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래, 518을 유엔으로 가져가려했던 하얀 셔츠의 사나이

[기고] 김양래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를 추모하며

지난 9월8일 소천한 김양래 전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스스로의 삶을 5.18 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바쳤다. 내가 기억하는 김양래 이사는 언제나 아이디어가 넘쳤고, 목표를 정하면 무섭게 추진했던 비젼있는 지도자였다.

하얀 셔츠의 사나이

나는 김양래 이사를(이하 존칭 생략) 80년대 내내 망월동 희생자 묘역을 안내하던 '하얀 셔츠 입은 훤칠한 사나이', 광주 비디오를 만든 전설의 인물로만 알고 있었었다. 그 전설을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김양래는 나에게 사실상, 해적판의 홍수 속에 죽어가던 나와 닉 마마타스가 번역 편집한 "죽음의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의 영문판 "Gwangju Diary"를 5.18 재단에서 개정출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개정판의 판권을 재단에 기부했고, 개정판 준비하는 삯으로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Gwangju Diary에 기여한 나를 포함한 네 사람, 저널리스트 팀 셔록,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닉 마마타스 모두 처음으로 원고료다운 원고료를 받으며 개정판 작업을 할 수 있었다.

UN

김양래가 나를 광주로 불러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이듬해 5월에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항쟁기념 행사를 주최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원대하기만 아이디어였다. 사실, 요원한 얘기였다. 박근혜가 탄핵됐더라도, 황교안 대행 체제에서 그런 행사를 지원할 리 만무였다. 다만 김양래가 국회와 외무부를 끊임없이 찾아가 읍소하는 지역 뉴스를 인터넷으로 보며 그냥 안되는 일에 애쓰는구나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4월20일, 불쑥 뉴욕에 왔다. 정부를 설득 하여, 5월 26일에 유엔의 공간은 잡았으나, 연사도 프로그램도 못 정했으니, 여하튼 한 번 해보자고 말했다. 김양래가 뉴욕에 머무는 5일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움직이며 회의를 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집단 기억"라는 행사명은 유엔대표부 가는 지하철 안에서 결정할 정도였다.

문제는 연사였다. 내 개인 친분으로, 커밍스와 항쟁을 취재한 AP 기자 테리 앤더슨 정도는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바쁜 커밍스에 대해 자신은 없었다. 나는 도널드 그레그를 초청할 것을 제안했다. 박정희 정권 때 CIA 한국 지부장을 지냈고, 5.18 당시 백악관 아시아 안보담당관에, 80년대말 주한 미대사를 지낸 인물 정도는 와야 구색은 갖출 것 같았다. 게다가, 명색이 유엔 학술 행사인데, 다른 편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것이 내 논리였다.

김양래와 나는 촉박한 일정을 쪼개, 뉴욕 교외에 사는 그레그를 찾아갔다. 난색을 표하는 그레그에게 김양래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반미운동 열심히 한 사람이고, 여전히 반미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 CIA 와 백악관, 그리고 주한 대사로서 한국을 줄곧 다룬 사람 아니냐? 당신이 5.18 대해 아는 것만 이야기하면 된다. 특히, 북한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명백히 말하면 된다." 그는 당시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5.18 북한 개입설을 전 CIA 간부의 입으로 쳐버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잠시 골똘히 생각한 그레그는 연사 초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익 그레그가 오니, 좌익 커밍스의 성격 상, 거절하기 힘들게 된 것 아닌가. 결국 커밍스도 수락했다.

그 후 3주 남짓한 준비기간은 모두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해야 할 일, 처리할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뉴욕 인권단체 민권센터의 최고의 일꾼 차주범과 나는 뉴욕에서, 김양래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정말 젖먹던 힘까지 동원, 행사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끔 김양래가 왜 이렇게 유엔행사에 집착할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보수 언론조차 대대적 보도했다. 공식적으로 초청하지도 않은 스웨덴 유엔 대사 올로프 스쿠프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테리 앤더슨의 현장 증언은 청중들을 울렸고, 유엔 한복판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도 다같이 불렀다. 커밍스는 스스로가 참여한 한국 관련 행사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했고, 그레그는 6개월 정도는 준비한 것 같은데 수고했다는 과찬도 했다.

