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나치에 성공 못한 독일, 그래도 일본과는 달랐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3]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④ 뉘른베르크 재판(下)

뉘른베르크재판을 독일 사람들은 어떤 눈길로 바라보았을까. 많은 사람들은 나치 정권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전쟁 중에는 잘 몰랐다. '홍보의 귀재'로 알려진 요제프 괴벨스(공식직함은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의 치밀한 선전과 언론 검열로 전쟁의 진실을 알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더구나 연합군의 마구잡이 공습으로 생명과 재산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점령군에 대한 반감이 컸다.

독일 사람들이 침략국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책임의식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후반 거듭된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말미암아 책임의식은 무뎌지고 전쟁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이 강해졌다. 그렇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이 '승자의 정치적 재판'이라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봤다.

"불행한 독일 민족은 감상적이자 냉담"

독일 영토를 4개로 나눠 점령한 전승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지역의 각급 학교와 영화관 등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인권침해 사례를 담은 동영상들을 되풀이해 보여주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일 시민들에게 지난날 나치 정권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진상을 알리고, 다른 하나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라는 독일인들의 심리적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초기에 독일 시민들이 보인 반응은 냉담했다. 많은 이들이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인데.."라며 자신들을 '나치 동조자'로 바라보는 점령자들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실제로 전쟁 중 독일인들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집을 잃고 가족을 잃거나 죽음의 공포 속에 굶주림을 견뎌내야 했다. 따라서 나치의 공범으로 몰린다는 것은 억울해할만 했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토니 주트(전 뉴욕대교수, 역사학)는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때 독일인들은 (정치범과 포로, 유대인들을 가두고 강제노역을 시켰던) 다하우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를 다룬 다큐멘타리 영화를 관람해야만 식량배급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몇 해 이어진 뒤 독일 작가 슈테판 헤름린은 프랑크푸르트의 한 극장 풍경을 묘사했다. '나는 어슴프레한 영사기 불빛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영화가 시작되자, 대부분 고개를 돌렸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오늘 나는 생각한다. 외면한 얼굴이 진정 수백만 명의 태도였다고. 내가 속한 불행한 민족은 감상적이면서도 냉담했다'] (토니 주트, <전후유럽 1945-2005> 제1권, 열린 책들, 2008, 120쪽).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쟁범죄와 관련한 나치의 '흑역사'가 알려지면서 독일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자,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를 낳은 이른바 문명민족이라 자부심을 지녔던 독일인들의 야만과 잔혹성이 알려지면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분노를 느꼈다. '집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끝날 무렵인 1946년 10월의 한 여론 조사는 '재판이 불공정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6%에 그쳤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단순한 정치보복으로 열리는 재판이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 1943년 봄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의 무장 봉기 뒤 독일군에게 붙잡힌 유대인들.

독일인 37%, "독일인 안전 위해 유대인 없애야"

여기서 짚어볼 대목 하나. 독일 시민들 다수가 뉘른베르크 재판이 공정했다고 평가한 것과 독일 시민들이 나치 정권을 바라보는 평가는 편차가 있다. 적지 않은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가 주장했던) 나치즘은 좋은 생각이었는데, 현실에서 적용이 잘못 됐다'고 여겼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정권의 주요 범죄자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던 1946년 11월 미국 점령지구에서 이뤄졌던 여론조사에서는 독일인 응답자의 37%가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비(非)아리아 인들을 없애는 것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토니 주트, 121쪽 참조).

1952년의 여론조사에서도 6년 전과 똑같은 37%의 독일인이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히틀러를 '높이 평가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25%나 됐다. 독일인 4명 가운데 1명이 나치 전쟁범죄의 총책임자인 히틀러에 여전히 호감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밀턴 마이어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시카고에서 태어난 미 언론인이며 교육가다. 1935년 <시카고 이브닝 포스트> 기자로 한 달 동안 베를린에서 머물며, 아돌프 히틀러 총통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45년 독일 패전 뒤 다시 독일로 가서 낮은 직급의 나치 당원 10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목수, 교사, 빵집주인, 재단사, 경찰관 신분으로 나치당에 가입했었다.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마이어의 예상을 깼다. 10명 모두 히틀러를 좋게 보고 있었다.

