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1.5세대와 리영희의 인연, 대학 한국학 단체 출범으로

[다시! 리영희] 나와 리영희 교수의 만남

1987년, 민주주의를 위한 대규모 시위가 군사독재자 전두환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국민 직접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역사적인 개헌을 이뤄내면서 수십 년에 걸친 한국의 권위주의 통치가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 한인사회의 보수적 시각은 거센 강물 한가운데 놓인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민중운동에 자극 받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인 학생들은 이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생들은 한국 사회와 정치의 진보적 변화에 관한 강좌를 개설하기 위해 지역사회에서 기금을 모금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베이 지역(bay area: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의 광역 도시권)과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시민지도자, 기업, 한인 언론에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지성인을 초청하여 이 강좌를 가르치고 싶다고 설명했습니다. 학생들이 선택한 강사는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리영희였습니다.

당시 저는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중단하고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구하는 운동가였습니다. 저는 부모님 임창영 이보배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 또래의 한국인 친구도 없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정권 아래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버클리에서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과 리 교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왼쪽부터 임창영, 함석헌, 이보배. 폴 림의 부모 임창영과 이보배 선생님은 두 분 모두 독립운동.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자료제공 바보새 함석헌

1985~86년경에 UC 버클리 학생들이 저에게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에 관한 비공식 스터디그룹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고,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며, 이중 문화권에 속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1.5세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제가 만난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살의 학생들로 자신감이 넘치고 호기심이 많으며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와,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972년 대학 재학 중 로스앤젤레스의 한 청소년 프로그램에서 카운슬러로 일하면서 1.5세대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들은 1965년 미국 이민정책의 자유화 이후 한국에서 대규모로 이민 온 첫 번째 물결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열한 살에서 열세 살에 불과했지만 이미 세대 간 문제와 문화충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낼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수만 명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전국의 대학 캠퍼스로 진출해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한국을 분단시키고 "광주의 학살자"였던 독재자 전두환을 지지한 미국의 역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대담하고 두려움 없는 새로운 커뮤니티의 리더십이 등장했습니다. 버클리대 학생들이 리 교수를 미국으로 초청할 계획이라고 말하며 조교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폴 림의 재단 방문을 기념하며 다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사진의 왼쪽부터) 폴 림, 디앤 보쉐이, 윤영자, 정현백, 이미정. ⓒ리영희재단

리 교수는 제가 만났던 그 세대의 다른 많은 한국인들과는 달랐습니다.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외국인의 '자비'에 의존해 한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야심찬 한국 정치인들이 5.16 쿠데타 직전 유엔 대사였던 아버지 임창영과 친분을 쌓기 위해 우리 집 문 앞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계략은 함께 사진을 찍은 저명한 미국인 사진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사진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투표해달라고 설득할 것이라고 실망스럽게 설명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그런 식으로 판단했던 건 옳지 않았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그런 상상을 한 건 한국인들의 잘못이 전혀 아닙니다) 미국은 금빛 도로로 포장된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리 교수는 일체의 그런 생각을 안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분단, 미국의 폭격,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난했습니다. 당대 최초로 중국을 연구하고 글을 쓰면서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선과 악에 대한 가정에 도전했고, 진실을 탐구하는 데 방해가 될 때마다 국가보안법에 과감히 저항하며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에 발을 디딘 적도 없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본 적도 없는 한국계 미국인인 저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의 젊은 동포로서 포용해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그저 수업에 도움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평생의 친구를 얻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1987년 가을, 6.10 민주화운동 직후에 리 교수의 강의인 'IDS 191 X'(당시 수업의 학정 ID)가 개설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리 교수는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한반도의 두 분단국가 출현, 전쟁과 그 여파,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수출 주도 경제성장과 노동운동의 등장, 광주항쟁, 통일 전망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강의했습니다. 198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두환이 직접 지명한 후계자 노태우에 의해 북한을 방문하고 보도하려다 투옥되었습니다. 버클리대 학생들은 대학의 모든 학과 교수들을 모아 한국 법원에 리영희를 석방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리 교수에 따르면 이 탄원서가 그가 석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IDS 191 X를 조직하고 리 교수 부부와 친분을 쌓은 학생들이 모여 캠퍼스 내 새로운 학생 조직인 '한국학위원회The Committee for Korea Studies'를 결성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1991년부터 처음으로 남북한에서 연사를 초청해 심포지엄 시리즈를 개최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기회에 들려드릴 이야기입니다. 저는 3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리 교수님 부부와 함께 지냈습니다. 리 교수님, 그의 친구 분들과 서울의 어느 산 정상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양쪽 발목을 삐끗하고는 "기분이 참 좋다"고 혼자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리 교수님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리영희의 IDS 191 X 강의 자료. ⓒ리영희재단

그러다 며칠 전, 올해 7월 서울에서 리 교수 부인 윤영자 여사를 만났습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저는 7월 27일과 28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전국 행동'에 참가했습니다. 이 행사는 코리아피스나우(koreapeacenow.org)와 위민크로스디엠지(womencrossdmz.org)가 주최하고 KPI 코리아정책연구소(kpolicy.org)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후원했습니다. 이번 집회에는 400~500명의 한국계 미국인들과 미국의 평화와 종교에 기반한 활동가들이 참가했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계 미국인 연대 운동의 역사에서 이번 집회는 그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유례가 없는 행사였습니다.

주최자들은 주로 젊은 세대의 여성들로, 2015년 한인 활동가 크리스틴 안이 이끄는 30명의 국제 여성 대표단이 비무장지대를 횡단한 데서 영감을 받아 모였습니다. 이 DMZ 횡단은 디앤 보쉐이 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크로싱>의 주제로, 전 세계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프로그램은 아마도 한국계 미국인 퍼포먼스 아티스트 이도희와 호평을 받은 소설 <핵가족>의 저자 조셉 한이 주도한 참여형 커뮤니티 애도식일 것입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으로 인한 세대 간 트라우마를 매일 견뎌내고 있는 친척들과, 가족과 헤어진 채 못 만나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분들을 여기로 불러옵시다. 이날(7월 27일)의 모든 행사에 이분들과 함께 합시다"라고 우리에게 요청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전쟁 종식, 한반도 평화"를 외치며 링컨 기념관을 향해 워싱턴 DC 거리를 행진했고, 저도 (하늘에 계신) 부모님과 리 교수님도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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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에서 링컨 기념관으로 향하는 한반도 평화 행진에서 플래카드를 든 폴 림. 자료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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