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필요해서 물류센터에 입사했습니다

[기고] '왜 여기서 이런 일 하냐'는 질문에 '나는 이게 좋아요'라고 답하기 ①

한국사회에서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물류센터 노동자입니다'라고 답하면, 다른 직장을 찾기 전 잠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퇴직 후 용돈벌이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혹은 능력, 학벌 등이 부족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류센터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업무를 그저 괜찮다고 여기는 걸 넘어서 일터를 애정하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터를 위해 애쓰는 게 회사의 '눈엣가시'가 되어서 해고를 당한 후,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며 소송을 하고 '복직 투쟁'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안 좋은 일자리'라며 수군거리는 일터로 복직하겠다고 기를 쓰고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쿠팡노동자의 건강한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전합니다. 로켓 배송으로 유명한 쿠팡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었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

2010년, 성용씨가 대학에 입학했다. 1학년 땐 학과 소속이 아니라 반 소속이었다. 여러 반으로 다들 나뉘어서 학교 생활을 했는데, 성용씨는 그중 '사회악반'이었다. 다소 특이하게도 1반, 2반, 3반처럼 평범하게 이름을 짓는 게 아니라 반마다 원하는 이름을 붙이는 구조였다. 그리고 반 이름에 걸맞게도 전체 반 중 가장 '빨간' 곳이었다. 우연히 배정받은 반엔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에 관심 많은 선배가 잔뜩 있었다. 성용씨는 이들과 학회를 하면서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다. 1학년 때 가장 열심히 한 게 학회였다. 학회는 아주 밀도 있는 커리큘럼을 갖고 있었고 그에 맞춰 성용씨는 엄청나게 공부했다.

여름방학에 성용씨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선배의 전화였다. 오늘 집회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선배에게 이끌려 생전 처음으로 간 집회는 꽤나 강렬했다. 발언들은 분노에 차 있었고 경찰과는 싸웠다. 그러나 대오 속에 있을 땐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대오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감정이 뇌리에 남아있다. 집회 중간에 일이 생겨서 학생들이 다같이 대오에서 나왔는데, 자신의 신분이 바뀌어 있음이 느껴졌다. 불법 집회참가자에서 평범한 시민이 되었다. 자리를 이동했을 뿐, 내가 바뀐 것은 전혀 없는데 뭔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모순이었다. 그때, 성용씨는 모순이란 게 감정으로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첫 노조 생활

성용씨는 학내외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려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군대를 가려고 보니,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군대에 입대하면 군사재판으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입대를 조금 미뤘다. '아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지?'라고 생각하던 2016년 4월, 성용씨가 한국지엠 정규직 지부에 선전부장으로 들어갔다. 채용상근이 된 성용씨는 1만 2천명의 조합원이 읽는 소식지를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그때 '힘 있는 노조가 활동하는 법'을 배웠다.

지부에 직접 가입된 조합원들이 매일 매일 30명정도가 전임자로 상근활동을 했다. 각 지회마다 별도로 상근활동가가 또 있었다. 하루에 지부 소속 상근활동가만 30명이나 되는 걸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노조에선 '못 볼 꼴'도 봤다. 당시 지부장이 채용 청탁 비리 관련 문제에 연루되면서 집행부 전원이 총사퇴했다. 집행부 임기에 맞춰 채용 상근자들의 임기도 정해지기에 2017년 2월, 성용씨는 10개월의 다소 짧은 활동을 마치고 선전부장 일을 그만하게 되었다.

돈이 필요해서 들어간 쿠팡, 시키는 대로 살았다

2020년 6월 24일, 성용씨가 일용직으로 쿠팡 물류센터에 출근했다. 이전에도 가끔 단기로 일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제대로 다녀보자'는 생각으로 출근한 거였다. 당시 성용씨는 워킹홀리데이로 갔던 호주에서 코로나 셧다운으로 인해 전혀 일을 못했고 돌아온 후 입사했던 손 세정제 공장에서도 오래 다니지 못하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즉, 돈이 필요했다. 성용씨는 쿠팡의 ICQA(Inventory Control and Quality Assurance) 공정에서 일했는데, PDA 기계로 쉴 새 없이 바코드를 찍으며 수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한 섹션의 모든 상품을 찍은 후 수량이 맞는지 확인한다. 만약 맞지 않으면 개별 상품 종류별로 수량을 체크하고 또 맞지 않으면, 이번엔 다른 사람이 또 체크하는 공정이었다.

