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 위안부 '기억의 터' 작품 기습철거에 반발 "손쉬운 '여성' 지우기"

제작 참여한 임옥상 성추행으로 '작품철거' vs. '기록·반성' 대립

서울시가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된 임옥상 작가의 작품 두 점을 5일 오전 철거해 시민단체들이 반발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이날 오전 6시께부터 서울 중구 남상공원 기억의 터에서 2시간에 걸쳐 임 씨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조형물을 철거했다.

애초 전날 4일 진행될 예정이었던 철거작업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 정의기억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당일 철거 중단 시위를 벌이며 지연됐지만, 시는 단체들이 현장을 비운 5일 오전 기습적으로 철거를 강행했다.

작품철거를 둘러싼 서울시와 시민단체 간 대립은 지난달 임 씨가 직원 강제추행 혐의로 1심 징역형을 선고 받으면서 시작됐다.

임 씨의 징역형 선고 이후 시는 시립 시설 내 설치된 임 씨 관여 작품 5점을 모두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이 중 2점이 기억의 터에 설치된 두 작품이었다.

서울시는 "전쟁 성범죄 피해로 평생을 고통받아온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공간에 성추행 유죄 판결을 받은 작가의 작품을 존치하는 것은 위안부를 모욕하는 일"이라는 입장이지만, 단체들은 별도의 협의 없이 기억의 터 내 작품들을 훼손하는 일은 "손쉬운 '여성' 지우기 방식"이라며 반발했다.

기억의터추진위와 정의연,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4일 오전 기억의 터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옥상 작가는 반드시 성추행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우리는 서울시가 임옥상의 작품을 철거한다는 이유로 기억의 터 조형물을 일방적으로 철거하는 것에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철거된 두 작품은 "수많은 추진위원과 여성작가들 및 모금에 참여한 1만 9754명의 시민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존경과 '아픈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다짐이 만들어낸 집단 창작물"로 "임옥상 개인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가령 문제가 된 작품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피해자이자 반성폭력 활동가였던 고(故)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작품 '끌려감'과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들이 새겨져 있는데, 서울시의 완전철거 방침으로 이 같은 기록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철거가 완료된 5일 오후 성명을 내고 "우리는 임옥상 성추행 사건을 통해 만연한 여성폭력의 현실을 드러내고, 범죄 이후 그의 파렴치한 행보까지 모두 기록하는 방안을 찾자고 하였으나 서울시는 이를 무시하고 기습적으로 철거를 강행했다"라며 "서울시의 기억의 터 철거는 임옥상 지우기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 역사 지우기, 여성폭력 저항의 역사 지우기"라고 주장했다.

즉 문제 작가의 성폭력 범죄를 함께 기록·비판하거나, 작가의 이름을 퇴출하는 식의 대안 협의를 서울시가 거부했다는 게 시민단체의 입장이다.

반면 서울시 측은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조형물 존치 의견(23.8%)보다 철거 의견(65%)이 더 많았다는 점 등을 들어 시민적 합의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기록에 대해서는 공공미술위원회의 자문 등을 거쳐 새로운 콘텐츠를 채우겠다는 입장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특히 "철거 작업이 마무리된 후 위안부 피해자들을 제대로 기릴 수 있도록 조형물을 재조성하겠다"라며 작품 철거에 대한 단체들의 반대를 "진영논리"라고 비판했다.

오 시장은 이날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게시 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성추행을 인정한 작가의 작품 철거를 막아섰다"라며 "오랜 세월 진영논리에 젖어 사고하다 보니 무엇이 상식인지도 모르는 듯하다"고 말했다.

단체들은 "서울시가 성추행 가해자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기억의 터 작품을 철거하겠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일과 현재도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한 단호한 대처, 여성인권에 대한 다짐을 담아 기억의 터 공간을 어떻게 재조성할 것인지 로드맵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최영희 기억의터추진위 대표는 4일 기자회견에서 공원에 성폭력 가해자의 작품이 전시되게 된 일에 대해 "설립 추진 당시 작가 섭외가 안 돼서 임 씨에게 제자를 소개해 달라 하니, '돈 상관 없이 내가 해주겠다'고 해 (임 씨의 작품 참여를) 결정했다. 임옥상이 그런 사람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라며 "피해 할머니들과 2만여 명의 모금 참여자들께 죄송하다"고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는 2016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남산 옛 일제강점기 통감 관저 자리에 국민 모금을 통해 조성됐다.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위치한 임옥상 작가의 '대지의 눈' 조형물이 철거되고 있다. 서울시는 임씨가 강제추행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자 서울시가 관할하는 시설에 세워진 임씨의 작품을 속속 철거 중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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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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