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후진국' 대한민국,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복지국가SOCIETY] 국민투표법 개정·지역 정당 설립이 필요한 이유

결국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방류되었다. 그 결과가 인류에게 어떤 재앙으로 다가올지 검증되지 않았는데, 인류와 해양생태계를 상대로 한 무모한 생체실험이 시작되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국민 대다수가 방류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오히려 방류를 과학적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이었다.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였다.

지난 정부에서 '눈 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한동안 떠돌더니, 이번 정부에서는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떠돈다. 촛불시민들이 무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분위기가 조성되고, 세계적으로 유행한 코로나19를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으로 대응하면서 찬사가 괜한 소리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경제적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5년 만에 정권을 교체당하면서 결국은 괜한 소리가 됐다.

눈 떠 보니 선진국 VS 눈 떠 보니 후진국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도 어떻게 될지 관심사다. 정권이 교체된 지 몇 개월 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의 청년들이 압사당하는 후진국형 참사가 일어나더니, 후속 조치 또한 이해하기 힘든 후진 모습을 보였다. 멀쩡하게 추진 중이던 고속도로가 정권이 바뀌자 대통령 일가의 땅이 있는 곳으로 급 변경되고, 정부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적극 찬성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현실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압권은 역시, 지난 8월 초에 있었던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였다. 그간 한국은 올림픽, 월드컵 등 세계적인 행사를 국격을 올리는 기회로 삼았지만, 세계 청소년 4만3000명이 참여한 잼버리 대회에서는 준비가 안 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면서 국제적인 망신을 초래했다. 그러니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 추락의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지난해 478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를 기록하더니, 올해 상반기에만 263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경제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그동안 유지해오던 세계 경제력 톱10의 지위에서 밀려나 지난해에는 13위를 기록했고, 올해는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국가에서 경제규모의 축소는 앞으로 다양한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매년 세계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하고 있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올 초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2'에서 대한민국은 21년에 비해 민주주의 지수가 8단계 하락한 세계 24위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조사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지난 2006년부터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점수로 산출해 오고 있다. 8점 이상은 '완전한 민주국가', 6점 이상은 '결함 있는 민주국가', 4점 이상은 '민주·권위 혼합형 체제', '4점 미만은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한다. 한국은 22년에 8.03을 기록해 가까스로 '완전한 민주국가(full democracy)' 등급을 받았다. 정치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사회적 신뢰가 점점 무너지고 있는 올해는 어떤 점수를 보일지 궁금하다.

급상승한 대만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지수 2022'에서 9.81를 기록해 1위를 차지한 노르웨이를 포함해, 북유럽 5개국 복지국가들은 모두 최상위를 기록했다(아이슬란드3위, 스웨덴4위, 핀란드5위, 덴마크6위).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대만이 10위안에 기록됐다. 전년도의 8위에 비하면 2단계 하락한 수치였다. 대만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지수가 그리 높은 국가가 아니었다. 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7점 중반대에 위치하면서 한번도 '완전한 민주국가'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0년 발표된 보고서에서 31위에서 11위로 20단계나 뛰어오르면서 <이코노미스트>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대'라는 찬사를 받았다. 민주주의가 정착하자, 22년부터 1인당 국민소득도 대한민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도대체 대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대만민주주의가 급성장한 것은 2018년에 개정된 국민투표법의 영향이 크다. 90년대 중반까지 대만은 국민당 1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였다. 1996년에 처음으로 총통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2000년 민진당으로 첫 번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민진당 정부는 2003년 국민투표법을 제정했는데, 국민투표가 대만 독립의 수단으로 활용될 것을 우려한 중국의 위협과 국민당의 완강한 반대로, 한계가 많은 법이었다.

