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은 '노출옷' 때문에 일어난다?…'강간문화'가 통계로 드러났다

[해설] 왜곡된 '강간통념' 드러낸 성폭력안전실태조사, 어떻게 봐야하나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

성폭력이 만연하고, 또 만연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경향성을 가리켜 '강간문화'라고 한다.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 여성의 옷차림에서 찾는 등의 피해자 비난 문화가 그 대표적인 요소다. 이러한 강간문화가 한국사회에 여전히 공고함을 보여주는 통계가 나왔다.

21일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만 19~64세 남녀 1만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를 발표했다. 통계에선 성폭력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등의 왜곡된 성폭력 통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령 성폭력 관련 인식과 통념을 묻는 질문에서 응답자의 46.1%는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고 답했다.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대답도 32.1%에 달했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음주사실 등 행실을 성폭력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행해지는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는 피해자로 하여금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규정하는 전형적인 '2차 피해' 행위로 꼽힌다.

다수의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법원은 "성폭력을 피해자의 평소 행실 탓으로 돌리는 주장"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사유로 삼을 수 없는"(청주지법 2021노94) "상당한 2차 피해"(서울중앙지법 2019고정215)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도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 변호사는 <프레시안>과의 지난 인터뷰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행실 등을 비난하며) 피해자의 주변인을 포섭, 회유하는 등의 2차 피해 양상은 성폭력 재판 현장에서 흔한 일"이라며 "오히려 현행 제도 상으론 법원이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어하거나 이를 (여성폭력방지법에 따른) 가중 양형요소로 고려하는 데에 어려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조사에서 드러난 '강간통념'은 제도와 법률 현장 내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실제 피해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지난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통념을 형법체계 내에서 제거하기 위해" 비동의강간죄의 도입 등 강간죄 형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옷차림이 가해자의 '성욕'을 자극해 성폭력이 벌어진다는 식의 인식은 성폭력의 우발성 내지 기습성을 전제로 하는 인식이기도 한데, 이는 성폭력 사건의 대다수가 아는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관계 내 폭력'이라는 실제 통계와도 배치되는 인식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2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접수 건의 82.0%는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했다.

▲지난 5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발언하고 있는 최말자 씨. 최 씨의 사건은 대표적인 '성폭력 통념에 의한 피해' 사건으로 불린다. ⓒ프레시안(한예섭)

국민 10명 중 5명은 '피해자다움' 통념 가져  근거 없는 '무고죄 공포'도

이번 여가부 조사에선 성폭력 피해자의 사건 대응방식을 '정형적인 형태'로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는 피해자는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보는 통념도 확인됐다. 응답자의 52.6%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피해 후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라고 답했고, 39.7%는 '금전적 이유나 상대에 대한 분노,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많다'고 답했다.

이 같은 통계 결과는 "실태조사 상의 신고율이 여전히 10%대로 집계"(김혜정 소장)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몰이해와 '성폭력 무고' 사례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은 범죄 직후 '바로 신고하거나' '바로 장소를 벗어나거나' '바로 가해자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등' 정형화된 대응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9년 안희정 성폭력 사건 당시 대법원은 "특정하게 정형화한 성범죄 피해자의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 보는" 것은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관점"이라는 2심 법원의 판단을 인용한 바 있다.

또한 강간 등 성폭력 사건은 전체 흉악범죄에 비해 현저히 낮은 기소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법적대응을 포기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신고 대응을 '피해자의 정형적 모습'으로 바라보아선 안 되는 이유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0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술·약물·수면상태 등을 활용한 준강간 및 준강제추행 피해 사례에서 법적대응을 선택한 피해자들은 38%(전체 65건 중 25건)에 불과했다. 법적 대응을 선택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처벌에 대한 불확실(30.8%) 때문이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검찰에 송치된 전체 성폭력 피의자 3만1991명 중 기소된 이들은 1만3740명으로 42.9%에 불과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3월 발간한 2022년 성폭력 상담 통계에서 검찰의 불기소뿐 아니라 경찰의 불송치 또한 성범죄 피해자가 "넘어야 할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동 기관의 2022년 한해 불송치 대상자 조사에 따르면 불송치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소가 바로 수사기관 등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 작용"(32.4%)이다.

개별 사건을 들여다보면 △명확하게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은 점 △바로 피해 장소를 벗어나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점 △피해 전후로 가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점 등의 모습이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통계로 드러난 '통념'은 실제 수사과정에까지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통계에서 나타난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근거 없이 부풀려진 '통념'이 실제 피해자들에게 불리한 사회·문화·법률 지형을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성폭력무고죄 검찰 통계 분석'(2017~2018년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 동안 성범죄로 처분된 인원은 8만 677명인 반면 성폭력 무고로 유죄를 받은 인원수는 341명에 불과했다.

당시 연구원은 "성폭력 피해를 주장했다가 무고 혐의를 받거나 나아가 무고죄 유죄까지 선고받는 사례는 그 수가 적더라도 성폭력 피해자 전반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매우 크다"며 "무고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위협은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침묵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법률현장에서 성폭력 무고죄는 가해자들이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해 활용하는 대표적인 '방어 전략'으로 꼽힌다. 김정혜 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6월 무고죄·강간죄 관련 이슈토크쇼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존재하고, 그러한 의심과 비난 때문에 피해자는 침묵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다시 성폭력 근절이 방해되는 악순환의 구조가 있다"며 "가해자는 무고 역고소를 통해 이러한 순환구조를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강간통념', 남성의 경우가 압도적 … "정부 반페미 정치엔 책임 없나"

이 같은 강간통념은 어떻게 생성되고 강화되고 있을까. 성폭력을 여성의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하고 있던 형법 제32장이 지난 1995년까지 유지되어온 만큼 한국사회의 강간통념·강간문화는 길고 견고한 역사를 지닌다. 통념의 극복을 위해서도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다만 여성계에선 지난 대선 국면부터 지속되어온 현 정부여당의 반 여성주의 기조가 이 같은 통념의 강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한다. 무고죄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 강간죄 개정 반대 등 안티 페미니즘 정책을 통해 소위 '이대남(20대 남성) 공략' 전략을 국면전환 카드로 삼아온 현 정부의 기조가 강간통념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통계에선 연령대보다 성별에 따른 성폭력 인식 격차가 두드러졌다. 대부분의 문항에서 여성보다 남성의 성폭력 통념이나 고정관념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고죄 이슈와 관련한 '금전적 이유나 상대에 대한 분노,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많다'는 항목은 30대 남성(43.5%)에서 가장 높은 응답률이 나왔고, '피해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제로 성관계(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항목의 경우 20대 남성(27.7%)에서 응답률이 높았다.

▲지난 5월 17일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광장에서 개최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7주기 추모집회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다' 현장 모습. ⓒ프레시안(한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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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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