며칠간 일해본 성용씨는 '이 정도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7월 2일, 일용직이 아닌 3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성용씨는 좀 더 긴 기간의 계약직을 원했지만 쿠팡은 아니었다. 쿠팡은 계약직을 고용할 때 처음부터 1년 혹은 2년짜리로 계약하지 않는다. 3개월, 9개월, 12개월 계약을 차례로 해야 하고 그 기간을 모두 버텨서 해고되지 않으면 무기계약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일명 쪼개기 계약이었다.

노조 활동을 했던 사람이니까 성용씨가 현장에서 부당함을 참지 않고 싸웠을 거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성용씨는 노조 조직을 위해 입사한 게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해서 입사한 것이었기에 다른 노동자들과 비슷했다. 아침 8시까지 출근하면 되는데 셔틀버스는 '혹시 출근 시간에 차 막혀서 출근이 늦어질지도 모른다'며, 노동자들을 7시에 센터에 내려주었다. 한 시간동안 노동자들은 각자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물론 회사는 그 시간만큼 임금을 지급하진 않았다. 노동자가 자기 마음에 안 들 땐 '사실관계확인서'를 강요했다. 업무 중 실수했을 때만 쓰는 게 아니었다. 업무 시작 전 체조 시간에 늦었을 때, 화장실을 오래 다녀왔을 때도 그때마다 '너 사실관계확인서 쓸래? 똑바로 해', '한 번만 더 이러면 사실관계확인서 쓸 줄 알아'라고 하는 등 억압적인 말투로 확인서를 입에 올렸다.

사실관계확인서는 정말 사실 확인용 서류가 아니라 노동자의 행동을 제약하고 관리자가 원하는 대로 노동자를 움직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성용씨도 몇 번이나 썼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성용씨는 가만히 있었다. 출근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와서 멍하니 있어야 할 때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사실관계확인서를 강요받았을 땐, 정말 열심히 썼다. 왜 자기가 그런 행동을 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웠다. 관리자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다. 오래 잘 다니고 싶었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미국 뉴욕증시 상장사인 쿠팡의 올해 2분기 매출이 58억3천788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 증가하면서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쿠팡이 제시한 분기 평균 원/달러 환율 1천314.68원을 적용하면 매출은 약 7조6천749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사진은 9일 서울 시내의 한 주차장에 세워진 쿠팡 배송차량들 모습. ⓒ연합뉴스

노동조합이요? 여기서요?

2020년 겨울, 성용씨는 퇴근하려고 센터에서 나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마주했다. 공공운수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이 센터 앞에서 팜플랫을 나눠주며 노조를 만들자고 말하고 있었다. 물류센터에도 노동조합이 필요하고, 만들 수 있다고 함께 하자고 했다. 성용씨는 그 앞에서 팜플랫을 받아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긴 노조 못 만들 거 같은데...' 성용씨의 혼잣말이 그저 비관주의인 것은 아니었다. 인천4센터의 노동자 중 약 절반이 단기(일용직)다. 이번 달에 생활비가 조금 모자라서, 여행 가려는데 경비가 살짝 부족해서, 졸업 후 직장에 취업하기 전에 조금 붕 뜨는 기간이 있어서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오늘 오고 한참 뒤에나 한 번 더 올 법한 곳이라고 생각하니, 센터 내 시설이 엉망이고 관리자들의 갑질이 심해도 '오늘 한 번만 버티고 말지 뭐'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리곤 했다. 친구들에게 쿠팡 물류센터가 나쁘다며 뒷담화 한 번 하고 잊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일터를 바꿔낼 정도로 애정도, 불만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계약직 노동자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3/9/12개월로 쪼개기 계약을 하기에 노동자들은 다음 계약을 못할까봐 관리자의 눈 밖에 나길 매우 꺼렸다. 부당한 상황에서 말대꾸 한 번 하기도 망설이는 노동자들이 '감히' 노조에 가입해서 회사의 눈엣가시가 되는 걸 감수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성용씨는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가입을 안 할 수는 없지' 활동을 결정하니 오히려 안에서 불꽃이 더 올랐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인생에 또 있을까?' 활동가 정체성에 붙은 불은 욕심이 되었다. 성용씨는 과감히 노동조합 준비모임, 이어서 노동조합에 가입함으로써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인천, 부천의 조합원 만남을 했을 때 나온 조합원은 3명이었다. 고작 세 명이 인천과 부천 전체 지역의 조합원 모임에 나온 거다. 그렇다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총 조합원이 13명이었다. 그러나 숫자는 조금씩 늘어났고 이들은 여름 폭염이 심각한데 쿠팡은 방치한다며 이를 문제 제기했다. 조합원 숫자는 적었을지 몰라도 문제 제기는 정당했기에, 쿠팡은 노동자들에게 얼음물과 아이스크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센터 내 충분한 에어컨과 선풍기 등 냉방장치를 설치하라는 노조의 요구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였다. 노조는 아쉬움이 컸다.

