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와 전광훈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천하통일'

[이모저모] 김재원과 일본 문부성의 협량한 세계관

△ 천하(天下)는 전통적 동양 세계관에서 '온 세상'을 뜻했다. 근대 이전까지의 중국에서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불렸다.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은 현대어로 바꾸면 '같은 대기권에서 호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조선의 동래부사 이안눌은 임진왜란 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있어 불공대천의 원수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불공대천'의 '천' 역시나 '세상'이라는 뜻이다.

△ 지난 28일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받은 일본 교과서는 독도, 강제동원 문제 등 근대사와 함께 때아닌 임진왜란을 21세기 한복판에 재소환했다. 일본문교출판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천하통일을 달성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으로 중국을 정복하려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따르고 있던 조선에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전쟁이 잘 진행되지 않아 큰 피해가 날 뿐이었다."

같은 출판사의 이전 판에서는 임진왜란의 결과 "조선의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는 서술이 있었지만 이번 판에서는 빠졌다. 침략을 당한 조선은 졸지에 일본이 보낸 대군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로 둔갑했다.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라는 표현도 이웃 국가, 아니 세계인의 관점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일본열도 통일'도 아닌 천하통일이라니? 심지어 현재의 일본 영토에 비하면 히데요시가 정복한 곳은 사실상 홋카이도를 뺀 3개 섬에 불과했다.

고대 중국의 황허·창장 일대를 놓고 겨룬 <삼국지>가 '천하통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도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웃음거리가 될 판에, 히데요시든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이든 '일본이 곧 전 세계'라는 식의 인식은 참람될 지경이다. 꼭 우리가 한국인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 기행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아 온 한 종교 지도자에 대해, 집권 여당의 선출직 당직자가 "우파 진영을 천하통일했다"고 표현한 일도 한국 정치권의 논란거리다. 당 지도부까지 나서서 "자중자애하라"고 공개 경고를 날렸다.

지난 대선이 불과 0.73%포인트차 박빙 승부였음을 감안하면 '보수 천하'라고만 해도 의아한데, 그 보수진영 내부를 일통한 것을 '천하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는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강성 우파가 보수진영을 일통한 것조차 아니지만 말이다.

중세 일본인들이 '천하인'을 자청하거나 열도 통일을 '천하포무'라고 포장한 것이 지금 세계인의 시각에서는 조롱거리인 것처럼, '천하'라는 말을 아무 데나 갖다붙이는 것은 그 말을 내뱉은 자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지만을 섣불리 고백하는 꼴이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면 하늘은 우물 입구만하게 보일 것이다.

△ 송대의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고 했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 화두는 근세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신해혁명을 이끈 중국의 국부 쑨원은 이를 필생의 화두로 삼았고, 한국에서도 백범 김구 선생이 이 경구를 휘호로 남겼다. 별 생각 없이 '천하통일'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공(公)의 가치를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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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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