[내가 만난 10명 가운데 히틀러에게 '도덕적 악'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총통이 저질렀다고 생각할 뿐이다. 히틀러의 실수 중에도 최악은 잘못된 보좌관을 선택한 것이라 여겼다. 미국의 경우로 바꿔 표현하자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치하에서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마다 그 지지자들이 내놓는 (측근 보좌진들이 잘못했다는) 설명과도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었다](밀턴 마이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독일인들, 1933-1945> 갈라파고스, 2014, 100쪽)

20세기 최악의 인물로 꼽히는 히틀러를 왜 그렇게 좋게 생각했을까. 나치 정권이 독일에서 집권한 12년 동안(1933-1945) 독일의 보통사람들에게 괴벨스 장관을 비롯한 나치 지도부의 정교하고도 치밀한 정치선전이 되풀이됐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강조했듯이, 게르만 민족의 이른바 '생존권' 또는 '생존을 위한 공간'(Lebenslaum)을 확보하기 위해선 팽창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독일의 보통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렸다. 나치정권의 거듭된 선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뇌 당했고, 독일 패전 뒤에도 '제3제국의 영광'이라는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나아가 만주를 차지하는 것은 일본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 했다. 다만 패전 뒤 독일이 일본과 다른 점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은 다수가 허황된 꿈에서 벗어났다. 유럽에도 극우세력이 힘을 키우고 극우정권마저 들어서고 있지만, 독일에서 네오나치 세력은 그리 위협적인 존재감을 보이진 않는다. 법으로도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일본에선 '대일본제국의 영광과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을 외치는 극우파 세력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선 걱정스런 흐름이다.)

야스퍼스, "독일인, 집단적 책임 있다"

앞의 여론조사에서 '재판이 불공정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6%에 그쳤다고 했다. 지난주 글(연재 32) 끝에서 짧게 짚었지만, 독일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데엔 또 다른 심리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단적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감이다. 독일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책임을 나치독일의 지도자들이 짊어짐으로써, 일반 시민들은 '나는 그 범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독일 국민이 져야할 집단적 책임이 면제된 것일까 하는 물음은 논쟁사항이다.

실존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그야말로 '실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식인이다. 그는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인들의 집단적 책임이 분명히 있고 따라서 그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렇다 해도, 뉘른베르크 재판이 독일 국민들에게 '집단적 죄'를 묻지 않는 점을 긍정적으로 봤다. 그는 패전 바로 다음해에 낸 <죄의 문제>(Die Schuldfrage, 초판 1946, 개정판 1965)에서 이렇게 썼다.

[이 재판이 우리 독일인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은 지도자들의 특정한 범죄들을 구별하고 나아가 독일 국민을 곧장 집단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재판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재판은 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전쟁을 범죄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야스퍼스, <죄의 문제> 앨피, 2014, 126쪽).

죽은 독일사람 뺀 나머지 모두가 죄인?

야스퍼스는 죄를 4가지로 구분했다. 법적인 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 등이다. 나치 히틀러 정권의 지도부가 저지른 죄는 '법적인 죄'이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정치적 죄는 독일 국적을 지닌 시민 모두에게 해당되고, 도덕적인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형이상학적 죄는 전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를테면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에 해당된다.

