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동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던 기적의 쉼터

[기고] 나의 8년을 지켜준 곳.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해준 곳

신선하고 상쾌한 바람, 따뜻한 햇살.

푸르고 푸른 청초한 댓잎

익숙하게 휘어진 비탈 오르막 길, 작은 흙집.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가고, 익숙한 사람들이 되고.

(2019. 1. 29)

장마비가 시작되었다,

우둑둑 내리는 비가 아니라 쉼없이 주룩주룩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보이는 소리이다,

(6,26)

쉼터 송년회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런 공간을 열어준 분들, 운영자 분들, 후원자 분들, 공양주분, 중묵처사님…

소박한 귀정사, 사시사철 아름다운 변화로 위안을 주는 자연, 구들 작은 오두막

긴 시간동안 머물게 해 주셔서 그저 감사합니다,

(12, 29)

나는 부끄럽지만 1980년대 초반 고대에서 학생운동을 거쳐 처음엔 구로공단 노동자로 갔고, 이후 성남 지역으로 옮겨 오랫동안 사회운동, 여성운동 등에 함께 했던 여성노동자였다. 운명처럼 큰 병마가 몰려들기 전까지 건설일용노조 등을 일구던 남편과 함께 청년시절의 꿈을 배신하지 않고 참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세월에 후회 없다. 생각지도 못 할만큼 끔찍한 큰 병마가 찾아와 절망스러웠을 때 전북 남원 귀정사에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문을 연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해인 2013년 봄에 갔다. 그후 긴 투병생활을 하며 8년간 머물었으니 나 같은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쉼터의 역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증언자가 되기도 했다. 요즈음은 쉼터가 그래도 많이 알려져 기간을 3개월로 정하고 필요한 경우는 1~2회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정말 특별한 경우엔 다시 논의도 해주기도 하는 열린 곳이다.

쉼터 초창기는 대부분 노동운동 관련자들이 많이 오셨고 이후에는 다양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자원 봉사자들, 연극 영화등 문화 예술인들, 국가폭력 피해자 등 오시는 분의 폭이 넓어졌다.

쉼터는 1000m에 이르는 만행산 자락에 있어 청정한 숲과 계곡이 있고, 불 때는 아궁이가 있는 흙방에서 각각 홀로 거주하기에 쉼과 여러 치유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6·25 당시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불태워진 아픈 기억도 간한 채 천년의 역사를 품은 귀정사에 있기에 명상을 하고 원하면 백팔배 등을 하며 자기성찰의 기회도 가질 수 있고, 지역 귀농인과의 교류도 남다른 치유의 계기들이 되어 주었다.

공양간에서 매일 식사를 함께 하고, 원할 경우 매주 한번 농사나 주변 정리를 위한 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쉬러 온 이들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느낌도 가질 수 있다. 쉼터 중앙 쯤에 열려 있는 그물코 카페는 깔끔하고 안락한 곳으로 거듭거듭 변신을 하면서 쉼터 사람들의 일상적 교류의 장이 되어 주었고, 상주하는 쉼터지기님이 가끔 열어주는 회식 자리는 고요한 쉼터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기도 하며 일상의 활력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쉼터 이용객들은 여러 사회민주주의 현장에서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겪다 쉼이 필요해서 오신 분들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소소히 듣는 그 분들의 삶의 이야기는 참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배움의 장이 되어 주었다. 늘 그렇게 잔잔하지만 뜨거운 연대감이 흐르는 참 각별한 쉼터였다. 짧은 휴식이더라도 오신 분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삶의 영양제가 되는 연대의 쉼터였다는 기억이다,

그렇게 8년여를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회연대쉼터에서 생활한 후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해 나는 이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그곳을 지켜주던 단 한 사람과도 나는 어떤 일면식도 없었는데도 그들은 나를 왜 지켜준 것일까. 뭐라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가 10년이어서 처음으로 쉼터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알리고 후원의 날도 연다고 한다. 고맙게도 가수 정태춘 님이 현장까지 와서 후원 콘서트를 열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두루 고맙고 기쁜 일이다.

