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검찰, '강제 입맞춤' 축구협회장 예비조사…피해 선수에 쏟아지는 연대

스페인 '미투' 불리며 동료·시민·정치권서 광범위한 지지…"성평등 입법 등 이어지며 인식 개선된 결과" 분석

스페인 검찰이 여자축구 월드컵 우승 현장에서 자국 선수에게 강제 입맞춤한 루이스 루비알레스(46) 스페인축구협회장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사건 뒤 피해 선수에게 동료들은 물론 시민들과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광범위한 지지가 쏟아진 것을 두고 수십 년 간 진행된 스페인의 성평등 입법과 인식 개선 노력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 통신, 영국 BBC 방송, <가디언> 등을 보면 28일(현지시각) 스페인 최고형사법원 검찰은 루비알레스 회장에 성폭력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예비 조사에 착수했다. 법원은 성명에서 강제 입맞춤을 당한 "헤니페르 에르모소(33) 선수의 공개 성명에 의하면 루이스 루비알레스가 그에게 한 성적 행동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며 사건의 "법적인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다만 정식 조사를 위해선 에르모소 선수 본인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20일 루비알레스 회장은 스페인이 우승한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 시상식에서 스페인 대표팀 에르모소 선수의 얼굴을 붙잡고 입맞춤했다. 그 뒤 에르모소 선수는 이 행위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밝혔고 비난이 잇따르자 루비알레스 회장은 일단 사과했지만 이후 25일 자진 사임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입맞춤이 "합의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이 나라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가짜 페미니즘"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이후 에르모소 선수가 해당 입맞춤에 "단 한 번도 동의한 적 없다"고 다시금 밝혔고 이번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대표팀 선수들을 포함해 81명의 선수들은 루비알레스 협회장 사임 때까진 대표팀 선수로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8일 스페인축구협회 각 지역 연맹 회장들도 공동성명을 내 루비알레스의 회장직 즉시 사임을 요구했다. 호르헤 빌다 스페인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을 제외한 코치진 전원은 앞선 26일 루비알레스를 규탄하며 사임한 상태다.

징계 절차에 돌입한 FIFA는 지난 26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루비알레스 회장에 대한 일시적 직무 정지 처분을 내렸지만 이미 파문은 축구계를 넘어 스페인 사회 전반으로 퍼진 모양새다. 지난주에 이어 28일에도 마드리드에선 에르모소 선수에 연대하고 루비알레스 회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수백 명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로이터>는 시위 참가자들이 "그건 입맞춤이 아니라 공격"이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건이 스페인에서 페미니즘, 성평등 및 성폭력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며 축구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도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평소 축구를 전혀 보지 않고 이번 여자 월드컵 경기도 보지 않았던 변호사 로라 마르케스(26)는 매체에 최근 한 주 간 내내 이 사안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이자 권위있는 인물의 권력 남용이며 스페인의 완고한 남성우월주의로 인해 여성들의 영광의 순간이 가려치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봤다.

이번 사건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연쇄적으로 폭로한 세계적 운동인 미투(Me too·나도 성폭력을 당했다)의 스페인판으로도 불린다. 에르모소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이제 끝이다(Se acabó)"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섰고 온라인에서도 해당 해시태그(#Se acabó)로 연대를 표시했다.

스페인 각지의 여자 축구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현수막을 들며 에르모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27일 세비야 소속 남자 축구팀 선수들도 #Se acabó 문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는 등 성별을 가리지 않고 동료들의 연대도 쏟아지고 있다.

스페인 언론인 마리아 라미레즈는 <가디언> 기고에서 해당 해시태그가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폭로하는 데도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투 운동이 스페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가운데 이번 사건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로 능력 있는 여성들이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경청될 만한 힘을 얻은 것"을 꼽았다.

지난해 대표팀 선수 15명은 빌다 감독의 훈련 및 선수 관리 방식에 괴롭힘 문제가 있다며 스페인축구협회에 그의 해임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 있다. 당시 루비알레스 회장은 선수들을 비난하며 빌다 감독을 지지했고 결국 문제 제기한 선수들 중 대다수인 12명의 선수가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20일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빌다 감독이 여성 코치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라미레즈는 미투 운동으로부터 시간이 지나 젠더 관련 법이 개선되고 의회 내 여성 비율이 높아진 것 등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수준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극우를 제외한 정치권 전반도 루비알레스 회장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욜란다 디아즈 스페인 노동장관은 28일 에르모소가 속한 선수 조합인 풋프로 지도자들과의 만남 뒤 25일 루비알레스 회장이 스페인축구협회 임시 총회 연설에서 "가짜 페미니즘"을 비난하며 사임 의사가 없음을 밝힌 자리에서 빌다 감독을 포함해 박수가 쏟아진 것을 규탄했다.

디아즈 장관은 "금요일 우리는 스페인 사회의 최악의 모습, 이 나라의 구조적 남성우월주의를 목격했다"며 "그들은 박수를 치고 모욕감을 주며 그들이 스포츠법에 따라 보호해야 할 사람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주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앞서 중도 좌파 사회노동당 소속인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대행도 루비알레스 회장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이레네 몬테로 스페인 평등부 장관 대행은 해당 행위를 "성폭력"으로 규정했다. 중도 우파 국민당 소속 쿠카 가마라 의원도 이 행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표현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UN) 사무총장 대변인도 28일 브리핑에서 사건 관련 질문에 "합의가 있었다는 어떤 징후도 보지 못했다"며 "스페인 정부가 이 문제를 여성 운동선수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뤘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드리드 자치대 정치학 교수인 마리암 마르티네즈 바스쿠난은 <뉴욕타임스>에 이번 사건이 가장 남성 지배적인 기관에서조차 성차별을 드러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비록 세대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스페인인들이 루비알레스 회장의 행위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지했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전혀 다수가 아니었다"고 짚었다.

그는 보수 정당까지 루비알레스를 즉각 비난한 것이 스페인 페미니스트 운동이 얼마나 진전됐는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20년 간 스페인이 젠더 평등 관련 입법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점해 왔다고 덧붙였다. 2004년 스페인은 가정 폭력이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명시적으로 인정했으며 지난해엔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가 명시적 동의 의사를 밝힌 경우에만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동의 강간법을 통과시켰다.

한편 루비알레스 가족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촌 바네사 루이즈는 루비알레스의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비인도적 사냥"이 이뤄지고 있다고 비난하고 스페인 남부 모트릴의 한 교회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며 에르모소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촉구했다.

▲스페인 시민들이 28일(현지시각) 마드리드에서 루이스 루비알레스 스페인축구협회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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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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