이렇게 죄의 범위를 넓혀 가자면, '죽은 독일 사람을 뺀 나머지 모두가 죄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집단적 죄인'들이 된다. (야스퍼스의 시각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뉘른베르크 재판은 나치 지도부 핵심 몇몇의 법적인 죄만 물었을 뿐, 독일 국민 모두의 도덕적 유죄를 놓고 집단적으로 단죄하지 않았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아래에서 살펴볼 하이데거보다는 훨씬 양심적인 철학자인) 야스퍼스는 '독일 제국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범죄'에 대해 독일인들 모두가 '도덕적이고 집단적인 책임'이 있음을 떠올린다. 후세대를 포함한 독일인들이 나치 범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 20세기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좌)와 마르틴 하이데거(우)는 나치 정권 아래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다른 길 걸은 두 실존철학자

야스퍼스는 같은 실존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와는 다른 길을 걸었고, 둘 사이에, 거기에 한나 아렌트(1906-1975)까지 얽혀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하이데거가 마르부르그 대학교수로 있을 때 아렌트는 18살 대학생으로 36살의 유부남인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 됐다. 아렌트와의 스캔들이 대학사회에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워진 하이데거는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인 야스퍼스에게 아렌트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고, 아렌트는 그 뒤부터 야스퍼스를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아렌트의 박사학위 논문(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의 지도교수가 야스퍼스다.

하이데거는 히틀러에 충성을 바쳐 전쟁 기간 중에도 편안한 삶을 살았던 반면, 유대인 아내를 둔 야스퍼스와 유대인인 아렌트는 힘든 길을 걸었다. 하이데거는 히틀러가 1933년 권력을 잡자, 3개월 뒤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곧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자, '히틀러 총통만이 독일의 진정한 현실이자 법'이란 아부처럼 들릴만한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를 못 마땅하게 여겼고, 독일을 구원해줄 인물이 히틀러라고 믿었다. 그는 나치당 입당 환영식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제1제국인 신성로마제국, 제2제국인 빌헬름의 독일제국에 이은 나치 히틀러의) 제3제국은 독일을 위한 새로운 지적, 정신적 세계다. (나치가 지향하는) 국가사회주의 건설이 오늘날 독일 대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과업이 되었다"(이본 셰라트, <히틀러의 철학자들> 여름언덕, 2014, 161쪽).

'히틀러의 철학자'란 소릴 들을 정도로 하이데거가 나치를 옹호하며 잘 나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야스퍼스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하이데거처럼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유대인인 아내와 헤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1937년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8년엔 출판물 간행도 금지 당했다. 유대인 아내가 수용소로 압송되기 바로 며칠을 앞두고 미군이 도착하는 바람에 다행히 고난의 시기가 끝났다(아렌트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아렌트에 대해선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과 '악의 평범성' 주제를 다루면서 다시 살펴볼 예정이다)

하지만 패전 독일에서 야스퍼스는 다시금 환멸을 느껴야 했다. 하이데거를 비롯, 지난날 나치에 협력했던 많은 대학교수들이 슬금슬금 다시 대학으로 복직되는 것을 보면서다. 그런 이유로 야스퍼스는 독일을 버렸다. 1948년 스위스 바젤 대학으로 옮겨갔고 독일 시민권도 포기했다. 20대 젊은 시절에 하이델베르그 의과대학에서 정신질환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던 야스퍼스는 지식층을 포함한 다수의 독일 사람들이 나치 독일에 열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구나 유대인을 아내로 둔 까닭에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치 체제에 영합했던 하이데거보다는 훨씬 더 깊이 있는) 실존적인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패전 뒤 독일의 모습은 탈(脫)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치 동조자를 그냥 나둬라"

독일이 항복을 한 1945년 5월8일 시점에서 독일에는 나치 당원이 800만 명이었다. 대학이든 병원이든 많은 부서가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한 나치당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독일 쾰른에 가까운 작은 도시 본에서는 의사 112명 가운데 102명이 나치 당원이었다. 쾰른 시청에 근무하는 상수도국 엔지니어 21명 가운데 18명이 나치 당원이었다(토니 주트, 118쪽 참조). 이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나치 독일의 침공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제는 이들 의사나 상수도국 엔지니어를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그만 두라고 직장에서 쫓아낼 경우에 생겨난다. 연합군의 잇단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된 쾰른의 상하수도 시설들을 복구하기가 어렵게 되기 마련이다. 전 나치당원들을 빼고 다른 기술 인력들로 새로 채우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본의 나치 당원 경력을 지닌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전염병 예방이나 질병 치료에서 이들은 필수 인력이었다.