UN 산하 NGO

"이제 5.18 재단을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NGO)로 등록하는 일이 남았어." 김양래가 뒷풀이 저녁식사에서 그렇게 툭 한 마디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때서야 그가 유엔행사에 매달렸는지를 나는 깨달았다. 그는 5.18의 세계적 위상을 유엔의 권위 아래 영구화하려는 빅픽처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빠듯한 시간때문에 차주범과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고, 쪼들린 예산 덕분에 커밍스와 앤더슨을 삼류 모텔에서 재우고, 유엔대표부에 그레그에게 차량 제공할 것을 사정하면서 그렇게 직진했다.

비방

그러나 그가 꿈꿨던 5.18의 세계적 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비방이 시작됐다. 특히 광주와 오랜 인연이 있던 미국 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비방은 소아병적이었다. 그는 CIA 경력의 그레그 초청을 문제 삼아 김양래를 괴롭혔다. 그레그 초청의 계기로 5.18 재단이 CIA의 외곽조직(front)가 됐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가 재단에 보낸 이메일이 재단 측에 의해 그레그에 전달됐고 CIA 수중에도 들어갔을거라는 황당한 주장을 퍼뜨렸다.

김양래는 한 미국인의 황당한 주장에 분노하기 보다, 주변 그의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 미국인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고 있는듯 보였다. 나야 저간 사정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지만, 김양래의 뜻과 그와 같이 이룬 성과의 잠재력은 지켜내고 싶었다. 그래서 지역 인터넷 매체를 통해 카치아피카스와 지리한 갑론을박을 했다. 카치아피카스는 내게도 온갖 비방과 억측을 쏟아냈다. 나는 김양래 대신 그것을 대응하고 감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게 그는 그럴만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보공개 요구

김양래는 여전히 집요했다. 미국 정부가 80년대 아르헨티나의 독재 관련 모든 기밀 문서를 삭제없이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시, 5.18 관련 기밀문서를 검열삭제없이 공개할 것을 미국정부에 요구했고, 마크 리퍼트 대사가 광주를 방문할 때, 공개적으로 그를 압박하기도 했다. 현재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의 미국에 대한 온전한 정보 공개 요구의 시작은 김양래의 추진력이었다.

죽음

5.18 재단에서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암투병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선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차게 들렸다. 아직 하고픈 일도 많고, 못다한 일도 많은 목소리였다. 그 후, 3년, 그의 소천 소식을 접했다. 김양래 이사가 운명하기 전에 한 번 더 뵙지 못한 아쉬움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을 억눌렀다. 그가 이뤄낸 일 때문에 슬펐고, 그가 못다한 일을 알기에 서러웠다.

불과 몇 년 사이, 광주와 5.18를 보는 전국의 시선이 예전만 못하다. 미군 정보관을 사칭하는 자가 5.18 진상조사를 호도하고, 조폭이 5.18 단체의 장까지 올라가고, 별 다른 해명과 사과도 없는 진압공수부대와 화해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윤상원이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 야학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우연일 수 있겠지만, 이 모든 일이 김양래가 5.18에서 은퇴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5.18 주변이 어지러워질수록, 우리를 망월동을 안내하던 '하얀 셔츠 입은 훤칠한 사나이'가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김양래 전 이사(가운데)와 필자(오른쪽), 차주범 민권센터 활동가.(왼쪽) ⓒ필자 제공
▲당시 유엔에서 열린 5.18 학술 세미나. ⓒ 5.18 기념재단

(필자 소개 : 설갑수는 뉴욕에 살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급진적 글을 쓰려고 취재하고 연구한다. 미국의 노동관련 뉴스매체 <Labor Notes>와 세계적 진보간행물 <Jacobin>의 빈번한 기고자이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Gwangju Diary"의 공동 번역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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