▲14일 오후 서울 쿠팡 잠실 본사 앞에서 휴게 시간 보장 등을 촉구하는 쿠팡 노동자 투쟁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는 조금 달랐다. 선전전을 하는 성용씨에게 상기된 얼굴로 와서 얼음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며, 전부 노조 덕분이라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노조가 있으니 좋다고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노동자가 많았다. 해준 일에 대한 작은 성의라며 초콜릿이나 과자를 주는 노동자도 많았다. 그때마다 성용씨는 해냈다는 뿌듯함과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고작 이런 거에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2022년 6월 23일, 성용씨는 해고되었다. 쿠팡은 처음엔 해고 사유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노동조합 간부를 해고하면서 사유도 알려주지 않는 게 어딨냐며 노조는 쿠팡의 잠실 본사 로비를 점거했다. 물론 다른 요구사항도 있었지만 전부 작고 귀여운 요구였다. '휴게시간을 달라', '에어컨을 설치하라', '부당해고 철회하라', '노조할 권리 보장해라'. 점거는 약 한 달간 이어졌으며, 점거가 끝난 후에도 본사 앞에서 약 292일간 천막 농성을 이어갔다.

그 결과, 노조는 많은 것을 바꾸어냈다. 동탄과 고양의 쿠팡 물류센터엔 적은 숫자지만 에어컨이 설치됐다. 실외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던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 실내 노동자에게도 적용되도록 개정됐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일 때 매시간 10분, 35도 이상일 때 매시간 15분 이상 휴게시간을 부여하도록 바뀌었다. 투쟁의 성과였다.

그러나 쿠팡은 개정된 고용노동부의 가이드라인에도 불구하고 쿠팡은 물류센터 노동자들에게 휴게시간을 아예 주지 않거나 하루에 한 번만 주고 있다. 2023년 7월 26일, 노조는 이를 감시하겠다며 인천4센터 옆에 천막을 쳤다. 성용씨는 매일 천막에 나와 40도가 훌쩍 넘는 더위에도 "사원님들! 휴게시간을 달라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라며 소리치고 있다.

▲14일 오후 서울 쿠팡 잠실 본사 앞에서 열린 쿠팡 노동자 투쟁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물풍선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대 출신이지만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서울대 출신이고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겁니다.

성용씨는 서울대를 졸업했다. 사람들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면 돈 많이 버는 대기업에서 일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가 젊고 노동조합까지 하면, '얘 위장 취업한 거 아냐?', '노조 만들라고 입사했구만'이라고 섣부른 생각도 한다. 성용씨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성용씨는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지금이 80년대인가요?"라고 답한다. 성용씨는 돈이 필요해서 물류센터에 입사했고 노동조합이 있길래 가입했다. 그리고 노조가 말하는 전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센터 환경을 바꾸어냄으로써 내 일터가 변하는 것. 그것이 다른 기업 물류센터의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 그게 좋다. 그 과정에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성용씨는 “제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해서 그 계획에 함께하면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이게 좋아요”라고 한다.

직업 선택과 노조 가입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대학을 나왔으면 이 정도 직업은 가져야지'라는 편견에 갇혀서 상대가 무엇을 얼마나 좋아하는진 무시하고 의심부터 하는 걸 상대를 존중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내가 선택한 현장이 좋고 함께 하는 동료가 좋고 노조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으니 함께 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성용씨의 학교, 학과, 나이만 쳐다보느라 활동할 때 성용씨의 행복한 표정을 놓쳤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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