탈(脫)나치 정책을 펴려 했던 점령 당국은 위와 같은 문제에 부딪쳤다. 미군 점령 지역의 경우, 지역 인구의 4분의 1인 350만 명이 나치 당원 또는 나치 협조자로 분류돼 언제라도 고발 가능한 명단에 올라 있었다. 미군 점령 초기엔 나치 당원 경력을 지닌 교사들은 학교에서 퇴출됐고 학교 도서관의 친나치 서적들도 모두 폐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위의 쾰른이나 본의 경우처럼 탈나치의 문제점들이 불거졌다. 그러면서 탈나치 정책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영국 점령지역인 쾰른에서 시장을 지낸 콘라드 아데나워(1876-1967)다. 기독교민주연합(약칭 기민련, CDU)를 이끌며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초대 총리가 되기 3년 전인 1946년 대중연설에서 아데나워는 이렇게 외쳤다. "나치 동조자들을 그냥 내버려 둬라." 나치 정권 아래서 감옥에 갇히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아데나워였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정치인이었다. 1933년부터 독일 12년 동안 지배한 나치즘의 뿌리가 워낙 독일사회에 깊게 박혀 있기에, 무리하게 청산작업을 벌이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흐지부지 된 탈(脫)나치 정책

글 앞에서 야스퍼스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친나치 교수들이 속속 대학에 복직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독일을 떠나 국적마저 버렸다고 했다. 야스퍼스가 독일을 떠날 무렵인 1948년엔 탈나치 정책은 사실상 폐기됐고, 많은 전 나치당원 해직자들이 원래의 일터로 돌아갔다. 이를테면 바이에른 주에서는 1946년까지 교사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해직됐지만, 1948년 모두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도우파 성향을 지닌 아데나워는 '탈나치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이 독일에 이롭다'고 판단했다. 1949년 아데나워 총리의 서독 정부는 공무원과 군 장교의 지난날 나치 이력을 조사하는 작업을 중단하고 불문에 부쳤다. 그러면서 더욱 많은 나치 관련자들이 공직에 자리잡게 됐다. 아데나워는 이런 조치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장기 연임 총리(1949~1963)로 오늘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서독의 경제 부흥에 애썼던 인물'로 기억된다. 이와 관련된 토니 주트 교수의 글을 보자.

[(아데나워 정부의 전 나치 경력자들의 복직 허용으로) 1951년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는 판사와 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 지역농업부 공무원의 60%가 나치 당원 출신이었다. 1952년 서독 외무부 공무원은 세 명 중 한 명꼴로 나치 당원이었다. 새로 구성된 서독 외교단의 43%는 전직 친위대원이었고 17%는 보안대나 게슈타포(비밀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토니 주트, 120쪽).

서독에서 탈나치가 중단된 배경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쾰른의 나치당원들이었던 상수도국 엔지니어들을 해고할 경우에 닥쳐올 현실적 어려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철의 장막'이란 단어가 상징하는 동서 냉전구도 아래에서의 체제경쟁이다. 서독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킨 미국의 시각에서는 서독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한 반공기지로 자리 잡길 바랐다.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의 경우는 어땠을까.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 날 소련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동독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동독공산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 당수)는 당 대의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민족의 비극은 그들이 범죄집단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사실에 있다. 독일의 노동계급과 생산직 주민들은 역사 앞에 실패했다."(토니 주트, 122쪽 참조).