뭐라도 보태야겠기에 이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여름 단식투쟁을 마치며 해단식을 단체로 하러 오신 민주노총 전북본부 윤종광 지부장님 일행들, 큰 장마라 전깃불이 나간 공양간에서 죽을 드셨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쉼터에 있던 며칠동안이 오랫동안 노동운동하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던 윤종광 전 전북본부 지부장님은 몇 해 후 암투병하며 쉼터에 다시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안타깝게 돌아가셨는데 본인의 뜻대로 귀정사 서어나무숲 소나무 아래 잠드셨다. 매년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추모식을 연다,

쉬는 동안 특식으로 월남쌈을 해 주셨던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님, 기념행사 있을 때마다 생필품을 한아름 안고 오시던 서울의 비정규노동자쉼터 꿀잠의 유쾌한 김소연 운영위원장님, 쉼터 공동대표로 일하시며 일주일에 한번 너무도 자상하게 쉼터 사람들 모두에게 무료진료를 해 주셨던 순천 들풀한의원의 윤성현 원장님, 1대 쉼터지기를 맡아 정말 애써 쉼터를 가꿔 주시던 최정규 선생님, 남도 창을 정말 잘하셨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본인도 쉬러 내려왔다가 덜컥 1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수고해 준 참 선한 청년 김진, 처음 왔을 때 만난 하찌매 씨와 글쟁이로 멋쟁이기도 했던 송기역 시인, 공공운수노조에서 오래 일하다 지친 삶을 쉼터에서 쉬고 지금은 귀촌까지 해서 쉼터에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와 주는 김종호 샘, 노동운동 지식이 해박하고 휴식이 더 필요했던 유 선생님, 쉼터에서 돌아가 원두커피와 차 세트를 편지와 함께 택배로 보내주시던 울산 여성 활동가분들, 웃음과 활기를 몰고 다니셨던 해직교사 출신 개운중학교 박종현 교장선생님, 봄 햇녹차를 처음으로 만들어 주고 간 청년건설동자, 진보정당 해산이라는 국가폭력에 맞서다 지친 심신을 쉬러 와서도 한시를 쉬지 않고 텃밭을 일구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친화력도 뛰어나던 전 민주노동당 오병윤 의원, 기억력이 뛰어난 초은샘, 고양이 보리를 잘 돌보아준 난민센터 고은주 활동가. 그리고 쉼터와 귀정사 나무 문패를 목판하신 판화가 이윤엽 님 외 파견미술팀 분들, 쉼터 다큐멘터리를 일년간에 걸쳐 제작해 주신 김태일 감독님과 강성훈 피디님, 연극대본 집중 집필을 위해 가끔 오다 쉼터 문화제를 열어주던 극단고래 이해성 대표님, 강아지를 잘 돌보시고 노래 작사 작곡하시는 키다리 분 등 여러 문화예술인들. 왜소하지만 맘씨가 참 좋아 함께 찐빵 만들기 연습을 하며 즐겁던 삼청교육대 피해자 분, 쉼터에서 쉬면 조금의 마음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끝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후 저 하늘로 떠난 아프고 아픈 삼성전자서비스센터 해고자 고 정우형 님 등 줄줄이 얼굴을 떠올리면 정말 끝이 없다. 생각하면 이 분들이 8년 여에 이를 동안 산골 쉼터에서 내가 기운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내어 몸과 마음의 재활을 할 수 있게 도와 준 분들이었다.

그런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올해 10주년이라고 한다. 가난한 귀정사와 이름 없는 100여 분의 연대회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쉼터의 열악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나처럼 쉼이 필요한 분들이 꾸준히 아무런 대가도 내지 않고 쉬어가고 운영되어진 것은 참 기적 같은 일을 행하는 여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었다. 이제 다시 낡은 시설들을 보수하고 좀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행사 겸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니 이제 부터는 좀 더 많은 분들이 후원으로, 연대로 함께 해주었으면 참 좋겠다.

마침 음유시인이자 군부독재시절 음반검열을 철폐시킨 장본인이고, 함께 민주평화평등의 항쟁에 연대하던 가수 정태춘 님과 명인, 박성훈 가수, 그리고 박남준 시인과 쉼터의 시인이기도 한 송경동 시인 등이 나서서 우리 모두의 아름다웠던 10년을 노래해 준다고 하니 참 그 세월이 눈물겹다. 가수 정태춘 님은 최근에 우리들의 오월은 장군들의 금빛훈장을 죽은 소년들의 무덤에 묻기 전엔 끝나지 않는다고 말해줘서 울컥했었는데 쉼터에서 만나게 된다니 정말 설렌다.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빛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아닌 스러져가는 이들을 꺾이지 않도록 지탱해주며 위로하고 응원해 주며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곳. 승리한 자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힘써 패배한 자들, 아프거나 지친 이들을 기억하고 사랑해주는 곳. 나의 8년을 지켜준 곳.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해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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