2016년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당선되면서 해바라기 운동의 주역인 학생과 시민은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 달라"고 주장하며 국민투표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개정 작업에 집중했다. 2018년 통과된 국민투표법은 선거 연령을 20살에서 18살로 낮추고, 국민발안을 위한 서명인 수를 유권자의 5%에서 1.5%로 대폭 낮추었다. 유권자의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하고, 50% 찬성해야 통과되던 것에서, 찬성이 반대보다 높고 찬성 비율이 전체 유권자의 25% 이상이면 통과될 수 있도록 완화했다. 직접민주주의 정치제도인 국민투표가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든 셈이다.

그래서 2018년 연말에 10건의 국민투표가 진행돼 7건이 가결되고, 3건이 부결됐다. 이 가운데 민진당 정부가 추진하던 '2025년까지 원전 완전퇴출을 위한 법안'은 부결되기도 했다. 한국의 보수 언론은 대만의 탈원전 정책이 좌초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민투표 안건 가운데 '석탄 화력발전소 건설 중단'과 '매년 1% 생산량 감축'안은 가결되었고 '2025년까지' 탈원전을 완료한다는 전기법 개정안만 부결됐다. 이 밖에도 후쿠시마지역의 농산물 수입금지, 민법상 동성결혼 유지, 민법 이외의 방법으로 동성커플의 권리 보호 등은 가결되었고, 국제스포츠 대회에서 '대만' 명칭의 사용과 민법에 동성결혼 권리를 넣자는 제안은 부결되었다. 가결이 되든, 부결이 되든 국민은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의 효능감을 맛보기 시작했고, 대만민주주의는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를 강소국으로 만든 힘은?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국가는 스위스다. 흔히 직접민주주의의 3대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발안, 국민투표, 국민소환의 세계 총 추진건수 중 절반이상이 스위스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스위스는 대한민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고 인구는 6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자치헌법을 가진 26개의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정비된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국민발안, 국민투표 등이 전체 입법에서 미치는 비율은 3%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대의기구인 의회나 행정기구가 지지부진할 때는 국민발안이 가속장치 역할을 한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급주행할 때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제어한다. 이 때문에 스위스 의회와 정부는 국민의 뜻과 어긋나는 정치를 하기 힘들다.

스위스는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유럽의 가난한 약소국이었지만, 직접민주주의·강한 자치분권·연방제와 중립국 노선 등을 통해 급격히 성장했다. 올해 상반기에 발표된 1인당 명목소득은 9만8000달러로 세계 최고수준이다. 북유럽이 높은 조세부담, 높은 사회복지를 통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가고 있지만, 스위스는 대한민국과 비슷한 27% 내외의 조세부담율을 가지면서도 역동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낮은 수준의 조세부담율에도 불구하고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사회통합성을 높이고, 강한 자치분권을 통해 효율성을 높였기 때문에 세계 최고 수준의 강소국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추락하는 대한민국, 대책은?

대한민국이 추락하는 까닭은 정치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만의 대의정치가 한국사회를 망치고 있다. 대만이나 스위스 사례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민투표법 하나만이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정치경제는 금방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국민투표의 핵심은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에서 대리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되돌려 받는 것이다.

주권자가 되는 핵심은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튼튼한 그물망을 짜는 일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지난해부터 지역정당세미나·지역정당학교를 개설하고, 국내 최초로 <주민에게 허하라! 지역정당>이라는 지역정당 단행본을 펴냈다. 서울, 경기, 인천, 충북, 전북, 대구 등지에서 지역정당을 위한 싹들도 나오고 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 직후에 만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반 헌법적인 정당법이 6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지만,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또한 본래의 제 기능을 상실한 기존 대학을 대신해 '마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기초해 새로운 정치과 경제, 인문과 복지를 논하고 실천하는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자세한 것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튼튼한 그물망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국민투표법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소설과 영화가 있지만, 늦기 전에 날개를 펴지 못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거나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대한민국이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는 징후는 여기저기에서 보이지만, 아직 비상을 위한 날갯짓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많은 시민이 너무 늦지 않게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함께 날갯짓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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