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값 2배 뛸 것"…러 흑해곡물협정 이탈 뒤 아프리카·중동 '비상'

"값 오르면 가난한 손님은 못 사" 소말리아 상인들 밀 비축 시작…젤렌스키 "러 빼고 유엔·튀르키예와 유사 협정 추진"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연장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및 빈곤국 식량난에 비상이 걸렸다.

러시아의 이탈로 흑해곡물협정이 만료된 17일(현지시각) 국제 밀값은 걱정만큼 폭등하진 않았다. 러시아의 탈퇴 선언 뒤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밀 선물 가격은 이날 장중 한 때 3% 넘게 급등했지만 이후 상승분을 반납했다. 러시아와 브라질에서 밀 공급이 늘어난 점, 중국 경기 회복세가 더뎌 세계적으로 수요가 줄고 있는 점 등이 가격 상승을 제한한 요인으로 꼽힌다.

아프리카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상인들이 밀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현지 상점주 모하메드 오스만은 통신에 "도매상들이 밀값을 대폭 올리기 전에 더 많은 밀을 사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상점을 이용하는 가난한 손님들이 밀을 비롯해 비싼 식량값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가디슈의 일부 중개인들은 현재 20달러(약 2만5000원)인 밀 한 포대(50kg) 가격이 30달러(3만8000원)로 급등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해바라기유, 밀, 보리 등 식량작물의 주요 생산지로 특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등 인근 지역의 의존도가 크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소말리아는 밀 공급의 90% 이상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했고 레바논·이집트·파키스탄은 80% 가까이, 리비아도 60% 이상의 공급을 이 두 나라에 의존했다.

특히 레바논, 파키스탄, 리비아는 두 나라 공급분 중 우크라이나에서 들여 오는 물량이 훨씬 더 많았고 소말리아도 절반 가량의 물량을 우크라이나에서 공급 받았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 한 달 만에 레바논 일부 제과점에서 빵값이 70%나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등 전쟁 직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이 막히자 이들 지역의 식량값은 급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7월 유엔(UN)과 튀르키예(터키)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가 흑해 봉쇄를 풀고 우크라이나 곡물의 출항을 막지 않도록 해 전세계 식량 불안에 안도감을 가져 왔다. 지난해 7월 140.6을 기록했던 FAO 식량가격지수는 올해 6월 122.3까지 떨어져 전쟁 전 수준으로 안정된 상태다.

그러나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을 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궁(크렘린) 대변인은 러시아가 요구한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7일 흑해곡물협정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는 자국 농산물과 비료 수출을 보장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수차례 협정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해 왔다.

다만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 관련 (요구) 사항 충족 즉시 러시아는 협정 이행에 복귀할 것"이라며 여지를 뒀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또 이날 앞서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크림대교가 공격 받은 것은 협정 종료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공격 배후로 우크라이나를 지목한 상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모가디슈에서 두 배로 뛰었던 밀값은 지난해 7월 흑해곡물협정이 타결된 뒤 하락했다. 러시아의 협정 이탈 소식을 듣고 상인부터 제빵사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모든 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이유다. 모가디슈 난민촌에서 다섯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할리마 후세인은 <로이터>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구호기관들이 우리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그들도 줄 것이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십 년 만에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케냐의 코리 싱오에이 외교부 사무차관은 협정 파기로 이미 높은 식량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1~2파운드였던 상품값이 4파운드로 올라 값이 2배가 될 것"이라고 <로이터>에 우려했다. 밀 대부분을 수입하며 정부 보조금을 투입해 빵값을 안정시키고 있는 이집트도 위기감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이집트 공급 당국은 지난달 통신에 "글로벌 시장 안정에 중요하기 때문에" 협정이 연장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협정 이탈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전세계 빈곤층에게도 악재다. 유엔은 지난 10일 흑해곡물협정의 성과를 정리한 자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전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구호 식량 절반이 우크라이나에서 나왔고 전쟁이 발발한 2022년에도 이 비중은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 협정이 타결된 지난해 7월 이후 1년 간 WFP가 우크라이나에서 선적한 밀만 72만5000톤에 이르며 그 중 대부분이 에티오피아(36%), 예멘(21%) 등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지원됐다.

샤유와트 사라프 국제구호위원회(IRC) 동아프리카 지역 비상국장은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케냐 등이 협정 중단으로 인한 타격을 크게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식량값이 상승하면 수혜자들이 같은 양의 식품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지원금의 액수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수혜자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고 <로이터>에 덧붙였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17일 "흑해곡물협정 시행을 중단하기로 한 러시아 결정에 깊이 실망했다"며 "오늘 러시아의 결정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앞서 협정 연장을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러시아 농업은행의 자회사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시스템에 다시 연결시키겠다는 안을 제시했다고 밝히며 제안이 거절된 데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7일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탈퇴는 "무책임하고 위험할 결정"으로 "러시아 정부가 결정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곡물협정을 통해 운송된 3300백만 톤의 식량 절반 이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식량 불안정을 겪는 지역을 포함해 개발도상국으로 전달됐다"고 설명했다. 또 설사 빈곤국으로 직접 향하지 않더라도 "세계 시장에 곡물을 공급해 가격을 낮추므로 협정을 통한 모든 선적은 최빈국의 어려움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쪽은 앞서 협정을 통해 수출되는 곡물 대부분이 가난한 나라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협정을 통해 수출된 곡물의 20% 가량이 중·저소득국 및 저소득국에 전달됐다.

흑해를 통한 곡물 운송이 어려워질 경우 육로 수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비용이 더 들어 결국 우크라이나 생산자들이 받는 몫이 적어질 수 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게다가 이미 값싼 우크라이나 작물이 육로를 통해 밀려 들어오며 주변국 농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7일 연설에서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 없이도 운영될 수 있고 운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구테흐스 사무총장에게 흑해곡물협정 또는 유사한 3자 협정을 지속하자는 제안을 담은 공식 서한을 보냈다"며 "우크라이나, 유엔, 튀르키예가 선박 검사와 식량 통로 운영을 공동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흑해곡물협정에 따라 곡물을 실은 한 선박이 17일(현지시각) 튀르키예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곡물이 전쟁 중에도 안전하게 수출될 수 있도록 한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의 연장 거부로 이날 자정을 기해 공식 만료됐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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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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