울브리히트의 동독은 나치 전력을 지닌 대기업가와 공무원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아데나워의 서독보다 관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처음에 내걸었던 '나치즘의 유산을 모두 쓸어 없앤다'는 대원칙에 철저하지도 않았다. 동독도 전후 재건이란 바로 코앞의 과제를 풀어가야 했기에, 앞에서 보기를 들었던 '쾰른의 상수도국 엔지니어' 처리와 같은 문제를 대충 얼버무려야 했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여인들. 독일은 이들을 학대한 혐의를 받는 전범들을 지금도 추적해 재판에 넘기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큰 차이

탈나치 정책이 흐지부지된 된 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해당 직종의 전문직을 해고하기 어렵다는 실용적인 측면과 동서 냉전체제가 두 가지 주요 요인이었다. 패전 뒤 일본의 상황도 독일과 판박이다. 1948년 12월 맥아더 장군이 (도조 히데키의 전시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지냈고, 1950년대에 일본총리가 되는) 기시 노부스케 같은 주요 전범들을 풀어준 것도 동서냉전 구도에서 일본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려는 미국의 계산이 작용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일본은 이른바 기지국가(基地國家)로 한반도 전쟁의 병참보급 기지로 활용했고,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과 같은 날에 맺은 미일안전보장조약으로 일본 전범처리는 물 건너갔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은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은 전범자들이 활개치고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버젓이 자리를 잡은 데 견주어 독일은 그렇지 않다. 나치 경력을 지닌 자들이 다시 복직을 하긴 했지만, 나치 정권의 인권 탄압과 전쟁범죄에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다고 비난 받을만한 경력을 지닌 사람은 주요 직책을 맡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더구나 가혹행위에 관련됐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된다. 신분세탁을 하고 도망친 전범자들도 추적을 받고 붙잡힐 경우 고령의 나이에도 처벌을 받는다.

과거사를 둘러싼 독일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 사퇴 사건이다. 1978년 한스 필빙어 주지사는 나치 시절 판사로 있으면서 독일군 탈영병에서 사형을 언도했던 전력이 뒤늦게 밝혀지고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스스로 주지사 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전쟁 중인 상황에서 탈영범은 사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필빙어 판사가 군사법정에서 내렸던 사형 판결은 '적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독일의 역사인식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공인으로 고위직에 몸담고 있는 것을 눈감아주기 어렵다. 일본에서 그런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물음은 어리석은 물음이다. 필빙어 주지사처럼 물러나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 일본의 분위기다. 애당초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범 처벌은 시효가 없다

잊을 만하면 독일에서 들려오는 뉴스가 있다. 나이 90을 넘긴 노인이 지난날 전쟁범죄 혐의로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다는 뉴스다. 이들은 나치 정권의 고위직이 아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감시탑 경비원으로 있었다거나, 수감자를 총살형으로 죽일 때 다른 독일군 병사들과 함께 총을 쐈다는 독일군 친위대(SS) 사병, 수용소장의 학살 명령을 타자기로 받아썼던 여비서 등이다. 이들은 워낙 나이가 많아 재판 중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기도 한다. 판결은 대체로 짧은 유기징역으로 그쳤지만, 전범 처벌은 시효가 없음을 말해준다.

이들이 직접 가혹행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전쟁범죄의 현장에 몸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살인 방조' 또는 '살인 공모'로 유죄라는 것이 독일의 분위기다. 타인의 고통을 배려하고 생각이 깊은 독일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늦었지만 이런 전범 처벌 노력이 희생자들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역사의 교훈이 되길 바란다."

독일은 전쟁범죄에 얽힌 과거사를 부끄럽게 여기지만 덮고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사 배상도 적극적이다(본 연재 29 참조). A급 전쟁범죄자들이 군신(軍神)처럼 추앙 받으며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정치인이 걸핏하면 망언을 일삼고 선거철엔 그 망언 이력을 훈장처럼 내거는데도 유권자들이 그에게 지지표를 던지고, 과거사 배상에도 소극적인 오늘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음 주엔 도쿄 국제군사재판의 과정과 문제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주

요 전범자들의 발언과 그 뒷얘기 등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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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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