교육부 장관이었던 이주호 장관은 12년이 지난 2023년에 와서도 학생인권에 대해, 민주적 학교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학생들이 감히 교사에게 대들면 안 된다" 정도의 사고를 가지고 교육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듯 하다. 학교 운영의 효율성과 경비 절감을 위해 근본적이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교사 확충을 통한 학급당 학생 수 감소나, 학교의 속도와 방법이 견디기 힘든 학생들을 위한 지원, 교사가 학내 갈등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조력과 지원 인프라 등의 정책 없이, '교사에게 이러저러한 일을 학생에게 할 권한을 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학생인권과 교사의 노동권을 모두 짓밟는 정책이다.

학교와 정부의 책임이 중요하다

태생부터 학생을 벌주고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하던 공간에, 학생인권이라는 언어가 들어온 지 20년 남짓, 제도화를 시도한 지는 겨우 10년이 지났다. 당연히 학교 안에서는 소란이 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 공간인지, 구성원들 간에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새로 모색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체벌을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을 찾는 것에만 골몰해 왔다. 이런 와중에 교육부는 훨씬 심한 인권침해가 만연하던 시기로 학교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교육부는 모든 것을 학생 개인의 인성 탓, 교사 개인의 능력 탓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교사 개인에게 권한이라는 무기를 쥐어준 뒤 알아서 능력껏 잘 휘두르라는 식의 정책을 당장 멈춰야 한다. 학생인권의 보장을 기준점에 두고 교육 정책과, 전반적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허용해주고 무엇을 금지하느냐가 아니라, 학생과 더욱 평등하게 소통하기 위한 방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지원해야 한다. 교사의 업무가 과중하면 이를 덜 수 있는 충분한 인원을, 교사 개인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전문적 도움을, 개인이 질 수 없는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도록 관리자와 학교 책임에 대한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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